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모자이크 사회, 밴쿠버

2016.05.09 15:08 입력 2016.05.15 20:47 수정
밴쿠버(캐나다)|장은교 기자

“여기서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짐이 아니니까요.”

큰 눈을 깜빡이며 달지트가 경쾌하게 말했다. 여러 악센트가 섞인 독특한 발음이었지만 ‘짐(burden)’이라는 단어는 또렷하게 들렸다. 달지트는 이탈리아 시민권을 포기하고 2009년 캐나다 밴쿠버에 정착했다. 인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인도 출신 이탈리아 남성과 결혼해 1997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유럽살이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있었고 친구들도 이탈리안이 될 달지트를 부러워했다. 건설회사 감독관이던 남편의 벌이는 안정적이었고 두 아들까지 생겼지만 달지트 가족은 행복하지 않았다. 달지트는 “계속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고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출생지와 피부색을 따지는 보이지 않는 선. 달지트 가족은 그 선 안에서 ‘관리당하며’ 살고 있었다. “대놓고 이민자들을 차별하진 않았지만 그 선을 넘어오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어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방인일 뿐이라는 사실에 달지트 가족은 지쳐갔다. 특히 두 아이가 계속 겉도는 삶을 살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다. 달지트는 결국 이탈리아를 떠났다. 밴쿠버 써리의 다문화지원센터 ‘다이버시티’에서 만난 달지트에게 지금은 행복한지 물었다. “행복해요. 관리자이던 남편은 현장직원으로 일하고 있고 월급도 줄긴 했죠. 그래도 우리 가족은 더 이상 눈치를 보거나 미안해하지 않아요. 캐나다는 우리를 짐으로 여기지 않거든요. 나도 남편도 내 아이들도 이 나라의 구성원이죠.” 열세 살, 열여덟 살 아들도 밴쿠버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달지트는 지금 다이버시티에서 다른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일을 한다.

캐나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다양한 인종의 시민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캐나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다양한 인종의 시민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행복기행](10) 모자이크 사회, 밴쿠버

■다양성이 힘인 사회

우리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생존에 무엇을 더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기준도 만족도도 다르겠지만 경향신문은 열번째 주제로 ‘다양성’을 생각했다. 획일화를 강요하지 않는 사회, 나의 다름이 틀림이 되지 않고 개성이 될 수 있는 사회, 태어난 곳이나 부모의 고향에 상관없이 어울려 사는 사회. 한국의 농촌은 이주여성들과 함께 미래를 꾸려 나가고 있고 생산·제조·서비스업도 이주노동자들 없이는 운영되지 않는다. 북한과의 미래도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과 무시로 악명 높다. 20대 총선에선 ‘반(反)이슬람·반(反)동성애’를 구호로 내세운 정당이 버젓이 선거공보물을 돌리고 출마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 특별보고관은 지난해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인권이사회에서 한국의 심각한 이주민 인권차별 실태를 지적했다. 유엔 보고관은 한국 정부에 결혼 이주여성의 안정적 체류지위를 보장하고,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을 옮길 수 있게 하고 근로기준법을 적용할 것, 까다로운 난민 인정 절차를 개선할 것 등을 권고했다.

