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딸, 그녀는 어떻게 살았을까?

2012.12.15 14:54 입력 2012.12.16 11:04 수정

2005년 1월6일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SS라치오’의 스트라이커 파올로 디 카니오는 라이벌팀 AS로마를 3-0으로 무너뜨린 뒤 서포터를 향해 특이한 골 세레머니를 선보였다. 오른팔을 하늘로 펴는 경례 동작,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경례 모습이었다.

그의 세레머니를 본 언론은 ‘파시스트의 부활’이라며 분노했다. 리그 측에서도 “명확하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상기시킨다”며 벌금형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전도유망한 한 여성 정치인은 색다른 의견을 내놨다. “얼마나 보기 좋은 경례인가. 디 카니오에게 감사 편지라도 써야겠다”. 2차대전이 끝난지 60여년이 지났지만 ‘파시즘’의 부활을 당당하게 주장한 그녀.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손녀인 알레산드라 무솔리니(51)였다.

독재를 긍정한 그녀, 알레산드라 무솔리니 = ‘독재자의 후손’이라 불린 이들은 크게 두 가지의 선택지를 놓고 고민해야 했다.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벌인 행각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답을 회피한채 살려고 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알레산드라의 경우는 전자를 택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의 딸, 알레산드라 무솔리니 | 플리커(Giuseppe Nicoloro) 캡처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의 딸, 알레산드라 무솔리니 | 플리커(Giuseppe Nicoloro) 캡처

무솔리니는 1962년 베니토의 넷째아들 로마노 무솔리니의 딸로 태어났다. 배우 소피아 로렌을 이모로 둔 덕분인지 어려서부터 출동한 외모를 자랑했다. 배우와 가수로 활동했으며, 유럽판 플레이보이지의 표지모델을 했다.

그녀는 1989년 정치인인 남편과 결혼한 뒤엔 정치에 입문했다. 플레이보이 모델이란 편견을 불식시키듯, 그녀는 이탈리아 사회운동당(MSI) 소속으로 나폴리에서 출마, 당당히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은 ‘독재자의 손녀’가 정계에 진출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독재가 끝난 뒤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으며, 70년대부터 MSI을 축으로 하는 신파시스트 단체가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뒤 이탈리아 국민동맹(AN) 소속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2003년 AN당수인 지안 프란코 피니가 이스라엘을 방문해 파시즘을 ‘악’으로 규정하고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행적을 사과하자 불만을 품고 당을 탈퇴했다.

그녀는 탈퇴 뒤 돌연 ‘행동을 위한 자유(freedom of action)’당을 창당,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여성문제와 낙태, 동성애 등에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04년 유럽의회선거에서는 그가 속한 당이 1.2%의 득표를 했으며, 무솔리니 자신도 13만표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2007년엔 다시 정체성, 전통, 주권’(ITS)이란 이름의 극우파 정치그룹에 참여해 반(反) 이민과 반 유럽헌법, 터키의 EU가입 반대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들은 극도의 외국인혐오로 유럽의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2008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우파연합인 지유국민당(People of Freedom) 소속으로 다시 국회의원이 됐다. 최근 베를루스코니가 다음 총리 선거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차기 총리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독재자의 딸, 화려한 복귀의 이유 = 독재자인 아버지를 긍정한 딸들은 많다.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딸인 마리아 이멜다 마르코스(58)도 그 중 하나다. 그녀는 현재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고향인 ‘일로코스노르테주’의 주지사로 있으며 매년 아버지의 생일날 성대한 기념행사를 연다. 그녀는 아버지의 독재에 대해 “가장 훌륭한 길과 다리들이 계엄령 시절 건설됐다. 심지어 영화조차 그 시절 작품들이 더 낫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맏딸 루시아 피노체트(70)도 마찬가지다. 그녀와 그녀의 지지자들은 피노체트의 쿠테타를 “합헌이자, 영웅적 행동”으로 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재시절 인권유린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피노체트의 장례식에서 “아버지는 자유의 불꽃을 태우셨다”고 찬양하는 등 이중적 행보를 보였다. 탈세혐의로 국회의원 진출은 실패했지만, 현재 산티아고의 한 부촌에서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리아와 루시아, 이들은 공통적으로 독재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상반된 평가, 남아있는 지지세력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칠레의 피노체트 전 대통령은 독재자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재임 시절 경제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엇갈리며 상당수의 추종 세력을 지니고 있다. 덕분에 피노체트는 퇴임 뒤 91세로 자연사할 때까지 단 한번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 2700만달러(308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 해외 도피 불법자산 역시 한 푼도 반환하지 않았다.

