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트랜스젠더 변호사 "수술 없이도 '성별 정정 허가' 이끌어내고 싶어"

2017.04.24 16:52 입력 2017.04.25 10:15 수정

박한희 변호사(32)의 어릴 적 꿈은 로봇 박사였다. 박 변호사는 학창 시절 방과 후 과학실에서 노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집에서는 로봇 만화 ‘전설의 용자 다간’, ‘미래용사 볼트론’을 보는 게 낙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강원도에서 열린 과학경시대회에서 장려상도 받았다. 그는 남고를 거쳐 포항공대(포스텍)에 진학해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건설회사도 다녔다.

스무살 넘어서까지 로봇 박사를 꿈꿨던 박 변호사. 그는 지난 2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했다. 그리고 지난 14일 발표된 제6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박씨는 다음달 15일부터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희망법)에서 변호사 겸 활동가로 일한다.

로봇박사를 꿈꾸던 12살 초등학생 박한희는 왜 20년 뒤 변호사가 되었을까. 그는 이른바 ‘MTF’(Male To Female·남성에서 여성) 트랜스젠더이다. 커밍아웃을 한 국내 첫 트랜스젠더 변호사다. 로봇공학도에서 변호사로 첫발을 내딛는그를 지난 20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성당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2시간 30분 가량 진행됐다. 그의 삶과 앞으로의 포부를 들어봤다.

박한희 변호사가 지난 20일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박한희 변호사가 지난 20일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로봇공학자에서 변호사로….

-왜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나.

“중학교 1학년 때 성별 정체성 고민이 시작됐다. 바지 교복을 입어야하는 게 싫었다. 머리카락도, 구레나룻도 기르면 안 되고 짧게 잘라야 했다. 그렇게 남자중학교, 남자고등학교를 다녔고 포항공대 기계공학과를 나왔다. 100명 중 95명이 남성이 직원인 건설회사를 다녔다. 양복 입고 회사 다니는 것이 싫었다. 언젠가 정체성을 못 숨길 것 같았다. (성별 정체성이) 알려졌을 때 회사에서 잘릴 수 있지 않은가. 그래도 전문 자격증이 있으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왕 (자격증) 가질 거라면 나 같은 트랜스젠더를 만날 수 있는 일을 하자.’ 정신과 의사랑 변호사로 선택지를 좁혔다. 트랜스젠더가 성별 정정처럼 법적인 소송도 많이 하고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과 상담도 자주 받는다. 의사가 되는 것보다 로스쿨이 적성에 맞겠다 싶어 로스쿨을 선택했다.”

-어린 시절 원래 꿈은 무엇이었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로봇공학자가 꿈이었다. 기계공학, 전자공학 같은 전공을 고등학교 3년 내내 생각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적응을 잘 했다. 고등학교 때 고민은 했지만 숨기고 살았다. 그런데 포스텍 기계공학과에 가서 4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해야하는데 생활이 쉽지 않았다. 대학 2학년 때 우울증 치료도 받았다. 졸업할 때까지 적응을 못했다. 원래는 박사까지 하려고 학교에 들어갔지만 그냥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빨리 건설회사에 취업을 해버렸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당연히 엄청 좋아하셨다. 좋은데, 제가 평범한 애라면 훨씬 더 좋았겠다, 좋은데 맘 놓고 좋아하지 못하는 이런 반응이었다.(웃음) 변호사 시험 성적이 상위권에 속한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렸을 때에도 다소 아쉬워하시더라. 아마 제가 트랜스젠더가 아니었다면 성적이 좋으니 판·검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웃음) 어머니는 복잡한 감정인 것 같다. 어머니는 제가 앞으로 변호사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도 있으신 것 같다.”

■“퀴어문화축제 관련 기사도 들킬까봐 공개적인 장소에서 보지 못 했다.”

-커밍아웃은 로스쿨 다니면서 했나.

“2013년 3월 서울대 로스쿨을 입학한 뒤 2014년 봄 커밍아웃을 했다. 동시에 인권 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전에는 사회 운동에 접점없이 살았다. 원래는 성별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을 무서워했다. 커밍아웃은 저에게는 ‘파멸’, 그리고 ‘끝장’이었다. (성별) 정체성이 드러나면 모든 것이 부정당할 것이라는 공포심이 컸다. 퀴어문화축제 기사도 들킬까봐 공개적인 장소에서 보지 못 했다. 기사를 보더라도 몰래 보고 그런 수준이었다. 커밍아웃 결심한 게 29살에서 30살으로 넘어갈 때였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30년을 (성별 정체성을) 숨기고 산 건데. 또 30년 숨기고 60살까지 살려면, 그렇게 사는 게 뭐가 의미가 있겠나. 30년 숨기고 살 바에는 차라리 안 되면 깔끔하게 떠나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밍아웃의 두려움에 실체가 있는 건가. 생각이 확 바뀌었다.”

