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터뷰

여성 영화는 지금이 트렌드…결국 보편적인 이야기가 될 것

국내 유일 여성영화 채널 ‘씨네프’에서 각각 9년차, 3년차 편성PD로 일하고 있는 진단비씨(오른쪽)와 최희선씨
2020.09.05 08:00 입력 2020.09.05 09:27 수정

<빅 리틀 라이즈>, <핸드메이즈 테일>, <킬링이브> <쓰리 빌보드> 등 여성 감독 혹은 여성 주연의 콘텐츠가 2018년 여러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 수상을 이어갔다. ‘여성서사’와 ‘여성연대’.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영화나 TV시리즈 등 콘텐츠 산업계에선 한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이었다.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른 배우들은 입을 모았다. 그들의 수상이 여성 제작자, 배우, 스탭들과의 연대로부터 이뤄진 결과라고. 또 여성이 업계내에서 차별을 이겨내고 다양한 콘텐츠가 생산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여성 주연은 성공 못해? 여성 감독은 큰 영화 못해? 편견을 깨다

지난 6월 서울 광화문에서 국내 유일의 여성 영화채널 ‘씨네프’ 편성PD 진단비씨와 최희선씨를 만났다. 단비씨와 희선씨는 각각 9년차, 3년차 편성PD다. 씨네프는 10년전부터 여성 시청자를 타깃으로 여성이 좀 더 선호할 만한 영상을 브랜딩하고 여성 관련 이슈를 다루는 특집 편성을 기획하고 있다.

올해로 개국 10주년을 맞은 여성 영화채널 편성PD인 이들에게도 최근 영화계에서 두드러지는 ‘여성’ 감독과 배우들의 활약은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2017년부터 여성서사를 다룬 영화나 TV콘텐츠가 전보다 많이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음을 현장에서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2017년과 2018년은 헐리우드에서 시작된 성폭력 추방 운동 ‘미투(#Me too)’와 그에 이은 성폭력·성차별 대응 단체 ‘타임스 업(TIME’S UP)’의 연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그동안 헐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여성 감독과 배우, 작가 등은 영화계에 만연한 성폭력과 성차별을 향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던 터다.

“저희가 채널에 편성한 시리즈 중에 <빅 리틀 라이즈>, <핸드메이즈 테일>, <킬링이브> 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에서 열린 각종 시상식에서 여러차례 수상을 했어요. 시상식에 오른 여배우들의 수상소감이 당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굉장한 이슈가 됐어요.”

2018년 제75회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 <빅 리틀 라이즈>의 제작자로 작품상을 수상한 리스 위더스푼은 “침묵을 깨고 성폭행과 성희롱을 고발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여러분은 정말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응원했다. 같은 작품으로 TV미니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은 니콜 키드먼은 “여성의 승리”라고 소감을 전했다.

단비씨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우먼 인 할리우드>를 예로 들며 “이 영화는 여성이 인구의 절반인데 여성의 이야기가 다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점과 불이익 등을 수치적으로 제시하고 타개하기 위한 여성 영화인들의 노력이 담겨있다”고 했다. 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빨간 머리 앤>이나 리메이크된 영화 <작은 아씨들> 등에서 전보다 더 풍성하게 그려진 여성 캐릭터들의 관계와 연대를 보면서 여성의 이야기가 제대로 다뤄지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남성 영웅 일색이던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원더우먼>과 <캡틴 마블>, 코로나19로 개봉 시기가 미뤄진 <블랙 위도우> 등 여성 캐릭터를 주연으로 하는 영화들이 속속 생겨나는 것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라고 이들은 말했다. 대형 자본이 투입되는 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이거나, 연출자가 여성감독이라는 것 자체가 ‘여성이 주연 한 영화는 성공하지 못한다’ ‘여성 감독은 큰 영화를 끌어나갈 힘이 없다’는 편견을 단번에 깨뜨리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단비씨는 최근의 변화를 ‘분기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기존 남성 히어로물에서 주연만 여성으로 바꿨을 뿐 달라진 게 없지 않냐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희선씨는 “시청자나 관객들 입장에서는 성별을 바꾼 것만으로도 새롭게 다가갈 수 있어요. 특히 남성 영웅서사는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새로운 걸 찾는 사람들에게 여성서사가 신선하게 다가가는 시대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여성 감독과 여성 배우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동안 여성 감독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소규모 영화나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을 주로 연출했다. 지난해 개봉했던 한국 영화 중 스코어(흥행성적) 10위권 이내에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82년생 김지영>, <돈>, <가장 보통의 연애>가 있다. 11위였던 <말모이>도 여성 감독의 연출작이다. 단비씨는 “지난해 순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상업영화 49편 중 5편이 여성 감독의 연출작이었다”며 “상업영화를 연출한 여성 감독이 2017년에는 0명, 2018년 1명이란 수치와 비교하면 눈에 띄는 활약”이라고 말했다.

