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열린 길 누가 막으려 하나…사유보다 ‘공유’ 함께 누릴 땅으로

2016.07.15 20:33 입력 2016.07.15 20:44 수정

서울 마포구 폐선부지 가꿔온 ‘경의선공유지 시민행동’

기차가 멈춰 철길만 남은 땅이었다. 고층 건물을 새로 올려 쓸모 있게 개발하기 전까지 철제 담장을 둘러 비워둘 참이었다. 하지만 인적이 끊긴 담장 주변은 스산한 골목이 돼 버렸다. 흉물로 남겨두지 않으려면 나대지에 사람들이 오갈 수 있게 해야 했다.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기다란 공원. 경의선 숲길의 염리동 구간 끝자락, 널찍한 공터에 토요장이 섰던 것은 이 때문이다.

기존의 철길을 정비해 만든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의 연남동 경의선 숲길.  이준헌 기자

기존의 철길을 정비해 만든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의 연남동 경의선 숲길. 이준헌 기자

■폐선부지에 주민들이 가꾼 ‘늘장’

언제나 장이 서길 바라며 이름 붙였던 ‘늘장’은 서울 마포구 도화동 경의선 폐선부지에서 열렸다. 한국철도시설공단 소유의 철도 유휴지, 다시 말해 국유지다. 관리를 담당하는 마포구는 골칫거리가 된 공터를 도심에서 공간이 간절한 시민·지역단체들에 맡기기로 했다. 이들이 자리를 잡아 어떤 식으로든 활동이 이루어지면, 공간은 활력을 얻을 수 있다. 단체들은 ‘늘장협동조합’을 꾸려 구청 측에 경의선 숲길의 공원과 작은 장터 ‘프리마켓’을 합쳐 운영하겠다고 제안했고, 2013년 임시허가를 받아 늘장이 차려졌다.

매주 토요일 서울 마포구 염리동 경의선 광장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인 ‘지지마켓’. 어린이들의 놀거리를 위해 광장 가운데 작은 수영장도 만들었다(왼쪽 사진).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페이스북

매주 토요일 서울 마포구 염리동 경의선 광장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인 ‘지지마켓’. 어린이들의 놀거리를 위해 광장 가운데 작은 수영장도 만들었다(왼쪽 사진).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페이스북

중고제품이나 직접 제작한 상품을 파는 청년·외국인 상인들, 길거리 음식으로 한 끼를 때우려 푸드트럭을 찾는 손님들, 장날을 구경하려는 아이들이 이곳으로 모였다. 늘장 조합원들은 컨테이너를 들여 하나둘씩 상설 가게를 차렸고 나무와 비닐을 얼기설기 얽어 천막도 짰다. 그 안에선 어느 날은 토론이, 다른 날은 연기수업이 열렸다. 여기저기서 모은 그림책으로 가득 찬 작은 도서관도 한편에 지어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를 만들었다. 남은 땅에는 오가며 공터를 알게 된 주민들이 텃밭을 가꾸면서 깻잎, 상추를 키워 이웃들과 나눠 먹었다. 제법 소문이 난 늘장엔 단골이 늘어갔다. 아이들과 부모가, 아니면 친구끼리 찾은 수백명이 주말을 보냈다.

광장 한쪽에선 청소년들이 모여 사방치기 놀이를 하고 있다.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페이스북

광장 한쪽에선 청소년들이 모여 사방치기 놀이를 하고 있다.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페이스북

하지만 폐선부지가 장터로 변할 수 있는 시간은 애초부터 2년 남짓, 시한부였다. 5740㎡ 규모의 이 일대 땅은, 이랜드가 2011년 주관사업자로 선정돼 철도공단과 30년간 임대계약을 맺고 올해부터 개발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늘장은 이 개발이 이뤄지기 전까지만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공사가 시작되면 호텔과 쇼핑몰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구청 측은 지난해 말, 늘장조합에 사용 계약 연장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하며 공간을 비워달라고 요청했다. 공터를 찾는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공간은 이대로 사라져도 되는 것인가.

“호텔을 올리면 투숙객들만 쓰는 땅이 되지만 이대로 남겨두면 훨씬 많은 이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유지가 됩니다. 서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땅을 포함한 모든 공간은 교환가치로 얼마인지 따져서 용도가 정해집니다. 경의선이 지하화하면서 생긴 부지도 무조건 지대를 올리는 방식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어요. 공간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의 활동을 가치로 따져 생각해 본 경험이 없는 것이죠.”

정기황 문화도시연구소 소장은 계약이 끝난 이곳에 남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모두의 공유지…떠나지 않겠다”

공유지(公有地), 개인이나 민간단체·기업이 아닌 국가나 공공단체가 소유한 땅.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동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장소라는 것이 사전적 의미다. 그러나 부동산이 곧 권력인 한국 사회에서 이를 실제로 공유해 본 적은 극히 드물다. 쓸모를 잃은 국·공유지는 많은 경우 기업에 빌려주거나 팔았다. 공공에선 세금을 들이지 않고 해당 지역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식 건물이 들어서고 거리가 정돈되면 주변 부동산값을 올릴 수 있는 데다 경의선 폐선부지처럼 장기임대를 해주면 공공에선 임대료 수익도 얻을 수 있다.

정 소장은 “터전이 바뀐 주민들은 정작 개발로 되돌려 받는 게 거의 없다. 살고 있는 지역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도 참여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철도공단에서 땅을 빌린 이랜드는 30년간 장사를 하며 수익을 올리겠지만 이 개발로 혜택을 보는 이들은 주변에 부동산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뿐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구조에 의문을 갖게 된 늘장의 구성원들은 경의선 부지를 떠나지 않기로 했다. 40개 단체, 100여명이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을 꾸려 폐선부지를 더 많은 시민들이 공유하는 방법을 궁리해보기로 한 것이다. 특히 3년째 자발적으로 참여가 이뤄지면서 쌓여온 활동들과 그 무대를 잃어버릴 수 없다는 공감대가 커졌다.