-커밍아웃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

“로스쿨은 상대적으로 간섭이 없고, 꽉 짜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 때문인지 커밍아웃 이후에도 차별적 발언을 들은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커밍아웃 이후 부침을 겪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운’이라고 생각한다. 트랜스젠더가 타인에게 어떤 성별로 인식되느냐를 ‘패싱’(Passing)이라고 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에게 여성으로 패싱이 됐다. 여성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심적인 거부감이나 위화감이 안 느껴진 것 같은데 이것은 운이다. 직장인 중에 커밍아웃을 했는데 ‘네가 무슨 그렇게 하고 여자냐, 어떻게 여자냐’는 소리를 듣는 분들이 있다. 사실 패싱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운이다. 외모를 기준으로 패싱이 될 수 있다, 없다는 것 자체가 차별적이다.”

-로스쿨 시절 사용하던 노트북에 성소수자 혹은 페미니즘 상징 문구 등이 담긴 스티커를 많이 붙이고 다녔다고 하던데.

“저를 모르는 학생한테 조금 더 어필하고 싶었다. 성소수자, 페미니즘 이슈에 조금 더 학생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했다. 노트북으로 도서관에서 필기하고 공부하고 있으면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보는 그런 효과를 노렸다. 제 나름의 1인 캠페인이었다.”

박한희 변호사의 노트북 . 김원진 기자

박한희 변호사의 노트북 . 김원진 기자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요건 소송을 하고 싶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법’에서 일을 하게 됐다. 희망법을 선택한 이유는.

“2015년 1월 희망법에서 인턴을 하면서 많은 분들과 알게 됐다. 성소수자 이슈를 전담하는 변호사가 국내에게 많지 않다. 전업으로 성소수자 이슈만 다루는 변호사가 있는 곳이 희망법과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정도다. 무엇보다 인턴하면서 보니 변호사로서 상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인권운동도 하는 모습이 좋았다. 저한테도 현장의 활동가와 변호사 역할을 같이 하는 것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활동은 무엇인가.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요건 관련해 소송을 하고 싶다. 저만 해도 외과수술을 전혀 안 했다. 현재 기준이 되는 대법원 예규상으로는 성별 정정이 안 된다. 제 주변에도 외과수술을 안 했다는 이유로 성별 정정이 안돼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공개적인 기획 소송으로 변화를 이끌어내보고 싶다.”

-그 다음으로는.

“법조인이나 예비 법조인들을 대상으로 교육도 해보고 싶다. 로스쿨에서도 트랜스젠더를 배우기는 한다. 형사판례에 트랜스젠더 성폭행 관련 판례나 가족법을 배우면 성별 정정 사례에서 트랜스젠더가 등장한다. 하지만 판례로는 배울 뿐, 실제로는 보거나 접할 기회는 없다. 이 때문에 판사들이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할 때도 있다. 이를테면 트랜스젠더에게 여성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 2장을 제출하라는 요구를 했던 판사도 있었다. 실제로 트랜스젠더를 보고 접하며 교육을 하면 법조계 내부에서 트랜스젠더 인식 높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 2월 국내 최초로 MTF(Male to Female·남성에서 여성) 트랜스젠더가 법원에서 외과 수술 없이 성별 정정 허가를 받았다.

“당시 하급심(청주지법 영동지원)의 결정이기 때문에 향후 모든 법원이 동일한 결정을 내린다고 볼 순 없다. 몇몇 분들은 성별 정정 결정을 수월하게 해주는 법원을 찾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판사도 바빠서 보통 결정까지 1~2년 정도 걸린다. 무엇보다 성별 정정을 위한 외과수술을 받으려면 수술 자체가 위험하고 돈도 많이 든다. 돈을 마련하기까지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수술을 한 뒤에 꼬박 최소 2~3개월은 쉬어야 한다. 이 때문에 상당수는 외과 수술 전후로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직접 당사자가 되어 성별 정정 소송을 진행할 계획도 있는가.