희선씨는 “상업영화는 아니지만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벌새>의 김보라 감독도 주목할 만하다”라며 “여성 감독, 여성 주연, 여성 각본의 트리플 F등급 영화인 이옥섭 감독의 <메기>도 재미있게 봤다”며 추천했다.

“PD하면 나영석 PD나 김태호 PD와 같은 제작PD를 흔히 떠올리실 것 같은데요, 방송에는 제작뿐 아니라 채널을 운영하는 편성PD도 있답니다.”

■여성 영화, 지금은 ‘트렌드’지만 결국 보편의 이야기가 될 것

“PD 하면 나영석 PD나 김태호 PD와 같은 제작PD를 흔히 떠올리실 것 같은데요, 방송에는 제작뿐 아니라 채널을 운영하는 편성PD도 있답니다.”(웃음)

편성PD는 하나의 채널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총괄한다. 어느 시간 때에 어떤 프로그램을 꽂을지 결정하고 시청률이나 데이터를 분석한다. 또 예산과 사업 계획서, 시청률 전략 등의 업무 외에도 유관부처 등과 소통창구도 편성PD의 역할이다.

씨네프 편성PD들이 고려하는 등급 중 하나가 ‘F등급’이다. F등급은 2014년 영국의 배스 필름 페스티벌(Bath film festival) 영화제에서 기획한 개념이다. 여성 감독, 여성 각본, 여성 주연 이 세 가지 기준 중 하나 이상을 충족하면 F등급, 세 가지 모두를 충족하면 트리플 F등급으로 부른다. 여성을 다룬 영화 등 콘텐츠를 어떤 기준으로 편성할까 고민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보자는 취지에서 F등급이 도입됐다. 씨네프는 지난해 편성 기준 약 35%를 F등급 영화로 편성했다. F등급 도입 아이디어를 낸 단비씨는 말했다. “각본을 누가 썼는지 연출을 누가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콘텐츠가 그동안 많이 없었으니까요. 이제 젊은 여성 관객 입장에선 지금까지 다뤄지지 않았던 우리 얘기가 나오니까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한국 영화진흥위원회에서 2017년부터 매년 발표하는 ‘한국 영화 성인지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개봉한 총 174편의 영화 중 27편(4.1%), 이중 순 제작비 30억원 이상 상업영화 49편 중에는 5편(10.2%)을 여성감독이 연출했다. 여성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는 174편 중 63편(37.3%), 순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상업영화에서는 8편(18.6%)이었다.

단비씨와 희선씨는 편성PD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로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대한 시청자의 피드백을 떠올렸다. 배우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부부로 나오는데 둘의 대화가 문제였다.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을,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하는 자막을 보고 ‘부부면 동등하지 않나’라는 지적이 나왔던 것이다. 이 작품 구매는 두 사람이 입사하기 전 이뤄진 것이라고 하지만 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단비씨는 “영화를 구입할 당시에는 문제의식이 없었나 봐요. 마침 저희가 피드백을 받았을 즈음 그 영화를 재구매한 상황이라 자막을 바꾼 뒤 다시 방영했다”며 “여성 영화채널을 표방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성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직업상 하루 영화 한두편은 꼭 시청하는 이들에게 여성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지금 트렌드는 여성 영화에요. 여성 영화, 여성서사라고 하면 안 좋게 보는 분들도 있는데 새로운 시장이 나왔다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이 시기가 지나면 (여성 영화도) 보편화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희선씨) “‘여성 영화는 나의 이야기예요. 내가 주체적인 주인공으로서 나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가 좋은 여성 영화라고 생각합니다.”(단비씨)

인터뷰가 끝날 무렵 두사람은 “여성 영화채널이 잔잔하기만한 재미없는 채널은 아니에요. 새롭고 즐거운 콘텐츠를 원하신다면 여성 영화채널 많이 봐주세요”라고 말했다. 여성 영화채널 뿐 아니라 여성서사, 여성연대로 만들어진 콘텐츠는 결코 잔잔하거나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편견과 차별을 넘어 계속해서 도전하고 새롭게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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