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사건 담당 판사들 “솔직히 재판하기 어렵다”

2012.11.25 22:19 입력 2012.11.26 14:58 수정
이범준·유정인·윤은용 기자

대부분 간접증거뿐이지만 양형 강화·사회적 분위기에

애매한 경우 유죄로 기울어… “국민참여 재판 신청 기대”

농사일을 하는 하모씨(53)는 지난 4월 성폭행 혐의 등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지난 15일 항소심에서는 성폭행 혐의가 무죄로 바뀌면서 징역 2년으로 감형됐다. 항소심에서 달리 새로운 증거가 나온 게 아니라 강제성이 없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목격자도 없는 당시 상황에 대한 평가만으로 징역 5년이 오간 셈이다. 징역 3년을 넘을 경우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다.

지난달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난 윤모씨(37)도 1심에서는 징역 3년을 받았다. 노래도우미와 성관계를 맺은 뒤 성폭행 혐의로 고소됐다. 그러나 증거는 사실상 피해자의 진술뿐이다. 윤씨는 “합의하에 가진 관계”라고 주장했지만 1심에서 유죄가 나왔다. 유죄가 되니 양형기준은 징역 2년6월~7년6월이었다. 전과가 없어 그나마 낮은 기준이었다.

성범죄 사건 담당 판사들 “솔직히 재판하기 어렵다”

성범죄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들은 하나같이 이 같은 재판이 가장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목격자나 물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상당수 사건에서 성관계 자체는 서로 인정하지만 강제성을 두고 엇갈린다.

대부분이 간접증거여서 법관들은 심증의 정도를 양형에 반영시켜왔다. 하지만 양형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판사들이 다소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동안은 수사단계 검사부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무고를 막기 위해 꽤 까다롭게 수사를 벌여 기소했다. 그러고 나면 법원은 여성이 수치심을 무릅쓰고 고소한 이유를 생각해 가능하면 유죄를 선고하는 방향으로 갔다고 한다. 이 같은 관행이 가능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양형의 재량 때문이다.

수도권의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 판단하기 정말 어려울 때가 있다”고 했다. 그는 “강제성이 있었는지 따져보면 남녀 입장에 따라 그런 측면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 그동안 적정한 양형으로 간극을 메워온 게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갑자기 양형이 높아져 유죄를 인정하고 나면 최저형이 징역 5년도 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과거와 달리 판사의 재량이 없어지고 주어진 양형기준도 너무 높아, 재판 경험이 많은 판사들은 가능하면 무죄를 선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살인죄의 경우 양형기준이 징역 3년부터 시작한다. 참작 사유가 있으면 집행유예도 가능하다. 최근 술에 취한 채 가족에게 흉기를 휘두른 가장을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모녀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범죄도 징역 1년6월부터이지만 몇 가지 요소가 붙으면 곧바로 중형이다. 주거침입이 인정되고 감형 사유가 없으면 기준이 5~8년이다. 성범죄보다 살인죄의 양형이 전반적으로 높긴 하지만 곧장 추월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요즘 많은 성범죄 사건을 담당하는 젊은 법관들은 애매할 경우 무죄가 아닌 유죄로 기운다고 말했다. 실제 판사들은 여론의 압박에 대해 부담스러워한다. 여론의 압박 탓에 유죄를 선택한다고 말하는 판사는 없지만 그런 분위기가 있다는 얘기는 많다.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른 압박감이 분명히 있다”며 “강압성을 따지는 단계부터 압박을 느끼면서 판결문에 이를 설명하는 데도 훨씬 많은 공을 들인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다른 판사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성폭력 전담 판사들은 어떻게 보면 형사소송법을 어기고 있다”며 “원래 무죄 추정인데 사실 인정부터 양형까지 워낙 비판을 받으니까 아무래도 피해자 쪽으로 기운다. 극적인 반전이 없는 이상은 유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판결이 만약 오판이라면 피고인의 인생은 어찌 되겠느냐”고 했다.

성범죄 양형기준은 2009년 7월 제정 이후 해마다 수정됐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을 때마다 여기저기를 고쳐 기준을 강화했다. 가중 요소를 늘리고, 중범죄 유형을 확대하고, 기준형을 높여 계속해서 올려왔다.

대법원 관계자는 “현재 우리나라 성범죄 양형은 가차 없는 처벌을 추구하는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은 모든 범죄의 양형이 최고 수준의 국가로 재소자만 250만명”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현재 5만여명이다.

그래서 판사들은 성폭력 사건에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해주길 바라는 경우가 많다.

법원 관계자는 “그래서 더 성폭력 사건은 참여재판을 하고 싶다. 이렇게 여론과 법관이 차이가 나는 것은 참여재판을 통해서 해소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참여재판이 개별 사건의 특수성이 있구나, 양형을 마냥 높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구나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최근 인천지법에서 있었던 성범죄 국민참여재판은 67%에서 무죄가 나왔다. 당시 배심원들은 성관계 장소에 이른 경위, 성관계 당시 상황, 피고인과 피해자의 체격과 성격, 기타 제반 사정에 비춰보면 강제성은 없었다고 7명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일부에서는 수사단계에서 피고소인들의 얘기를 잘 들어주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성폭행 사건에서 무죄를 받은 한 변호사는 “경찰서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 말은 안 들어주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고 했다”면서 “검찰도 마찬가지”라고 하소연했다. 그는 “하다 못해 거짓말탐지기라도 받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것마저도 안 해줬다”며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분쟁의 최종 단계인 수사와 재판은 공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법원 관계자들은 “성범죄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엄정한 형사처벌도 필요하다”면서 “하지만 처벌만 올려서는 범죄 양상만 가혹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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