이들은 구청과 임대계약이 종료된 ‘늘장’을 ‘경의선 광장’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잠시 닫혔던 토요장을 다시 열었다. 더운 여름철 장날의 놀거리를 위해 작은 수영장을 만들고 물총놀이도 열었다. 청년 작가들의 미술전시도 갖고, 텃밭도 계속 가꿨다. 장소를 원하는 주민들과 반상회를 열어 사용방식을 논의하고, 공간에 대한 공부모임도 가지며 의견을 모았다.

기차가 멈추며 시민들에게 돌아온 공유지를 ‘모두의 것’으로 환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 시작된 셈이다.

마포구 주민으로 경의선 광장을 매일 찾는다는 이수진씨는 “반상회를 해보면 인형극, 빵집, 같이 술을 담그는 교실 등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다”며 “구청과 시청 등 관공서는 사용목적이나 사용 후 결과물이 있어야 공간을 빌릴 수 있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터로서의 땅은 충분히 (공유의) 필요성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도화동에 10년째 살고 있다는 대학생 정유진씨는 “자주 찾던 늘장이 없어진 것이 안타까웠다. 집 앞에 이 같은 공간이 마련되면 동네가 더 좋아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진다. 공유지로 남을 수 있도록 방법을 찾고 싶다”며 공부모임에 참여한 이유를 말했다.

하지만 늘장과 달리 구청 승인을 받지 못한 경의선 광장의 활동과 시설들은 사실상 불법점유다. 언제든 강제집행이 이뤄져도 법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의미다. 부지를 내줬던 마포구는 땅 소유주인 철도시설공단의 개발계획이 시작됨에 따라 처음 사용계약을 맺을 때 조건을 달았던 대로 더 이상 공간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경의선 광장에 남기로 한 박현진씨는 “시민들에게 도시의 공간은 점유한 누군가만 사용하는 방식이 익숙하다”며 “자본적인 가치만 인정해 왔기 때문에 ‘돈을 받지 않는 대관은 불가능하다’고 인식해 왔으나 공유지를 갖는 경험으로 공간을 돈보다 사용가치로 따져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월세인가 전세인가’ 혹은 ‘보증금은 얼마인가’라고 묻지 않아도 되는, 사회구성원들이 공유(公有)하는 땅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상업행위는 물론 토론과 포럼, 공연과 강연, 제작공방이나 마을 교실도 이곳에서 할 수 있어요. 커피숍에 가서 음료를 사 먹으며 회의하는 대신 잠시 들러 회의실로 쓸 수도 있는 거죠. 동네 주민모임도 하고요.”

■도심 공간 재구성, 자본논리보다 중한 것

도심 공간의 가치를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은 외국에서도 최근에서야 시도되고 있는 현상이다. 독일 함부르크 시청 인근 고층 빌딩가에는 동네와 어울리지 않게 오래된 건물들이 남아있는 ‘강에피어텔’(Gangeviertel)이라는 구역이 있다. 골목(Gang)과 구역(Viertel)을 합친 이름으로 재개발이 결정된 건물 12채가 10년 가까이 공사가 지연되면서 폐허로 변했던 공간이다. 함부르크시는 2000년 도심에 저렴한 공간을 원했던 예술가들에게 건물사용권을 내줬고, 작업실과 공방이 들어서면서 화가·작가·음악가들이 수시로 오가는 장소가 됐다. 골목에 활기가 돌자 술집, 카페가 생기면서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곳이 됐지만 시는 개발이 확정됐다며 9년 만에 나가달라는 통보를 보냈다.

그동안 가꿔온 둥지를 잃을 수 없었던 예술가들은 조합을 만들어 “개발은 시작단계부터 투자자가 아니라 시민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자신들을 지역 재개발의 협상대상자로 인정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함부르크시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당초 민간사업자에게 부지를 팔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해 예술가조합과 협상을 통해 공공자금을 투입, 건물을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강에피어텔 조합원들은 “도심 재개발에 맞선 공동체의 힘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는 데에 있다. 기업과 시장논리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대안을 생각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도심 공간은 상품이 아니라 생활공간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의선 광장에 남은 이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정 소장은 “3년간 이어온 늘장을 그대로 없애겠다는 것은 관(官)에서 시민과 시민단체의 활동을 도구화한 대표적 사례”라며 “처치가 곤란했던 공간을 돈 들이지 않고 활용한 뒤 이제 사용권은 없으니 나가라고 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은 앞으로 공유지를 개발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도 구상 중이다. 가좌역에서 원효로까지, 6.3㎞에 이르는 경의선 폐선부지는 녹지공간이 됐지만 이 공원은 시민 모두가 이용하는 곳이기도, 그렇지 못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경의선 숲길 중 와우교 구간 일대에 민간사업자와 ‘책의 거리’를 조성하려는 마포구의 계획에는 주민이나 공원을 찾는 이들의 의견이 반영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행동의 이 같은 활동들은 도시의 공유지가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전제될 때 가능하다. 경의선 광장에서 활동하는 고유진씨는 그래서 “공유지는 ‘어려운 장소’”라고 말했다.

“화요일마다 광장에서 같이 밥을 먹는 모임을 합니다. 재료비만 내면 누구나 와서 저녁을 먹을 수 있죠. 공유지는 땅뿐 아니라 관계를 나누는데 방점이 있어요. 공간을 가꾸는 책임이 관청이나 기업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는 인식도 필요하고요. 공유하는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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