캐나다 밴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립대(UBC) 도서관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캐나다 밴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립대(UBC) 도서관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다양한 구성원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한국만의 숙제가 아니다. 캐나다는 1971년 세계 최초로 ‘다문화주의’를 공식 선언한 나라다. 다양한 문화,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라는 것을 특색으로 삼고 다문화주의를 정책이념으로 택했다. 1976년에는 이민법을 개정했고 1982년에는 여성과 원주민 등의 권리를 존중하고 인종이나 종교, 피부색, 정신적·신체적 장애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 ‘캐나다 권리와 자유 헌장’을 제정했다. 1988년에는 다문화주의법, 2001년엔 이주민과 난민보호법을 만들었다. 미국이 이민자들의 다양한 배경을 하나로 녹이는 멜팅팟(용광로) 문화라면 캐나다는 ‘모자이크 사회’를 지향한다. 크기나 색깔, 모양을 하나의 기준으로 맞추거나 재단하지 않고 각각의 조각이 있는 그대로 모여 한 사회를 이룬다는 뜻이다. 캐나다는 이민자가 677만5800명(2011년 기준)으로 인구의 20.6%를 차지한다. 5명 중 1명이 이민자라는 뜻이다. 주요 7개국(G7)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이민자들의 나라로 알려진 미국도 이민자 출신은 12.9%에 불과하다. 2006년부터 2011년 사이에 116만명이 이민왔는데 그중 56.9%가 아시아 출신이었다. 이민자들의 출신 국가는 무려 195개국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2031년에는 15세 이상 인구 중 절반은 이민자이거나 최소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이민자 출신일 것이라는 조사도 있다.

캐나다 밴쿠버 UBC 학생회관  게시판에 색색깔의 메모지가 붙어있다. ‘우리 학교가 왜 좋은가, 우리 학교의 강점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 질문에 학생들이 써붙인 답변 중 다양성(diversity)‘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밴쿠버|김정근 기자

캐나다 밴쿠버 UBC 학생회관 게시판에 색색깔의 메모지가 붙어있다. ‘우리 학교가 왜 좋은가, 우리 학교의 강점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 질문에 학생들이 써붙인 답변 중 다양성(diversity)‘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밴쿠버|김정근 기자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의 밴쿠버는 가장 대표적인 모자이크 사회다. 집에서도 영어를 쓰는 주민 비율이 65%(2011년 기준)에 불과하다. 시민의 52%가 영미권이 아닌 나라 출신이다. 인종과 국적만 다양한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 보호단체 ‘프라이드 소사이어티(Pride Society)’가 매년 8월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여는 게이 축제는 세계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다. 전 세계에서 매년 50만명 이상이 참여한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지난해 말 브리티시컬럼비아주립대 밴쿠버 캠퍼스를 찾았다. 학생회관 1층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큰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개교 100주년을 맞아 설문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UBC의 가장 큰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색색깔 메모지들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띈 단어는 ‘다양성(diversity)’이었다.

<b>비저블 마이너리티</b> 전형적인 유럽계 캐나다인이 아닌 아시아·아프리카·남미 출신의 이주민을 뜻함

비저블 마이너리티 전형적인 유럽계 캐나다인이 아닌 아시아·아프리카·남미 출신의 이주민을 뜻함

■“우리 모두, 다들 어딘가에서 왔다”

창가 옆 넓은 계단에 앉아 있는 세레나(18)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깊은 눈을 가진 세레나는 스리랑카 출신이다. 다섯 살 때 가족 모두 캐나다로 이민와서 살다가 고등학교 때 다시 스리랑카로 갔고, 캐나다로 돌아와 UBC에 입학한 1학년 새내기였다. 열여덟 살 세레나가 아닌 다섯 살 세레나에게 물었다.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 어땠는지, 생김새도 사는 방식도 다른 낯선 나라에서의 삶이 충격적이진 않았는지.

세레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이 너무 친절한 것이 쇼크였어요. 밴쿠버에서는 캐나다에서 태어난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웠어요. 다들 어딘가에서 온 사람들이었죠.”

학생회관에서도 전형적인 앵글로색슨계 캐나다인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넓은 책상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학생들은 머리 색깔도 피부색도 옷차림도 다양했다. “차별당했던 기억이 없어요. 오히려 고등학교 때 스리랑카로 다시 돌아가서 더 이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옆에 앉은 페트라는 미국 알래스카 출신이다. “내가 놀란 건 학교에서 원주민들을 챙기려는 노력이 대단하다는 거예요. UBC는 앞으로 새로 짓는 건물에 원주민들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했어요. 당장 원주민들의 인권을 바꾸진 못하겠지만, 학생들에게 늘 경각심을 주는 거죠. 차별해선 안된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요.”

