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석주 시인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

2015.11.20 20:32 입력 2015.12.31 14:24 수정

“어느 날 갑자기 오는 사랑 잡으려면 가끔씩 ‘미쳐야’ 합니다”

모든 사랑의 전제 조건은 ‘자유’다. 사랑하기 위해선 자유로운 존재가 돼야 한다. 현대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개인의 자유가 늘었다. 남녀 모두 스스로 상대를 선택해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이야기한다. 과거에 사랑을 가로막았던 낡은 장벽이 대부분 사라졌는데도, 왜 사랑은 더 어려워졌을까. 경향신문 연중기획 ‘심리톡톡-사랑에 관하여’ 11월 강연자인 장석주 시인(사진)이 지난 17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여적향에서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주제로 독자들을 만났다. 강연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

장석주 시인이 지난 17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그는 “사랑은 계산이나 예측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우발적이고, 예기치 않은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파생상품”이라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장석주 시인이 지난 17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그는 “사랑은 계산이나 예측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우발적이고, 예기치 않은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파생상품”이라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옵니다. 갑자기 찾아온 사랑은 인생의 큰 위기를 동반합니다. 사랑은 영혼을 건드리고 교란시키고 재편시키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여유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왜 사랑을 하지 않을까요. 사회적 환경이 그렇게 만듭니다. ‘미래에 대한 극심한 불안’이 사랑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 사회가 무한경쟁 사회로 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절대적으로 여유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잉여적 시간이 불가능해지면 감정이 메마르게 됩니다. 당장 중요한 입시나 취직 시험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한가롭게 연애를 할 순 없겠지요. 목전의 필요를 위해서 자기 시간을 다 써야 합니다. 다 써도 그런 꿈들을 이루기 힘듭니다. 잉여적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팍팍함이 사랑을 어렵게 만듭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로리타> 같은 걸작들에서 펼쳐지는 사랑은 절대적인 것을 위해 자기 목숨도 버릴 수 있고 전 재산을 다 걸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많은 생각들은 사실은 낭만주의자들이 배포한 개념입니다. 실제 사랑과 낭만주의자들의 사랑은 조금 다릅니다.

■‘긍정적이기만 한 것에는 생동하게 하는 힘이 없다’

장석주 시인이 지난 17일 ‘심리톡톡-사랑에 관하여’ 강연에서 왜 현대사회가 되면서 ‘사랑’은 더 어려워졌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장석주 시인이 지난 17일 ‘심리톡톡-사랑에 관하여’ 강연에서 왜 현대사회가 되면서 ‘사랑’은 더 어려워졌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현대사회에서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사랑을 하려면 자유로운 존재가 돼야 합니다. 현대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더 힘들어졌습니다. 성인이 된 남녀들은 예전보다 더 쉽게 이성을 만날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상대를 선택해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는 기회들도 늘어났습니다. 자유의 증가로 사랑이 더 쉬워졌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여기서 묘한 역설이 발생합니다.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자 우리는 스스로를 제약하게 됐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찾는 일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결혼 관계도 깨지고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사랑의 부정성’을 지워버린 탓입니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의 영역으로 이끕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거의 완벽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성과원리가 일반화돼 있습니다. 성과원리가 일반화돼 있는 사회에서는 할 수 없음의 부정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님은 새롭게 낸 책 <에로스의 종말>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에 의지하여 타자를 최대한 가까이 끌어오려고 한다. 그리고 가깝게 만들기 위해 타자와의 거리를 파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타자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거리의 파괴는 타자를 가까이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타자의 실종으로 귀결된다. (중략) 부정적인 요소는 그 대립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바로 여기에 부정성의 힘이 있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에는 이처럼 생동하게 하는 힘이 없다.” 상당히 유의미한 지적입니다. 옛날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날은 스마트폰, 화상통화 이런 것들이 거리를 없앴습니다. 가깝게 타자를 끌어온다는 거지요. 그런데 타자가 가까이 오기는커녕 타자가 실종되고 사라지고 부재상태에 놓였습니다. 사랑을 숙성시키는 어떤 거리로 말미암아 생긴 ‘그리움’이라는 감정 등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사랑은 과도함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을) 아주 차갑고 이성적으로, 실물 그대로만 바라봐서는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성을 잠재우고 억눌러야 합니다. 그러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술입니다. 그래서 모든 연애의 초기에는 술이 빠지지 않습니다. 술의 힘을 빌려 용기없는 남자도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렇듯 사랑은 과도함에서 시작됩니다. 과도함은 한계가 없습니다. 한계가 있다면 유일하게 시간이 정해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니콜라스 로만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랑은 반드시 끝나게 마련이다. 아름다움보다 더 빨리, 따라서 자연보다 더 빨리 끝난다.” 사랑에 빠지면 방귀 냄새도 향기롭게 느껴집니다. 사랑이 식으면 방귀 냄새가 지독하게 느껴집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심지어 단점까지도 매력적인 요소로 바꿉니다. 그런 것이 없이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랑을 시작하게 만든 이 과도함이 거꾸로 사랑을 끝내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고 유포했지만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에 사랑도 유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타자를 통한 의미찾기입니다.

사랑은 타자가 내게 주는 분에 넘치는 선물이자, 미래의 유토피아로 가는 불확실한 여정입니다. 그 앞에 무엇이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은 도덕과 수치와 고통, 합리성과 논리의 길에서 벗어나 광란에 이를 만큼 한 사람의 의식을 사로잡는 강렬한 체험입니다. 이 강렬함, 특수하고 안정적이고 열중케 하고, 피할 수 없는 체험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의 위력입니다. 대개 사랑은 우발적 사건입니다. 계산이나 예측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우발적이고, 예기치 않은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파생상품입니다. 이것이 모여서 운명이 됩니다. 사랑이 운명이 될 때 ‘이것은 사랑이다’라고 선언하죠. ‘이것은 사랑이다’라고 선언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알랭 바디우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려는 욕망이고, ‘삶의 재발명’”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했는데, 사랑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자신을 던져넣을 수 있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 내부에 있는 본성의 요청이고 명령입니다. 사회적 환경이나 자신의 처지 등을 지나치게 고려하다 보면 사랑에 빠질 수 없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그런 이성적인 질서에서 일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쉽게 말하면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는 미쳐야 합니다. 상대가 갖고 있는 미모, 능력, 몸매 이런 것들을 과잉으로 칭찬하고 부풀려서 바라봐야 합니다. 즉, 노력하지 않는 자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려는 자들은 노력해야 합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사랑이 사라져가는 시대야말로 사랑의 가치가 다시 조명돼야 합니다. 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김한솔·황경상 기자 hansol@kyunghyang.com>

[‘심리톡톡’ 시즌2 - 사랑에 관하여] (11) 장석주 시인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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