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

“세균 잡아야 행복한 가족…향기 나야 예쁜 그녀”

2016.08.17 22:10 입력 2016.08.17 22:13 수정 이혜리·최미랑 기자

생활화학제품 TV광고 125개 전수 분석해보니

“어우~ 냄새!”

차에 탄 가족이 갑자기 손가락으로 코를 쥐어 막으면서 표정을 찡그린다.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아내이자 어머니인 여성은 탐정이 된 것처럼 냄새의 출처를 찾는다. 남편은 “나 아니야!”라고 손을 내젓는다. 여성은 에어컨에서 냄새가 난다는 걸 발견한다. 그러고는 페브리즈를 꺼내 에어컨에 부착한다. 페브리즈 향기는 에어컨 주변을 맴돌던 ‘검은 물체(냄새)’를 퇴치한다.

“자기 최고!!” 남편은 아내를 치켜세운다. 아이들도 흐뭇한 표정의 엄마를 향해 하트 손짓을 한다. 행복한 가족, 한 페브리즈 광고가 그리는 장면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케미컬 유토피아’(화학제품에 의존해 살아가는 이상적인 사회)는 광고를 통해 구현된다. 그러나 이런 광고에서 생활화학제품 유해성에 대한 정보는 까맣게 가려진다.

경향신문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 취재팀은 지난 14~16일 한국광고총연합회 광고정보센터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는 2013년부터 현재까지의 생활화학제품 TV 광고 125개를 전수 분석했다. 이 중 안전성을 언급한 광고는 5개뿐이었다. “어린이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보관, 사용해주세요”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광고는 단 1건이다. 제품을 사용할 때 용량이나 주의사항을 지키라는 내용도 제시되지 않았다.

■‘기승전 세균’ ‘기승전 냄새’

“안돼! 병 걸리면 어쩌려구!”

집 안에 있던 아이가 청소를 돕겠다며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손으로 집으려고 하자 엄마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다. “쉽게 더러워지는 비누와 달리 각종 세균을 99.9% 제거해줍니다”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데톨 손 세정제로 손을 씻고 행복해하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이 나온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데 ‘무균’ 상태보다 어느 정도의 세균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생활화학제품 광고에서 세균은 ‘공포’와 ‘위험’으로 다뤄진다. 인간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처치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광고에 등장하는 세균의 모습은 항상 ‘검은 물체’고, 등장인물은 주변에 세균이 있을까봐 두려움에 떨거나 걱정에 꽉 차 있다.

세균이 질병이라는 ‘물리적 공포’를 의미한다면 냄새는 ‘사회적인 공포’다. 광고들은 냄새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그러한 ‘낙인’에 앞장선다. ‘젠틀맨이라면’ ‘예쁜 여성이라면’ 향기가 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에게 냄새가 날까 시름하던 여성은 탈취제를 뿌리더니 갑자기 당당하고 인기 있는 여성으로 변신한다. 학급 회장선거에 나갔지만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던 중학생도 탈취제를 뿌린 뒤 갑자기 회장선거에 당선된다. 분석대상 중 56.8%(71개)가 이같이 세균이나 냄새에 대한 공포를 적용한 경우였다. 공포는 생활화학제품 구매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고, “당신만 모를 수 있다”고 그려진다.

■더러운 남편은 아내 탓?

소파에 기댄 남편이 “어머니 오신다던데?”라고 슬쩍 말을 던진다. 아내는 ‘비상’이다. 더러운 남편 옷을 보더니 “헉, 어떡하지?”라고 걱정한다. 아내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고민상담을 한 뒤 옥시크린으로 남편의 옷을 세탁한다. 집에 방문한 시어머니는 아들의 깨끗한 옷을 훑어보곤 며느리에게 흐뭇한 웃음을 보낸다. 아내는 “빨래 끝!”이라고 외친다.

광고에서 세균·냄새와 싸우는 사람은 주로 30~40대 여성이다. 분석대상 중 59.2%(74개)의 광고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등장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남편과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가정의 청결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여성에게 부여해 제품 구매로 이끄는 광고 전략이다. 광고에서 여성들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거나, 남편·시어머니·전문가로부터 지적이나 조언을 받는 내용도 많았다. 가족 이미지를 이용한 경우도 52.8%(66개)나 됐다.

가족주의를 벗어난 광고에서도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왜곡된다. 다우니 향기를 풍기는 여배우가 지나가자 남자 사진기자가 정신을 잃은 듯이 황홀해한다거나, 잘생긴 남자배우가 두 가지 향기의 다우니를 상징하는 두 여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모두 성적 코드를 이용한다.

광고는 제품 구매뿐만 아니라 사람들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청결을 강박하는 사회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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