캐나다 밴쿠버  UBC 학생회관에 있는 학생들.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캐나다 밴쿠버 UBC 학생회관에 있는 학생들.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UBC 재학생 6만1113명 중 밴쿠버 캠퍼스의 유학생 비율은 23%다. 155개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세레나와 페트라처럼 시민권을 가진 이민가정의 2세까지 더하면 비율은 더 높아진다. 세레나와 페트라는 입학 후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나 친구가 됐다. 세레나는 “오리엔테이션에 간 것만으로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했다. “각자 자기 나라 음식을 가져와서 나눠먹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재미있었어요. 워낙 국적이나 배경이 다양하니까 서로 소개하면서 다양한 문화에 대해 자연스럽게 얘기했고요. 전 생물학을 전공할 생각인데 우선 여러 친구들과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천천히 정하려고 해요. 배움의 열매를 얻은 기분이랄까.” 페트라에게 ‘캐나다다운’ 것이 뭘까 물었다. “친절함? 어딜 가도 다양한 문화? 이 두 가지를 빼놓고 캐나다를 말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세레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우(24)는 동아리에서 시험기간을 맞아 힘든 친구들을 응원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중국인이고 중부 서스캐처원에서 나고 자랐다는 조우에게 인종차별을 당한 적은 없는지 물었다. “어릴 때 이웃집 백인 할머니가 우리한테 쌀을 집어 던졌어요. 백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었거든요.” 차별을 당했다는 말보다는 그 다음 말이 놀라웠다. “그게 거의 유일한 경험이었어요.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하면 다들 놀라죠. ‘캐나다에 아직도 그런 사람이 살고 있다니’ 하는 반응이었어요. 밴쿠버에 와서는 비슷한 일을 당해본 적 없어요. 그거 아세요? 밴쿠버에 있는 스시집 수가 일본 전체보다 많대요. 캐나다 사람들이 어떻게 스시를 먹을 수 있었겠어요. 다 이민자들 덕분인 거죠.”

캐나다 밴쿠버에선 다양한 나라의 식재료를 구할 수 있다. 체코,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중국, 베트남, 인도 요리와 식재료를 팔고 있는 건물. 밴쿠버|김정근 기자

캐나다 밴쿠버에선 다양한 나라의 식재료를 구할 수 있다. 체코,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중국, 베트남, 인도 요리와 식재료를 팔고 있는 건물. 밴쿠버|김정근 기자

캐나다 벤쿠버의 유럽인 마을. 이탈리아, 벨기에, 그리스, 프랑스, 덴마크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밴쿠버|김정근 기자

캐나다 벤쿠버의 유럽인 마을. 이탈리아, 벨기에, 그리스, 프랑스, 덴마크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밴쿠버|김정근 기자

조우의 말처럼 밴쿠버에는 다국적 식당들이 많았다. 어떤 나라의 음식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체코, 러시아,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중국, 일본, 태국, 베트남, 인도, 페르시아(이란) 요리 등 이민자들만큼이나 다양한 국적의 음식점을 볼 수 있었다.

세계 어디에나 있다는 차이나타운뿐 아니라 인도타운, 베트남타운 등 다양한 아시안타운이 따로 있다. 벨기에,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음식점과 카페 등이 즐비한 유럽인 마을도 있다.