“저는 기본적으로 무조건 기각당할 것이다. 대법원 판례와 유사한 지침이 되는 대법원 예규를 보면 성별 정정의 허가 조건으로 ‘명시적으로 생식능력이 없을 것’, ‘외과수술을 통해 생식기를 제거했을 것’, ‘반대 성의 외관을 갖췄을 것’, ‘미성년자가 아닐 것’, ‘자녀가 없을 것’, ‘혼인 중이 아닐 것’, ‘성인이어도 부모동의서 제출할 것’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성별 정정 허용하는 나라 중에서 가장 엄격한 편이다. 웬만하면 성별 정정 신청하지 말라는 것 같다. 저는 호르몬 주사만 맞고 있다. 요건만 보면 저는 무조건 기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소송으로 크게 다퉈야 한다.”

■“유엔(UN)에서는 성별 정정시 외과수술 요구를 일종의 국가의 고문으로 본다”

-다른 나라에서도 트랜스젠더 성별 정정이 까다로운가.

“아르헨티나는 성별정체성법이 따로 있어 완벽하게 성별 정체성에 자기 결정권을 준다. 어떤 심사나 절차도 필요없이 본인이 특정 성별을 받고 싶다고 하면 허가해준다. 덴마크는 외과수술 없이 6개월 동안 유예기간을 준 뒤 성별 정정을 허가해준다. 유엔(UN)에서는 성별 정정시 외과수술 요구를 일종의 국가의 고문으로 본다.”

-트랜스젠더를 옥죄는 또다른 제도적 문제는.

“공적 기록상의 성별 표기 문제가 있다. 트랜스젠더들은 공적 기록에 성별을 써내야 하기 때문에 삶이 고단해질 때가 많다. 취업할 때도 성별을 써서 내야한다. 주민등록제도가 바뀌었지만 성별 표기는 그대로다. 선거인 명부에도 성별이 기재돼 있다. 최근 미국 오리건주에서는 ‘무성’을 법적 성별로 인정했다. 트랜스젠더 여성만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성별 정체성은 굉장히 다양하게 규정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 중 30%가 선거인 명부의 성별 기재 때문에 선거를 포기한다는 통계도 있다.

“(직접 긴 머리의 사진이 담긴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투표를 하게 되면 이렇게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주민등록상 성별이 드러나게 된다. 신용카드 배송이 올 때도 마찬가지다. 배달해주신 분이 서명을 받고 주민번호 뒷자리에 성별 식별 번호까지 적어야 한다. 배달하시는 분은 저를 당연히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번으로 시작될 거라고 생각하셨을 텐데 저는 1번을 적는다. 그러면 본인 맞냐고 재차 묻는다.”

최초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 변호사가 20일 서울 중구 정도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최초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 변호사가 20일 서울 중구 정도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트랜스젠더를 괴롭게 하는 학교와 군대

-트랜스젠더에게 가장 힘든 장소는 어떤 곳인가.

“예전에 트랜스젠더들이 모여 세미나를 했을 때 삶에서 좋았던 순간, 불행했던 순간을 그래프로 그렸다. 거의 모든 이들이 바닥을 쳤던 순간이 20대 초반이라고 했다. 모두가 군입대 전후였던 시기였다. 트랜스젠더에게 병무청으로부터 병역면제를 받으려면 고환 적출이나 외과 수술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간혹 군대 안 가려고 트랜스젠더인 척 했다며 병역 기피자로 기소를 당하기도 한다. 언제든지 범죄자로 낙인 찍힐 수 있다.”

-최근 육군의 성소수자 수사를 통해 군의 성소수자 억압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트랜스젠더도 비슷한 수사를 당한 적이 있다. 트랜스젠더가 군면제를 받았는데 9년이 지나서 병무청에서 ‘당신이 여자로 안 살고 있다’며 기소를 했다. 이분이 여러 사정이 없어서 완전한 여성으로 살지 못했던 것인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뒤져 트랜스젠더 친구랑 병역 관련 얘기를 나눈 것도 증거로 제시하고, 친구를 또 소환해 ‘불어라’고 하고…. 성소수자 단속을 실적으로 보는 문제이기도 하고, 성소수자를 존중하는 마인드 자체가 없는 것이다. 잠재적 범죄자로 보기만 한다.”

-예비군이나 민방위에서도 트랜스젠더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있나.

