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의 새로운 항로 찾아 순항하는 독립잡지

2019.11.02 13:21 입력 2019.11.02 17:16 수정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을까. 전통 있는 잡지들의 휴간 소식이 잇따라 들려오지만 이전과는 다른 저마다의 색깔을 내며 특정분야에 관심을 가진 독자층을 공략하는 독립형 잡지들 중에는 순항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수 경쟁을 하던 관행을 벗어나 정해놓은 분량만 찍어내고, 무엇보다 광고로부터 자유롭다. 꾸준히 읽어주고 뒤늦게라도 과월호를 사서 보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구독 중심으로 수익구조를 재편한 덕분이다. 디자인부터 판형, 편집까지 철저히 독자층의 수요를 꿰고 있어서 조용히 입소문이 나고 있는 것이다.

독립잡지<뉴 필로소퍼>/ 뉴 필로소퍼 제공

독립잡지<뉴 필로소퍼>/ 뉴 필로소퍼 제공

사진을 중심으로 디자인과 현대미술, 독립출판, 문학 등 현대문화에 대한 비평을 함께 담아내는 <보스토크>, 일상적인 삶의 시각에서 철학과 인문학의 가치와 쓸모를 고민하는 글들을 담는 철학 잡지 <뉴 필로소퍼>,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겪는 3040세대 남성의 고민을 담아 삶의 변화를 유도하는 <볼드저널>, 여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다양한 일러스트와 함께 보여주는 <우먼카인드>, 소박한 식사와 같이 이웃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장면들을 서로 다른 감성으로 풀어가는 힙스터 잡지 <킨포크>, 매번 발행되는 한 권의 잡지에 브랜드 하나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다루는 <매거진 B> 등은 잡지의 위기 속에서도 점차 독자들의 삶에 녹아들어가는 대표적인 독립잡지들이다.

전문용어 눈에 안 띄는 철학 잡지

각기 정체성이 분명하기 때문에 관심 없는 독자들은 이름을 듣고 흘려버려도 마니아들에게는 발행일을 챙겨 보게 만드는 이들 잡지는 넓은 범주의 ‘독립잡지’에 들어간다. ‘아마추어’인 개인이나 편집동인들이 자체 제작해 소량으로만 유통하는 잡지를 독립잡지로 분류한다면 어느 정도 대중적으로도 자리를 잡은 이들 잡지는 ‘세미 프로’ 이상 수준으로 볼 수 있다. 판매는 하지만 수익규모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일반 독립잡지에 비해 안정적인 판매구조가 정착되면서 질적인 측면에서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고품질 독립잡지’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내용은 무엇이 다를까. 2018년 1월 창간호를 낸 이래 올해 10월 통권 8호까지 발행한 계간지 형식의 <뉴 필로소퍼>는 철학을 다루지만 읽기만 해도 현기증 나는 고답적인 철학용어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창간호에서 다룬 소통의 문제나 가짜뉴스 문제, 혐오현상을 비롯해 최근호에서 주제인 ‘균형’을 놓고 ‘과연 균형이 좋은 것이고 추구해야만 하는 가치인가’를 묻는 다양한 시선의 글들을 읽다 보면 철학의 기본적 태도인 비판과 성찰이 독자의 삶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

독립잡지<보스토크>/ 보스토크 제공

독립잡지<보스토크>/ 보스토크 제공

<뉴 필로소퍼> 한국어판의 장동석 편집장은 일상과 철학·인문학을 접목한 대중적 글들을 모아 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호주에서 발간되는 이 잡지 원서를 발견했다. 현대철학에서 영미권 철학의 입지가 과거 어느 때보다 탄탄해지긴 했지만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바라던 바와 꼭 맞는 잡지를 찾지 못하던 차에 호주에서 우연히 ‘입맛에 맞는 물건’을 찾은 것이다. 장 편집장은 “내용이 좋고 쉽게 읽힌다고 해서 한국어로 번역된 글들 역시 똑같이 한국 독자들에게 잘 읽히고 호응을 얻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번역과 편집을 위해 내내 고민을 한다”고 말했다.