캐나다 밴쿠버 차이나 타운 입구에 있는 조형물 앞으로 다양한 인종의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조형물에는 ‘인터내셔널 빌리지’라고 쓰여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캐나다 밴쿠버 차이나 타운 입구에 있는 조형물 앞으로 다양한 인종의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조형물에는 ‘인터내셔널 빌리지’라고 쓰여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캐나다 밴쿠버 차이나타운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다양한 한약재료와 건어물, 중국음식 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난 상인들 중에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캐나다 밴쿠버 차이나타운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다양한 한약재료와 건어물, 중국음식 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난 상인들 중에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다운타운 롭슨스트리트의 숙소 1층 로비의 자판기에서는 라면을 판다. 신라면은 2.25캐나다달러(약 2048원), 김치라면은 2달러(약 1821원). 터번을 두르고 로비에 앉아 있던 싱(21)에게 “잘 팔리냐”고 물었다. 싱은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올렸다. “나는 인도 출신인데 인도의 매운 수프와 맛이 비슷해서 즐겨 먹고 있고, 투숙객들한테도 인기가 좋다”고 했다. “밴쿠버 사람들은 낯선 음식을 먹는 데 거부감이 없어요.”

중학교 때 이민온 교포 이성원씨(31)는 “고등학교 때 워낙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모여 있으니까 ‘오늘은 너희 나라 음식 먹을까’ 하면서 돌아가며 각국의 음식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시안을 무시하는 백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애들은 모자란 놈 취급을 받았다”며 “인종차별하는 사람을 농담의 주제로 써먹을 만큼 밴쿠버에서 그런 일은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밴쿠버는 여러 소수민족과 이민자들이 모여서 만든 도시이기 때문에 ‘타운’마다 그 마을에 많이 사는 민족을 고려하는 정책을 편다”고 했다.

■밴쿠버에서 만난 무슬림 소녀

다시 UBC.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머리에 히잡을 두른 무슬림 여학생 바라(18)를 만났다. 부모님이 27년 전 시리아에서 캐나다로 왔고, 바라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모두가 ‘차별이 거의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치지만 바라는 다르게 생각하는 듯했다. “밴쿠버는 다양한 이민자들의 도시죠. 그러나 밴쿠버에서조차 무슬림은 많이 보이지 않아요. 아마 집에만 있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그래도 다른 나라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캐나다 밴쿠버 UBC에서 만난 시리아 이민가정 출신 바라(사진 오른쪽). 바라는 히잡은 썼지만 아바야나 부르카를 입지 않고 검정색 바지에 점퍼를 입고 있었다. 밴쿠버에 사는 무슬림들의 다른 유럽의 무슬림들과 비교해도 복장이 자유로운 편이다. 히잡을 두르지 않는 무슬림 여성들도 많다. 밴쿠버|김정근기자

캐나다 밴쿠버 UBC에서 만난 시리아 이민가정 출신 바라(사진 오른쪽). 바라는 히잡은 썼지만 아바야나 부르카를 입지 않고 검정색 바지에 점퍼를 입고 있었다. 밴쿠버에 사는 무슬림들의 다른 유럽의 무슬림들과 비교해도 복장이 자유로운 편이다. 히잡을 두르지 않는 무슬림 여성들도 많다. 밴쿠버|김정근기자

혹시나 차별, 특히 폭력적인 차별을 겪은 적 있는지 물었다. 바라는 잠깐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잘 들어주세요. 차별을 당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무슬림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다른 문화나 종교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똑같이 폭력으로 대해선 안돼요. 잘 가르쳐줘야죠.” 자신이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으로 들릴까봐 말을 고르고 또 고르는 것 같았다. 바라는 밴쿠버의 무슬림들이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노력하는지 들려줬다. “UBC의 무슬림 학생회에서 프랑스 파리 테러 직후에 이슬람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어요.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고, 서로 말하고 싶은 것을 솔직하고 다양하게 이야기해보는 자리였죠. 200명 이상이 몰렸고 열기가 뜨거웠어요. 밴쿠버의 다른 무슬림 커뮤니티도 계속 이런 행사를 열고 있어요.”

