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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버트런드 러셀의 ‘러셀 자서전’

2008.12.05 16:58
이권우 | 도서평론가

‘사랑·지식·인류’를 위한 고뇌의 삶
20세기 대표적 현실참여형 지식인

[자서전 읽기](11) 버트런드 러셀의 ‘러셀 자서전’

서문이 빼어난 책이 있다. 방대한 분량의 본문을 놀랍도록 간결하게 요약하고, 고갱이만 추려놓은 경우다. 아무리 높이 평가받는 책이라도 서문이 좋은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럼에도 간혹 그런 책을 만날 적에는 지은이에 대한 신뢰도가 수직상승한다. 자기가 쓴 책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어서 그렇다. <러셀 자서전>(사회평론)은 서문이 상당히 뛰어나다. 자서전의 서문이 인상 깊다는 말은, 앞에서 말한 바 내용을 휘어잡고 있다는 것 이상을 뜻한다. 지나온 삶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러셀 자서전>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단순하지만 누릴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러셀 자서전>은 일반적인 자서전처럼 연대순으로 씌어졌다. 1872년생인 만큼 그 해를 시발점으로 삼았다(그렇다고 탄생의 순간마저 글로 써놓았다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버트런드 러셀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유년기는 다섯 살 때 겪은 일이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면 자서전은 1876년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종착지는 버트런드 러셀 평화재단을 세우고, 베트남전의 진상을 폭로하는 1967년이다(그는 1970년에 영면한다). 그렇지만 이 책을 시간의 흐름을 쫓아 읽으면 재미없다. 그는 영향을 받고 끼친 사람이 다양하고, 활동무대가 영국과 미국에 걸쳐 있었으며, 서재(書齋)형 지식인이 아니라 현실에 참여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다보니, 내용이 헷갈리기 일쑤고, 정작 비중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채기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궁금해지리라. 답은 서문에 있다. 그의 삶을 지배한 세 가지 열정을 열쇳말로 삼아 자서전을 재배열해야 한다. 그러면, 러셀이라는 거인의 삶이 뚜렷이 드러난다.

[자서전 읽기](11) 버트런드 러셀의 ‘러셀 자서전’

러셀은 사랑을 찾아 헤맸다. 이유는 “희열을 가져”와서, “외로움을 덜어”주어서, “천국의 모습이 사랑의 결합 속”에 있어서였다. 이 말을 한낱 수사적 표현으로 들어서는 안된다. 그의 여성편력은 시쳇말로 하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책 말미에 있는 연표에 ‘러셀의 여인들’이라는 항목이 나올 정도다. 여기에 이름이 오른 여성을 볼라치면, 앨리스 러셀, 오톨라인 모렐, 콜레트 멜리슨, 헬렌 더들리, 도라 러셀, 피터 러셀 등이다(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듯 러셀은 세 번 결혼했다. 그렇다면 다른 여인들은?). <러셀 자서전>의 미덕은 내밀한 개인사를 무척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는 점이다. 특히 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아 읽는 이를 놀라게 한다.

어린시절 친구가 성교를 주제로 음담패설하는 바람에 성에 눈떴고, 열다섯살에는 자위를 했다. 하녀를 꾀어 땅굴집에 데려가 희롱하다 망신당했다. 육군예비학교에 다닐 때 창녀촌을 들락거린 친구들의 음탕한 이야기에 질려 “깊은 사랑이 없는 섹스는 짐승과도 같다고 단정했다”. 이름난 지식인이 자신의 사춘기 시절 성적 방황과 일탈을 이토록 솔직하게 고백한 자서전을 보기란 쉽지 않다. 러셀의 첫사랑은 다섯 살 연상인 미국여인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며 “황후 같은 위엄을 타고난 여성”이었다.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했지만, 세월이 지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오톨라인과 관계를 맺는다. 이 여인의 매력을 보면 러셀이 좋아한 여성들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부드럽고 울림이 많은 목소리와,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강철 같은 의지”가 있었다. 더불어 “잔인한 것을 싫어하고, 특권계급의 오만과 편협을 싫어한다는 점, 그럼에도 우리가 택한 세계에서 약간 이방인 취급을 당한다는 것까지 똑같았다”.

두 번째 결혼은 아이를 갖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 때문에 이루어졌다. 도라는 프랑스 근대철학을 전공했고, 거턴 칼리지의 연구원이었다. 그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두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자 마음이 움직였다. 이 결혼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1920년 러셀은 ‘중국강연협회’ 초청으로 도라와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 여기서 죽을 병에 걸려 고생한 적이 있는데, 얼마나 상황이 나빴던지 일본쪽 신문에 부고기사가 날 정도였다. 영국으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때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혼례를 올리기 위해 런던 중심부의 번화가에 마련된 연단에 올라가 도라가 자신의 공식 간통상대였다는 사실을 하느님 앞에 맹세하는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러셀의 지식에 대한 끝없는 탐구욕을 상징하는 구절이 있다. 조실부모한 러셀은 왕왕 고독감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장엄한 일몰을 바라보며 자살을 결심하고는 했다. “그러나 수학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에 자살을 감행하지는 못했”단다. 하나 더 인용할라치면, 이런 구절도 있다. “완전히 실의에 빠진 나를 구해준 것은 자연과 책과 (좀더 나중에는) 수학이었다.” 수학에 대한 열정은 열다섯살 때부터 싹텄다. 형한테 유클리드기하학을 배웠는데, 그처럼 감미로운 일이 없었고 첫사랑처럼 현혹적이었다고 한다.

