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까까머리 어린 시절

2012.10.30 21:55
김재희 작·김정란 그림

1954년 58세의 나이로 소설 ‘취우’를 쓴 공적을 인정 받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이어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또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대되었다.

상섭은 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 이상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장편소설 ‘미망인’ 집필에 몰두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재선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개헌을 준비한 자유당이 의결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사사오입 원칙을 마구잡이로 대입하면서 큰 갈등이 일어났다. 문단의 각 단체들도 세력을 잡기 위하여 날뛰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상섭은 시류에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원고지 매수만 메워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한 삶이었지만, 일제시대, 만주생활, 해방, 한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치인 생을 생각해볼 때 행복한 일상이었다. 1955년에 장편소설 ‘젊은 세대’를 집필했고, 이듬해에 단편 ‘짖지 않는 개’로 아세아 자유문학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전쟁이 끝난 후 치안이 엉망인 국경도시에서 작가인 ‘나’가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전쟁에 진 일본인들의 위상이 한없이 추락하는 것을 목격한다는 내용은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면서 세계인들이 공감할 만한 역작으로 인정받았다. 1957년에는 예술원 공로상도 수상했다.

[소설 횡보 염상섭](18) 까까머리 어린 시절

상섭의 나이 61세였고, 근근이 원고료로 먹고살 만하였으나, 집은 이제나 저제나 항상 비좁고, 오롯한 집필실 하나만이 그의 우주였다.

그 무렵 아내가 성당에 발길을 하면서 김돌로로사라는 수녀가 집안에 왕래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보얗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돌로로사 수녀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화꽃잎을 매만지다가 찬송가를 나직하게 부르기 시작하였다. 찬송가를 듣던 상섭의 뇌리로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교회의 욕조에 파란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눈이 푸른 서양선교사의 안내로 몸을 물속에 깊이 담갔다. 영혼이 맑아지고 육체가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염상섭 군은 오늘 거룩한 세례를 받아 침례교의 세례교인이 된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아멘.”

상섭의 나이 열여덟 살, 일본에서 성학원에 다니던 때였다. 당시 그는 세례를 받고 침례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들어오십시오.”

성가대 풍금반주자 미스 브라운이 문을 열어 상섭을 맞아주었다. 아담한 키에 흰 피부, 그리고 푸른 눈의 그녀는 상섭과 한 살 차이였지만 훨씬 성숙해 보였다.

“상섭 군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있고 동시에 힘이 있습니다. 성가대에 들어와서 찬양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세요.”

브라운의 칭찬에 상섭의 얼굴이 붉어졌다. 영어 공부한다는 핑계로 브라운의 집에 종종 놀러가 원서를 빌려보고는 하였다.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소년은 대답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왜 태어났냐고 물어보세요. 꽃한테 왜 피어있는지 물어보세요. 태양에게 왜 빛이 있는지 물어보세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을 브라운과 같이 읽으면서 영어공부를 하였다. 상섭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마구 떨려서 그녀를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애틋한 짝사랑은 상섭이 학교를 수료하고 교토부립제2중학교로 전학가면서 끝이 났다.

아, 나에게도 그렇게 애타던 누군가를 수줍게 연모하던 시절이 있었구나.

거울을 찾았다. 이 년 전 즈음 왼쪽 이마에 뾰루지 같은 게 났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게 점점 커져 혹이 되어갔다. 아내는 수술하라고 권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호두만 하게 자라났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나이든 모습이 보기 싫게 느껴졌다. 한숨이 잠깐 나왔다. 메워 나가던 원고지를 치우고 상념에 빠져들었다.

“아이고, 이놈이 누굴 닮아서 이리도 고집이 센고!”

“저 할아버지한테 더 이상 배우기 싫어요. 형들처럼 학교에도 가고, 서양 책도 보고 싶다고요.”

댕기꼬리 잘라서 까까머리로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드디어 열한 살 관립사범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여느 때처럼 학교 다녀와 집으로 들어서는데 집안 분위기가 침침하였고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고집불통 떠버리 왔구나.”

어머니는 고집이 센 데다가, 말도 많고 상상력도 풍부한 어린 상섭을 그렇게 불렀다.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오늘부터 집에 계실 거라 그러시는데 잘 모르겠다.”

강제 한일병합으로 군수 직을 박탈당하고 돌아오신 것이었다.

“내 다 혼내줄 것이다. 아버지 쫓겨나게 한 일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때부터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할아버지 밑에서 차마 안경을 맞출 수는 없었다. 어른 앞에서 안경 끼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던 시절이었다. 일본에 유학 가서 안경을 썼을 때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보였다. 광명의 시절, 신학문 신문물에 빠져들면서. 새로운 세상을 한껏 맛보았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려다 불발된 일, 동아일보 기자직을 제의받고 경성으로 돌아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얘, 상섭아. 고집불통 떠버리가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쓰고 작가가 되었구나.”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려 보면서 눈가가 시큰거렸다. 글 쓴다고 낭인처럼 돌아다닐 때에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기어이 눈물이 차올랐다.

그날 밤, 귀뚜라미가 서글프게 우는데 상섭은 자그마한 교자상 하나를 놓고 빈 술잔을 여럿 놓았다.

“자아 이것은 동인이 한 잔 받으시고, 그리고 도향이도 한 잔 받으시게. 그리고 혜석 양도 안 주면 섭섭하겠지. 요건 북에 있는 생사를 모르겠는 정지용, 이광수 선배에게 따라주는 것이고, 그리고 이건 내 잔이네. 모두 어디에 있건 건강하고 행복하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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