컴퓨터과학을 전공하는 바라의 눈이 안경 너머 반짝이는 것을 보며 지난해 9월 터키 보드룸의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네 살배기 시리아 꼬마 난민 아일란 쿠르디가 생각났다. 바라도 그 소식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쿠르디의 이모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미용실을 하며 살고 있었고 남동생의 가족을 데려오려 했지만 꿈은 비극으로 끝났다. 바라는 “캐나다 난민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저스틴 트뤼도 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2015년이니까요.” 남녀 동수, 원주민 법무장관,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 민주개혁장관, 장애인인 국가보훈장관, 시크교도 혁신·과학·경제발전장관 등 역대 가장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장관들로 꾸며진 내각을 소개하며 지난해 11월 트뤼도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 내각을 “캐나다를 닮은 내각”이라고 표현했다.

캐나다가 처음부터 이민자들에게 따뜻했던 것은 아니다. 1800년대 말부터 금광 개발과 철도 건설 등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캐나다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개발이 끝나자 이주노동자들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원칙도 기준도 없이 이민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남으려면 인두세를 내야 했다. 지금은 모자이크 사회의 상징이 된 브리티시컬럼비아주도 마찬가지였다. 주도 빅토리아의 차이나타운에는 중국인들이 단속반을 피하기 위해 만든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이 남아 있다. 그러나 캐나다는 이민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택했고, 40년 넘게 노력한 결과 모자이크 사회가 됐다.

■체계적인 이민자 지원

써리의 다문화지원센터 다이버시티 1층 교실에서는 히잡을 두른 여성, 터번을 두른 남성, 흑인 남성 등이 영어 수업을 듣고 있었다. 교실에 들어가 참관하는 것은 금지였다. 이민자들은 구경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캐나다 밴쿠버 써리의 다문화지원 비영리기관 다이버시티 입구에서 히잡을 두르고 아바야(이슬람 여성들의 전통의상)를 입은 ‘무슬림 엄마’와 검정 모자를 쓴 검은 피부의 ‘아시안 엄마 ’가 유모차를 끌며 나오고 있다. 밴쿠버|김정근 기자

캐나다 밴쿠버 써리의 다문화지원 비영리기관 다이버시티 입구에서 히잡을 두르고 아바야(이슬람 여성들의 전통의상)를 입은 ‘무슬림 엄마’와 검정 모자를 쓴 검은 피부의 ‘아시안 엄마 ’가 유모차를 끌며 나오고 있다. 밴쿠버|김정근 기자

다이버시티는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1978년 설립된 비영리기관이다. 연방정부에서 운영자금의 절반을 지원받고 나머지 절반은 주정부와 기업체 후원, 통·번역 서비스 같은 수익사업으로 조달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정책을 만드는 두뇌라면 다이버시티는 핏줄이다. 밴쿠버에만 이런 기관이 100곳 이상 있다. 캐나다 전역에는 17만곳 이상 있다. 이런 기관들은 이민자들이 어떻게 행복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이런 노력이 캐나다를 다양성이 힘인 나라로 만든다.

다이버시티 프로그램은 다양하고 체계적이었다. 이민자들과 난민들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류하고 1 대 1 코디네이터를 지정해 맞춤형 프로그램을 만든다. 5세 이하 난민 아이들을 위한 퍼스트스텝 센터, 모국어로 지원하는 초창기 정착 서비스, 단계별 영어 향상 프로그램, 여러 민족이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공동체 부엌과 텃밭, 구직·기술향상 지원 프로그램, 난민 가정을 찾아가 상담하는 아웃리치 프로그램 등이 있다. 고향을 떠나오면서 겪은 상처를 치유하는 트라우마 상담 프로그램도 있었다. 매년 3만5000~4만명의 이민자들이 이곳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다이버시티 로비에 있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사진. 밴쿠버|김정근기자