“저는 이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한 뒤 예비군도 5년까지 마쳤다. 이제는 민방위를 받고 있는데 소집 통지서를 이웃사촌인 통장이 집마다 찾아와서 직접 전달한다. 저도 한번 직접 문을 열고 받았는데 통장 분이 여자처럼 보이니까 ‘본인 맞으세요?’라고 묻더라.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언제든지 소문날 수 있다. 민방위 지침에는 트랜스젠더가 훈련 면제를 받으려면 수술 확인서가 필요하다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외과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은? 관련 지침이 없다. 관할 동사무소에도, 구청에도, 훈련 담당 직원도 관련 규정이 없다고 한다. 공무원들의 마인드에 트랜스젠더는 아예 없는 것이다”

-성소수자를 옥죄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면.

“단연코 학교다. 여러 조사에서 나오는 결과를 보면 보통 남학교에 다니는 게이나 트랜스젠더 여성이 차별과 폭력의 취약집단이다. 트랜스젠더들이 자퇴도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많이 하는 것 같다. 특히 남고에서 여성적인 행동은 놀림거리가 된다. 물리적 폭력, 성희롱 대상도 된다. 대만 같은 경우는 성별평등교육법이 있는데 성소수자 학생도 보호해야 한다. 중학생 게이 학생이 왕따 당하다가 화장실에서 성소수자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만 사회 내부에서 반성의 목소리가 일었고, 이를 계기로 성별평등교육법이 만들어져서 지원책을 만들고 성소수자 교육을 학교에서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부산에서 있었다. 2009년 동성애자 남학생이 학교를 다니다 굉장히 힘들어하다 자살했고 부모가 학교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했다. 2013년 대법원에서 괴롭힘의 일부만 인정을 받고, 학교는 책임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 대만은 비슷한 사건을 겪고 사회 전체가 큰 교훈을 얻었지만, 한국에서는 사건이 사건으로 그치고 말았다”

■“성소수자 기대 수명은 대부분 40살 아래”

-한국 교육은 왜 성소수자 존재에 무감할까.

“교육 과정에서 성소수자를 아예 안 다룬다. 성소수자 내용 자체가 없다. 교과서 자체가 남성 중심, 이성애 중심적이다. 성소수자는 텔레비전 속의 사람일 뿐이다. 홍석천, 하리수씨가 학생들의 시선에선 성소수자의 사실상 전부 아닌가? 그래도 최근 각 대학에서 총학생회장들이 커밍아웃하고, 대학마다 성소수자 동아리가 만들어지면서 성소수자가 10대, 20대 사이에서도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는 것 같다.”

-고통받는 10대 성소수자도 꽤 있다.

“사회에 나갔을 때, 법적 성인이 됐을 때,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롤모델이 없는 상황이다. 성소수자들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저도 그랬다. 트랜스젠더는 연예인 정도 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엄청 예쁜 사람만 가능한 것이다. 교육 과정에서도 미디어에서도 긍정적 롤모델을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외국은 처음부터 교과서에서 성소수자 롤모델이 등장한다. 일본만 해도 굉장히 잘 되어 있다. 한 번은 20대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기대수명을 일부 40세 아래로 적어냈더라. 눈물이 났다. 사회에서 40세 이상 트랜스젠더는 잘 안 보인다. 나이가 들면 사회적 지위도 생기고 결혼을 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알려지기를 더 꺼려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법원에서 성별 정정을 끝내면 평범하게, 조용히 지내고 싶어하는 분들도 많다”

지난달 22일 박한희 변호사(왼쪽에서 두 번째)가 평소 일본 내 성소수자 인권 활동을 해온 야마시타 토시마사 변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함께 희망법 사무실에서 만났다.   희망법 제공

지난달 22일 박한희 변호사(왼쪽에서 두 번째)가 평소 일본 내 성소수자 인권 활동을 해온 야마시타 토시마사 변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함께 희망법 사무실에서 만났다.  희망법 제공

-트랜스젠더 관련 MTF(Male To Female), FTM(Female To Male) 등 의학적인 용어가 많이 쓰인다. 정확한 용어가 뭔가.

