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에 어리는 1·2차 세계대전의 ‘악몽’

2014.03.28 20:27

1차 대전 발발 100년, 국수주의·영토 점령 부활 움직임… 푸틴 ‘크림 합병’은 히틀러의 약속 깬 국경선 확장과 닮은꼴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식민지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를 순시하던 중 부인과 함께 암살당했다. 황태자 부부에게 총을 쏜 이는 보스니아 출신의 젊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블리로 프린치프였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이웃 세르비아와 함께 보스니아를 남슬라브 국가의 일부로 만든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거사’는 민족주의를 자양분 삼아 팽창하던 제국주의 식민지 다툼의 위태로운 균형을 깬 ‘티핑 포인트’였다.

오스트리아는 암살 배후에 세르비아 군부가 있다고 지목하고 7월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 지원을 약속했다. 발칸반도를 두고 오스트리아와 경쟁관계에 있던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며 독일에 대항해 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던 프랑스가 전쟁에 뛰어들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계기로 벨기에와 동맹을 맺었던 영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발칸에 한정된 국지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쟁은 세계 대전으로 확대됐고 4년 만에 2000만명의 희생자를 남긴 채 끝났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은 올해 20세기 유럽의 비극을 낳았던 국수주의와 영토 점령이 크림반도에서 재현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이 크림반도 합병으로 이어진 결정적 시점은 마이단 혁명으로 인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축출로 보인다. 서방이 정치·군사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조지아 등 옛 소련에 속했던 영토에 영향력을 확대한 데 대한 위기감이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면서 극대화된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8일 크림 반도 합병을 선언한 의회 연설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우리의 역사적 영토나 뒷마당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군사적 동맹을 형성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한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1853~1856년 크림전쟁은 1차 대전보다 더 현재의 크림 상황과 비슷하다. 현재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인의 이익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당시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지배하던 오토만 제국 내의 그리스 정교회인들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거기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이 힘을 합세해 러시아와 대적했다는 점에서 현재 외교적으로 고립된 러시아 처지와 비슷하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어리는 1·2차 세계대전의 ‘악몽’

■ 푸틴, 히틀러에 빗댄 ‘아돌프 푸틴’ 유행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푸틴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이 유행이 됐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4일과 5일 연이어 푸틴을 아돌프 히틀러에 빗대 비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인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푸틴의 주장은 1930년대 나치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해 유럽에 있는 독일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침략에 나섰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와 존 매케인 미 상원의원도 푸틴을 히틀러에 비유했다.

2차 대전 전의 상황과 지금 러시아의 상황, 히틀러와 푸틴의 발언을 비교하면 이들의 주장이 완전히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옛 소련 붕괴가 러시아 개입의 ‘인계철선’이 된 러시안 디아스포라를 만들었다면 1차 대전을 종결지은 베르사유조약은 독일 영토를 분할시켜 유럽 각지에 독일인 디아스포라를 만들었다. 1930년대 후반 무렵 오스트리아에 약 600만명, 체코슬로바키아에 300만명, 단치히에 35만명의 독일인이 거주했다. 현재 발트해와 우크라이나, 중앙아시아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러시아인은 약 2700만명으로, 조지아 침공과 크림 사태에서 보듯이 러시아는 이들 러시아 유민을 개입의 명분으로 삼았다.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국가사회주의당은 1933년 권력을 잡은 이후 베르사유조약이 설정한 유럽의 국경선에 끊임없이 도전해왔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침공했고, 한 달 뒤 치른 주민투표에서 99.7%의 찬성으로 합병이 결정됐다. 러시아 역시 옛 소련 붕괴 후 설정된 영토선에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 독일이 베르사유조약을 어기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거나 위협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1994년 부다페스트 협약을 어기고 크림반도를 합병한 것과 유사하다.

■ 영토 합병 명분 ‘자국민 보호’ 비슷

히틀러의 약속 위반은 계속됐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슈데텐 지역을 할양받은 1938년 9월29일 뮌헨 협정 체결 후 “더 이상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밝혔으나 이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역을 합병했고, 1년 후에는 폴란드를 침공해 결국 2차 대전을 불러왔다. 뮌헨 협정 후 발언만 놓고 보면 크림반도 합병 후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더 이상 군사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밝힌 것과 유사하다. 호주 모나쉬 대학 역사학자 마르코 파빌리신은 “히틀러의 슈데텐 합병에 앞서 친나치 지도자인 헨라인이 슈데텐 지역에서 친나치 운동을 펼쳤듯, 크림의 ‘러시아 통합당’ 지도자인 세르게이 악쇼노프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앞서 친러 시위를 주도했다”고 밝혔다.

히틀러는 1939년 3월23일 1차 대전 전 프로이센의 영토였던 리투아니아 메멜란트를 합병한 후엔 “독일인은 세계에 해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일인이 (베르사유조약 이후) 지난 20년간 겪어야 했던 고난을 끝내기 위해 여기 왔다”며 “메멜에 있는 독일인들은 세계가 원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운명을 다시 그들의 손으로 결정지으며 강력한 제국 시민으로 복귀했다”고 말했다. 푸틴도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인이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 “크림과 세바스토폴 주민들은 그들의 권리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크림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이들이다”라며 “러시아 다수 여론도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복잡해지더라도 러시아가 크림에 있는 러시아인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역사전 선례 위험… 대화·타협 필요

이런 유사점에도 푸틴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던 힐레이 교수는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대중에게 설득하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역사전 선례를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상대를 도발적인 단어인 ‘나치’라는 이름으로 악마화하는 것은 협상에 도움이 되지 않고, 선과 악이라는 진영 논리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미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도 지난 6일자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서방이 푸틴을 악마화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 정책의 부재를 변명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역사는 과거의 참극에서 교훈과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일러준다. <몽유병 환자: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으로 향했나>의 저자로, 1차 대전의 독일 책임론을 부정하고 참전국 모두가 똑같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주장해 주목을 받은 크리스토퍼 클라크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교수는 “과거 전쟁은 정치가 실패하고, 대화가 중단되고, 타협이 불가능하게 될 때 얼마나 끔찍한 비용을 치를 수 있는지를 환기시켜준다”며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봉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오히려 지역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라고 말했다.

키신저는 세력 균형이라는 입장에서 크림 사태의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생존과 번영을 하려면 서방과 러시아 어느 쪽의 전초기지도 되어서는 안되며 둘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며 “미국의 우크라이나 정책은 우크라이나의 친서방과 친러 세력이 서로 협력하고 화해하도록 돕는 것이어야지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지배하도록 해선 안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러시아와 서방, 우크라이나의 모든 정치 세력이 이런 원칙 하에서 행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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