다이버시티 로비에 있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사진. 밴쿠버|김정근기자

다이버시티에서 직업찾기 프로그램 교육을 받고 청년들. 밴쿠버|김정근기자

다이버시티에서 직업찾기 프로그램 교육을 받고 청년들. 밴쿠버|김정근기자

풀타임과 파트타임을 합쳐 150명의 직원들이 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마케팅 전문가 겸 아트프로젝트 담당자 명 리는 “이민자들이 떠돌지 않고 한 기관에서 정착에 필요한 모든 문제를 의논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점”이라며 “시리아 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강화하려고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최고운영책임자(COO) 타짐 카삼은 “우리의 목표는 이민자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새 나라에 적응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난민 프로그램 카운셀러의 도움으로 이라크에서 온 난민 모자를 만났다. 이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다가 탈출했다. 60대 중반인 어머니 한나는 “이곳(다이버시티)에 오면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잘 도와줘서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아들 왈리드는 “다들 너무 친절하지만, 언어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해서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창문을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으나 영어가 서툴러 해고됐다. 인터뷰 뒤에 왈리드가 직장을 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다이버시티에서 정착지원을 받고 있는 이라크 난민 출신 한나(왼쪽·어머니)와 왈리드(아들)이 로비에 세계지도에서 이라크를 가리키고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다이버시티에서 정착지원을 받고 있는 이라크 난민 출신 한나(왼쪽·어머니)와 왈리드(아들)이 로비에 세계지도에서 이라크를 가리키고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다이버시티 발룬티어 코디네이터 메흐렛 비스렛은 에티오피아 출신이다. 1979년생인 그는 1996년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로 왔고 다이버시티에서 1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다가 2010년 말 정식 직원이 됐다. 메흐렛은 “캐나다라고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칭찬받을 만한 나라라고 생각한다”며 “미국과 비교하면 캐나다는 공교육 시스템이 잘돼 있고, 나도 공립학교를 다니면서 충분히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비스렛은 “이민자들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꼭 맞는 직업을 찾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직업은 그냥 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이자 자존감이라는 설명과 함께.

■도서관의 이주민들

코퀴틀람의 파인트리에 있는 코퀴틀람 도서관은 주민들과 이민자들이 어울리는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곳의 프로그램들은 이민자들의 ‘일상’에 맞춰져 있었다. 지역 고등학생들이 이민가정의 초등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과제를 도와주는 ‘독서 친구 프로그램’, 세금은 어떻게 신고하고 쓰레기 분리배출은 어떻게 하는지 생활의 기본 팁을 알려주는 ‘웰컴 투 코퀴틀람’, 시민권 시험 대비를 돕는 ‘시티즌십 클래스’ 등이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여성들이 요리를 통해 친구를 사귀게 해주는 ‘요리 나눔’ 시간도 있었다. 멀리 떨어진 역에 사는 이민자들을 위한 이동도서관도 운영한다.

밴쿠버 파인트리 코퀴틀람 도서관의 실바나 하우드 부관장이 도서관의 다양한 이민자 지원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밴쿠버 파인트리 코퀴틀람 도서관의 실바나 하우드 부관장이 도서관의 다양한 이민자 지원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밴쿠버 파인트리 코퀴틀람 도서관 수석 사서 제이 피터가 도서관까지 오기 힘든 이민자들을 위해 운영중인 ‘찾아가는 도서관’ 프로그램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밴쿠버 |김정근기자

밴쿠버 파인트리 코퀴틀람 도서관 수석 사서 제이 피터가 도서관까지 오기 힘든 이민자들을 위해 운영중인 ‘찾아가는 도서관’ 프로그램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밴쿠버 |김정근기자

