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황후의 일생’ 큰 인기

2006.12.22 16:59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와 황후 위안룽.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와 황후 위안룽.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1906~1967)가 쓴 회고록이 최근 중국에서 다시 나와 인기를 끌고 있다.

푸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베이징(北京) 췬중(群衆) 출판사가 펴낸 이 회고록의 제목은 ‘나의 전반기 인생(我的前半生)’. 푸이가 1957년 전범의 신분으로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에 있던 인민해방군 선양(瀋陽)군구 전범관리소에 수감됐을 당시 1년여 동안 집필한 것이다. 세차례의 초고를 거쳐 64년 책이 나왔다. 이 책은 12개국어로 옮겨졌고, 그동안 1백87만권이 팔렸다. 이번에 책이 새롭게 나온 것은 췬중 출판사가 2004년 3월 책 관련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첫번째 초고와 두번째 초고를 발견한 것이다. 출판사측은 독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푸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초고에서 빠진 부분 16만 글자를 새로 보충해 이번에 책으로 냈다.

푸이는 1908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로 즉위했으나 중화민국 성립 이후 1912년 제위에서 물러났다. 30년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괴뢰 황제로 있다가 해방 이후 59년까지 전범으로 감옥에서 지내다 특사로 풀려나 이후 정원사와 청나라 역사를 감수하는 일을 하다가 67년 암으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마감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회고록에서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중국의 마지막 황후인 위안룽(婉容)이 일본 군관의 사생아를 뱄고 화가 난 푸이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궁이에 던졌다는 부분이다. 푸이는 1명의 황후, 1명의 비, 2명의 귀인을 두고 있었다. 황후 위안룽은 푸이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는 없었지만 황후라는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푸이는 밝히고 있다. 그녀가 아편에 빠진 것은 친정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고 일본 군관과 간통한 것은 친정 오빠가 주선한 것이다. 오빠는 위안룽이 1932년 푸이를 따라 톈진(天津)에서 다롄(大連)으로 옮기던 도중 ‘어떤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여동생을 일본 군관에게 넘겼다고 푸이는 지적하고 있다.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는 이어졌고 푸이는 1935년 ‘황후’가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는 화가 났지만 일본인들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일을 크게 떠벌리지는 않았다. 위안룽이 아이를 낳자마자 푸이는 아이를 아궁이에 던져 죽였다.

그녀는 일본이 패망한 이듬해인 46년 지린(吉林)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아이가 궁밖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오빠가 매달 상당한 돈을 양육비로 챙겼기 때문이다. 푸이는 위안룽과 이혼하려고 했으나 일본인과 관동군측이 모두 불허하면서 또다른 귀인을 물색해서 보복을 하기로 했다. 친척의 소개로 37년 탄위링(譚玉齡)이라는 17세의 만주족 중학생과 결혼했다. 그녀는 42년 원인모를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위안룽은 일본이 패망한 직후 푸이와 이혼했으며 아편 중독에 빠져 몸이 극도로 쇠약해 46년 세상을 떠났다. 신판 자서전 편집을 맡은 멍샹룽(孟向榮) 췬중 출판사 편집인은 “푸이가 위안룽이 낳은 아이를 아궁이에 던진 사실을 64년판에서 삭제한 것은 외국인들이 가질 수 있는 혐오감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회고록은 이밖에 4번째 부인으로 ‘복귀인’이라는 호칭을 받은 리위친(李玉琴·1928년생)과 이혼한 내용 등도 새롭게 부활했다. 리위친은 푸이가 해방 이후 59년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5번 전범 관리소를 찾았다. 그녀는 푸이가 유일하게 아내로 받아들일 정도로 관계가 좋았지만 나이차와 여러가지 배경을 고려해 결국 58년 이혼하고 만다. 멍상룽 편집인은 이 대목을 삭제한 배경에 대해 당시 당의 배려로 62년에 결혼한 간호사 출신의 부인(李淑賢·당시 37세)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베이징|홍인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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