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 “숙명여대 사태 계기로 훨씬 더 좋은 트랜스젠더 담론 나와야”

2020.03.01 21:58 입력 2020.03.02 10:35 수정 홍진수 기자

‘다시, 쓰는, 세계’ 낸 손희정, 지난 4년 ‘한국 페미의 역사’ 기록

2016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부상 이후 기록을 담은 책 <다시, 쓰는, 세계>를 펴낸 손희정씨는 지난달 24일 서울 경향신문사 인근에서 만나 “정의롭지 않고, 불평등한 세계를 다시 쓰기 위해 쉬지 않고 반복해서 쓰는 존재”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권도현 기자

영화연구자이며 문화평론가인 손희정의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단어는 ‘페미니즘’과 ‘리부트’이다. 2017년 손희정이 쓴 책 <페미니즘 리부트>에 나오는 “2015년,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란 말만큼 당시를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은 찾기 어렵다.

페미니즘이 리부트되고 5년간 한국은 실제로 많이 변했다. 페미니즘을 다룬 영화, 책이 끊임없이 나왔고 페미니즘 논의도 활발해졌다. 2016년 5월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각성해 페미니스트란 정체성을 갖게 된 10~20대도 늘어났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쓴 글을 모은 손희정의 칼럼집 <다시, 쓰는, 세계>(오월의봄)는 지난 4년간의 한국 페미니즘 역사이기도 하다. 손희정은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빠짐없이 목소리를 냈고, 이는 기록으로 남았다. 출간 시기와 맞물려 이번 책에 포함되지는 못했지만, 지난달 7일 결국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 여성을 둘러싼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 근처에서 손희정을 만났다.

이번 사건으로 손희정을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숙명여대 사태’를 주도한 터프(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트랜스를 배제하는 급진 페미니즘) 등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그간 페미니즘 운동에서 배제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 여기에 이르렀다는 이유였다.

손희정은 일단 ‘방치했다’는 비판은 인정하지 않았다. “퀴어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온라인에서 터프와 싸워왔다”는 것이다. 터프의 반발도 어느 정도는 예견했다. 손희정은 “숙명여대 안에 래펨(래디컬 페미니즘) 동아리가 센 편이고, 터프를 이용해 혐오 선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 봤다”며 “다만, 헌법소원을 이야기하는 등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데까지 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여전히, 계속해서 싸우고도 있다. 손희정은 “시간도 많이 빼앗기고 해서 지난 1~2년간은 기자들 인터뷰에 거의 응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많이 후회했다”며 “트랜스젠더 관련 인터뷰는 요청이 들어오는 대로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공격이 들어오면 이에 저항하는 담론도 그만큼 세질 수밖에 없다”며 “없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일이었겠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훨씬 더 좋은 (트랜스젠더 관련) 담론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손희정은 책 서문에서 “지난 4년간 쓴 글을 엮으면서 나는 의외로 낙관적이 되었다”고 썼다. “우리가 바꾸고 있는 세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이 엄혹한 시기를 버텨낼 힘을 얻으실 수 있기를 바란다”고도 썼다.

엄혹한 시기를 통과하면서 낙관을 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손희정은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복잡한 층위가 얽혀 있어 어떤 점에서는 퇴보하기도 한다”며 “(진전과 퇴보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다 설정값(기본값)으로 안정이 되기까지 20~30년은 걸리더라”고 말했다. 이어 “낙관과 절망이 혼재되는 시기인데, 이런 시기를 페미니스트로서 함께 숨쉬며 경험하고 있다”며 “변화의 순간을 그냥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개입하고, 노력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운이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손희정이 지난 4년간 쓴 칼럼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소재는 ‘강남역 10번 출구’였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모인 여성들은 한국 사회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했다. 손희정은 “예전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그렇게 죽으면 ‘그러게 왜 거길 가’라는 식으로 되레 여성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며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여성들이 ‘그게 아니다’란 것을 깨치고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경찰은 ‘남성의 여성 살해’, 즉 페미사이드로 규정하지 않고 정신장애인의 일탈로 치부하려 했다”며 “한국사회에서 여성혐오만큼이나 장애혐오가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혐오는 한가지 층위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 됐다”고 말했다.

“숙대의 ‘터프’ 반발 예상했지만
트랜스 자체를 부인할 줄은 몰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계속 하고 쌓아놓으면 언젠가
그들의 확증편향 깨질 순간 올 것
그래서 지금은 내 할 얘기 할 것”

손희정은 책 제목을 <다시, 쓰는, 세계>라고 지었다. “정의롭지 않고, 불평등한 세계를 다시 쓰기 위해 쉬지 않고 반복해서 쓰는 존재”로 기록되고, 기억되고 싶어 한다. 그는 “다른 사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확증편향의 사회에서 터프나 여성혐오 남성 등을 개인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며 “대신 옳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쌓아놓으면 그 글들이 그들에게 가 닿고 그들의 확증편향이 깨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게 더 나은 미래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내가 해야 할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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