실바나 하우드 부관장은 “도서관에 오는 어떤 사람들도 이질감 없이 맞이할 수 있도록 직원들은 가급적 모든 문화권의 책을 읽도록 한다”고 말했다. 하우드 부관장은 “이민자들 덕분에 밴쿠버는 특별해졌다. 세계의 어느 문화도 모자이크처럼 어울릴 수 있는 도시라니 멋지지 않으냐”며 “밴쿠버 아이들은 다양한 문화를 배우고 대화하는 법부터 배우며 자란다”고 말했다. ‘행복’에 대해 묻자 하우드는 “내가 행복한 첫번째 이유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캐나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서관 안 작은 놀이방에선 루마니아에서 온 한 엄마가 서툰 중국어로 중국계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밴쿠버 파인트리 코퀴틀람 도서관 전경. 지역 주민 누구나 무료로 책과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밴쿠버 파인트리 코퀴틀람 도서관 전경. 지역 주민 누구나 무료로 책과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밴쿠버 파인트리 코퀴트람 도서관에서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노래로 가르치는 영어수업을 듣고 있다.  밴쿠버|김정근 기자

밴쿠버 파인트리 코퀴트람 도서관에서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노래로 가르치는 영어수업을 듣고 있다. 밴쿠버|김정근 기자

리치먼드의 사무실에서 주정부 다문화지원 장관 테레사 와트를 만났다. 그는 “이민자들에게 모국어를 포기하지 말라는 캠페인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일을 찾고 일상생활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지만 이민자들이 모국어를 버려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게끔 권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도 괜찮아!’라는 응원이다. 와트 장관은 “어느 나라도 이제 나 홀로 살 수 없는 시대”라며 “이민자들은 세계로 가는 다리가 되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와트 장관은 중국계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다문화지원 장관  테레사 와트가 BC주의 이민자 지원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다문화지원 장관 테레사 와트가 BC주의 이민자 지원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물론 캐나다도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는 원주민 차별이다. 인구의 4%인 원주민들은 600여개 자치구에서 산다. 다문화사회를 지향하면서 이민자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으나 정작 원주민은 ‘관리대상’으로 전락해 주류 사회에서 배제돼 있다. 이탈리아에서 보이지 않는 선에 갇혀 살다가 캐나다로 온 달지트처럼, 캐나다에는 ‘원주민 달지트’가 숨죽이며 살고 있다.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캐나다의 보편적인 문화에서 차단된 채 사는 원주민들은 실업률이 70~80%에 달한다. 지난해 9월 이후 온타리오주의 한 원주민 마을에서는 열 살이 안된 아이들을 비롯해 100여명이 자살을 기도해 큰 이슈가 됐다.

밴쿠버  스탠리 파크에  있는 원주민들의 전통조각상. 한국의 장승과 비슷하다. 밴쿠버|김정근기자

밴쿠버 스탠리 파크에 있는 원주민들의 전통조각상. 한국의 장승과 비슷하다. 밴쿠버|김정근기자

인도에서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 다시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선택했고 다이버시티에서 다른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고 있는 달지트. 밴쿠버|김정근 기자

인도에서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 다시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선택했고 다이버시티에서 다른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고 있는 달지트. 밴쿠버|김정근 기자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다이버이시티에서 이민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코디네이터 메흐렛 비스렛. 밴쿠버|김정근기자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다이버이시티에서 이민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코디네이터 메흐렛 비스렛. 밴쿠버|김정근기자

트뤼도 총리는 취임 일성으로 원주민 대상 범죄를 수사하겠다고 했고, 지난달에는 원주민 지도자들을 만나 공존을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존재를 부정당하며 살아온 이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건물에 원주민들의 이름을 새긴다는 UBC의 노력은 멋져 보이지만 어쩌면 원주민이 아닌 이들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뿌리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힘이 되어주며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이 힘”이며 “매일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들이 부러웠다. 리치먼드에서 마지막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바라를 다시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지만 바라도 나도 약속한 듯 다시 뒤를 돌아 엷은 미소를 지었다. 모자이크 사회 안에서도 외로움과 차별을 느끼지만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캐나다 소녀 바라, 단일민족의 신화를 배우며 자랐지만 다문화시대를 맞이하며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서로의 행복을 비는 미소였다고 믿는다.

특별취재팀
구정은 김세훈 장은교 김보미 박은하 정희완 김정근 기자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