광고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잡지를 펴내는 입장에서도 반가운 일이다. 애초에 철학 잡지에 광고가 많이 붙기도 힘들겠지만 내용만 좋고 공감을 얻는다면 광고수익을 신경쓰지 않고도 판매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문예지·학술지를 포함한 잡지업계와 독자의 관심이 모두 담론 중심에서 취향 중심으로 이동했다는 점도 우리 잡지가 어느 정도 정착한 데 도움이 됐다고 본다. 학문적으로는 잘 다루지 않던 소소한 일상적 주제를 오히려 개인화된 시대의 독자들은 더 선호하기 때문에 때가 잘 맞은 것이다.” 장 편집장은 과거 잡지들이 했던 역할처럼 <뉴 필로소퍼>를 통해서도 독자들이 취향에 맞는 글들을 생각을 키우는 자양분으로 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독립잡지 볼드저널/ 볼드저널 제공

독립잡지 볼드저널/ 볼드저널 제공

사진을 비롯한 시각예술과 문화에 중점을 둔 만큼 디자인과 판형에서도 차별화를 시도해 호응을 얻은 잡지도 있다. <보스토크>는 사진잡지 또는 사진집 하면 떠오르는 폭이 넓고 위아래도 긴 판형 대신 한 손으로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은 반양장본을 택했다. 2016년 11월 편집동인들이 모여 창간호를 내고 격월간으로 현재 17호까지 나와 있다. ‘선택과 집중’은 매달 나오는 잡지의 주제에도 적용된다. 매호 다른 주제를 선정해 그에 걸맞은 콘텐츠들을 모아 이 잡지만의 색깔이 있는 이미지와 함께 엮어낸다.

<보스토크>를 펴내는 동인들은 현재 진행 중인 잡지시장의 변화를 누구보다 눈여겨봤다. 이미 단행본은 판형이 작고 가벼운 쪽으로 유행이 바뀌었고, 새롭게 주목받는 잡지 역시 광고와 콘텐츠 분량에 구애를 덜 받는 작은 판형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김현호 <보스토크> 대표는 “인쇄광고시장이 뉴미디어 플랫폼에 형편없이 밀려나면서 잡지의 생태계가 이전과 전혀 다르게 바뀌는 중인데, 지금의 잡지는 척박한 생태계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해 물리적인 크기가 작아졌다”고 분석했다.

디자인과 판형으로도 차별화

이에 따라 독립적인 잡지가 태어날 환경은 오히려 더 나아졌을 수도 있다고 그는 봤다. “역설적으로 강한 욕망을 지닌 한두 명의 에디터가 자신의 잡지를 창간하는 일을 가능하게 했다”며 “광고 영업과 수주를 위한 인력을 채용하지 않고 적은 부수만 콘텐츠에 집중해 판매할 수 있다면 최소한 잡지를 창간하는 시도는 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압축적으로 인력을 활용하는 덕에 잡지 발행 외에도 ‘보스토크 메리고라운드’라고 이름 붙인 작가 행사와 세미나, 강의 등의 사업도 기획할 수 있다.

한정된 독자층에 집중하는 방식은 특정 주제가 아니라 특정 성별과 연령대를 향하기도 한다. <볼드저널>은 30대에서 40대까지의 기혼 남성을 주된 독자층으로 겨냥하고 있다. 2016년 창간호를 찍고 현재까지 계간으로 14호까지 냈다. 3년 동안 꾸준한 판매부수를 올리고, 한정된 인쇄수량 이상은 찍지 않기 때문에 과월호가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거래될 정도로 인기를 모을 정도이니 독립잡지 중에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성정아 편집장은 한사코 ‘성공’이란 표현에는 손사래를 쳤다. “사실 아직 수익구조만 봐서는 겨우 밑지지 않고 발행을 계속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잡지 발행과 함께 진행하는 ‘볼드 그라운드’라는 기혼남성 교육 프로젝트가 곧 시범단계를 지나 본격적으로 선을 보일 텐데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서 젊은 아버지들에게 필요한 일과 가정의 균형을 이끌어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볼드저널>은 젊은 아버지들에게 관심을 끄는 ‘대안교육’이나 ‘젠더 문제’ 등 특정한 주제를 실제 현실에서 마주치는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있다. 남성 독자들이 함께 모여 고민과 논의를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 중이다.

서점업계에서도 이들 특성이 강한 독립잡지들의 순항은 장기적으로도 잡지시장의 한 축을 이룰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매번 발간되는 잡지의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다른 어떤 분야의 잡지들보다 재고 비율도 낮은 데다 독자층이 뚜렷해 마케팅 전략을 세우기도 쉽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한 대형서점 관계자는 “개인의 삶과 취향에 중점을 둔 잡지일수록 독자들의 충성도도 높아 일단 한 번 팔리기 시작하면 다음 호도 꾸준히 팔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이미 작은 성공을 맛본 이들 잡지사에서 장르를 다양화해 계속 새로운 잡지를 내는 현상도 나타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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