<수학의 원리>는 그가 학문영역에서 거둔 최고의 성과다(<수학원리>는 이 책의 개정증보판이다). 이 책의 가치는 두 사람이 ‘증언’해준다. 쥘 뷜멩은 당대의 철학이 러셀의 <수학의 원리>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콰인은 ‘20세기 철학의 태아’라 치켜세웠다. 러셀이 기념비적 저작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페아노와 화이트 헤드다. 1900년 7월, 파리에서 박람회의 일환으로 국제철학대회가 열렸는데,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수학자 페아노를 만났다. 러셀은 토론현장에서 그가 가장 정확하며 자신이 시작한 논제에서는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전저작물을 기증받아 “책속의 단어 하나하나를 조용하게 연구”했다. 마침내 9월에는 “그의 방법을 논리적 연관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했다. 스승이자 친구인 화이트 헤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매일 저녁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그에게 설명하고 토론했다. 토론은 늘 어렵게 끝났으나, 자고 나면 문제가 풀렸다. “그때는 지적 도취의 시기”였으니, 내내 자욱한 안개 낀 산을 오르다 정상을 밟았을 적에 탁 트인 전경을 즐기는 기분을 만끽했다. 이 과정을 어찌나 즐겼던지 원고를 탈고하기 전에 차에 치여 횡사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기까지 했다. 드디어 세기말의 마지막 날, 러셀은 <수학의 원리>를 탈고한다.

러셀은 화이트 헤드를 평하는 자리에서, 그가 영국에서는 수학자로 알려지고 미국에서는 철학자로 활약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빗대어 러셀을 평하자면, 우리 독자들은 그를 수학자로보다는 철학자로 알고 있다. 아마도 에세이와 칼럼 형식을 잘 버무린 대중저서를 다수 출간한 데다(<결혼과 도덕>으로 195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한동안 대학 교양철학교재로 <서양철학사>가 널리 쓰인 덕인 듯싶다. 자서전에도 저서들에 대한 일화가 많이 나오는데,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책은 <서양철학사>였다.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은 독특하다. 러셀은 1938년부터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데 뉴욕시립대에서 초빙했다. 그런데 보수파 인사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그의 임용을 반대했다. 이때 도움을 준 사람이 반스 박사. 자신의 재단에서 철학을 강연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2년 만에 해고당했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는데, <서양철학사>는 이 무렵 씌어졌다. 이 책은 낙양의 지가를 올리며 러셀의 상황을 역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러셀의 자평에 따르면, <서양철학사>의 성공비결은 비평가들이 편견이라 몰아붙일 정도로 독특했던 ‘나름의 관점’에 있다. 책으로 승부를 걸고 싶은 인문학자들이라면 마음에 새겨둘 만한 말이다.

러셀은 “사랑과 지식은 나름대로의 범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늘 연민이 날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고 말한다. 그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대중을 배반할 줄 아는 지식인이었다. 대중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해야 할 말을 했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지어다.” 할머니가 강조했던 성경구절이었다. 그 뜻에 맞게 살려 했다. 그래서 조롱을 받았고 “불경하고 편협하며 진실과는 거리가 멀고 도덕성이 상실되었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고통스러운 절규에 귀를 닫지 않았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는 존 스튜어트 밀의 제자이자 친구였다. 어머니와 함께 여성참정권 지지운동에 참여했다. 이 운동에 동참하고 나서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물적 특징만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유전도 있는 법. 1차 대전에 반대하며 평화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여기서 그는 상식의 허울 밑에 깊이 숨겨진 진실을 만난다.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대학살을 기대하며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돈보다 파괴를 더욱 좋아한다는 끔찍한 사실도 깨달았다. 독재자의 억지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말로 하면, 대중들의 자발적 복종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1940년대부터 러셀은 반핵운동과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투쟁으로 삶을 보낸다. 이 와중에 그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소련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미국이 즉각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자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자서전에는 이에 대한 해명이 실려 있으나, 설득력은 상당히 떨어진다(홉스봄의 <미완의 시대>에 그 비판이 나온다). 그는, 미국의 잇단 핵실험과 매카시즘 광풍에 실망하기 전까지는, 반공주의적 색채가 강한 지식인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는 영국의 지적 풍토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러셀의 자서전에는 오늘 우리의 삶을 예견한 대목이 두 군데나 나온다. 하나는 미국의 패권의식이다. 베트남전의 진상을 알리는 데 진력한 러셀은 “새로운 위험이 전면에 부상했다”고 말했다. “시장과 자원의 끊임없는 모색과 결합된” 미국의 군사적 모험이 세계를 위협하는 주요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암흑의 핵심’을 보아버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 차원의 불평등 문제다. 러셀은 경제혁명을 통해 경제정의를 이뤄야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가능한 일일까? 오늘 우리가 <러셀 자서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물음에 대한 러셀의 답변에 있다. 그는 말했다. 무게를 보태어 저울이 희망 쪽으로 기울도록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잔인함이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사라진 적은 없노라고. 그는 함부로 절망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우리에게 귀띔해주고 있다.

그는 서재(書齋)형 지식인이 아니었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대중을 배반할 줄 아는 지식인이었다. 대중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해야 할 말을 하기 때문이다. 자서전에서도 내밀한 개인사를 털어놓을 정도로 무척 솔직하다. 수학자로서 철학자로서 반핵운동을 비롯,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투쟁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두고 함부로 절망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귀띔한다. 내용이 헷갈리기 일쑤지만, 답은 서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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