필리핀도 마찬가지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독재가 끝난 뒤 ‘인권위원회’가 개설, 과거청산 시도를 했으나 군 출신의 국방장관과 군총사령관으로부터 반감을 샀다. 군부는 인권위원회의 조사가 국가안보를 불안하게 하며, 인권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빨갱이’란 주장을 퍼뜨리기도 했다. 여기에 새롭게 들어선 정권의 도덕적 약점까지 맞물리면서 과거 청산은 부실해졌다.

피델 카스트로의 딸 알리나 페르난데스

피델 카스트로의 딸 알리나 페르난데스

아버지에 반기를 든 그녀들 = 독재자의 딸 중엔 아버지에 반기를 든 이들도 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전 대통령의 딸 알리나 페르난데스(55)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카스트로와 나티 레부엘타(당시 유부녀)간의 짧은 로맨스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0살때 처음 카스트로가 생부임을 전해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에 그녀는 이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처럼 기쁘게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점점 독재자 아버지를 자신을 속박하는 짐으로 여기게 됐다. 카스트로는 딸의 진로와 사생활에 심하게 간섭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번은 그녀가 모델로 성공하자 카스트로는 그녀를 고용한 업체 자체를 폐쇄해 버렸으며, 딸이 네번째 남자와 결혼하자 출국 봉쇄령까지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쿠바에서 젊은 날을 보내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93년말 가짜여권과 가발을 이용해 쿠바를 빠져나왔다.

페르난데스는 서방세계로 나온 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피델 카스트로 딸의 회상’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아버지의 행보에 대해 “변덕스런 기질과 공산주의로 장난을 쳐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2002년에는 영국 BBC방송에서 망명 쿠바인들을 위한 리디오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페르난데스는 최근 미국 CNN 방송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쿠바 동향을 전하고 있다. 그녀는 “언젠가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우리는 조국을 재건할 강한 의지가 있다”고 전했다.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침묵한 나도 공범자” = 러시아의 독재자 스탈린은 무자비한 숙청과 공포 정치로 유명하지만 딸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는 둘째 부인이 낳은 딸 스베틀라나를 ‘작은 참새’라 부르며 지극히 사랑했다.

하지만 딸과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베틀라나는 10대시절 영문 잡지를 통해 어머니가 죽은 이유가 아버지의 폭언으로 인한 자살이었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스탈린은 또 스베틀라나의 첫 사랑을 반대하고 그녀의 연인을 강제수용소에 보내기도 했다. 부친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던 스베틀라나는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 알릴루예바를 따랐다.

그녀의 ‘반란’은 이후 계속됐다. 1967년 남편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던 인도인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허가를 받은 그는 인도에 도착한 뒤 곧바로 정치적 망명을 선언했다. 곧 미국으로 망명한 스베틀라나는 미국 공항에서 “표현의 자유를 찾아왔다”며 소련 여권을 불태우며 냉전이 낳은 ‘스타’로 주목받았다. 그해 스베틀라나가 출간한, 스탈린과 크렘린의 생활을 다룬 자서전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1970년 미국인 건축가 윌리엄 피터스와 결혼했지만 이혼했고, 잠시 소련과 영국에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말년엔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극도로 폐쇄된 생활을 했다. 한동안 세간에서 잊혀던 스베틀라나는 지난해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이 내 인생을 망쳤다”며 “어딜 가던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언제까지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녀는 같은해 위스콘신의 한 노인요양원에서 85세로 사망했다.

스베틀라나는 올해 한국 정치계에 크게 회자된 바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때문이다. 박 후보가 지난 8월 김해 봉하마을 故 노무현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을때 대로변에는 스베틀라나의 말을 적어놓은 현수막이 내걸려있었다.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딸로서 침묵한 나도 공범자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에 없으니 내가 그 잘못을 안고 가겠다”, 스베틀라나가 살아생전 아버지의 독재를 반성하며 남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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