“MTF, FTM 어원의 기원이 의학에 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호르몬 치료를 한다 혹은 성전환 수술을 한다고 할 때 주로 영어 약자로 MTF, FTM이 쓰였다. 이 용어는 은연 중에 ‘남자에서 여자로 바꾼 거다. 원래는 남자였다’라는 의미를 준다. 트랜스젠더 우먼(Woman), 트랜스 맨(Man), 트랜스젠더 맨, 이런 식으로 본인의 성별정체성에 맞게 표현하는 게 더 낫다고 본다. 다만 ‘우먼’, ‘맨’을 붙였을 때는 또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문제가 생긴다. 저는 ‘트랜스젠더’라는 말이 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최근 들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2014년 퀴어문화축제 참여한 게 처음이었다. 서울 신촌에서 기독교 단체가 깔고 누워서 방해하더라. 보수 기독교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데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어버이연합, 보수 우익단체, 보수정부랑 다 커넥션이 다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보수 기독교는 교계가 약해지는 것을 공동의 적을 상정해 성소수자를 일종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정권은 묵인하면서 뒤로 오히려 지원해주고. 한국 정부는 재일 한국인이 일본에서 혐한 문제로 공격받을 때는 발벗고 나서고 정작 국내에 거주하는 성소수자, 이주민, 여성들의 혐오에는 침묵하고 있다.”

-이전보다 미약하게나마 편견이 줄어든 것 같은 느낌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랜스젠더 혐오도 예전에는 없었다. 뭘 모르는데 혐오가 어딨나.(웃음) 최근에 기독교계에서 동성애, 항문성교라고 뭐라뭐라 말하니깐 이제 드디어 성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는 것인데, 좋아해야하는 건가. 기독교계에서 주장하는 것은 ‘나는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싶다’인데, 이게 되게 양면적인 것 같다.(웃음) 어쨌든 젊은 세대들은 접한 게 많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수준이 여전히 낮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는 나라라고 한다. 미국 연구기관의 조사를 보면 한국 시민들의 성소수자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2007년에서 19%에서 2013년 38%로 올랐다. 2013년 결과도 여전히 많이 낮은 편이지만 가장 빠르게 인식이 좋아지고 있는 나라라고 한다.”

■“트랜스젠더의 롤모델이 되고 싶다”

-진보 내부에서도 성소수자 혐오가 있다.

“로스쿨 친구 중 한 명이 노동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정작 성소수자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 아니냐고 묻는다. 기독교만 설득하면 그냥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냐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약간 머리가 띵했다. 여전히 진보진영 사람들은 정치운동이라고 하면 거대 이슈, 거대 담론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노동에서도 노동조합 내에서도 성소수자가 있다. 그 분들이 노동조합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얘기도 하면서 정치적 불평등을 논해야 하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노동 따로, 성소수자 이슈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성소수자 문제는 찬밥이다.

“이번 대선은 촛불 시민들이 만든 판이다. 촛불 시민들이 모인 광장에서는 비정규직, 빈부격차, 성소수자 등 다양한 차별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차별금지와 평등의 정신이 촛불의 기반이었는데 정작 몇몇 후보는 기독교계를 찾아가서 동성애 차별은 하지 않지만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보수 기독교계가 자신을 뽑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에 대한 지적도 해야겠다. 언론에서는 ‘설거지는 여성이 하는 일’이라는 발언에만 초점을 맞췄는데 같은 자리에서 홍 후보는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는) 동성애는 난 그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굉장히 차별적인 발언이다. 수술한 사람들은 고생했으니까, 주류 사회에 편입하려고 노력했으니까 인정해줘야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온정주의와 차별주의적 시선이 함께 깔려 있다. 언론에서도 설거지 발언만 지적했을 뿐, 성소수자 혐오 발언은 지적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지위를 인정받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다른 트랜스젠더들의 삶과 어느 정도 차이점이 생길 것 같다.

“건설회사 다닐 때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아서 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직장 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많다. 하지만 건설회사에서 숨기고 다녔기에 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희망법’에서도 차별을 경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트랜스젠더들은 상당수 신분이 잘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 등 노동조건이 좋지 않은 곳에서 일을 한다. 당연히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더욱 주변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 한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커밍아웃하기 전까지는 정말 꿈이 없었다. 항상 곤란했던 질문이 5년 뒤에 저에게 뭘 하고 있을 거냐고 묻는 거였다. 로스쿨 면접 때도 있었는데, 정말 못 적겠더라. 사실 저도 다른 성소수자처럼 오래 살아있을 거라 생각을 안 했다. 정말 적을 게 없었다. 예전에는 억지로 꾸역꾸역 써 넣었는데. 이제 처음으로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됐다. 제 꿈이라면 이제 오래 사는 것이다. 오래도록 활동하는 트랜스젠더 롤모델이 없어서, 그래서 그냥 되게 조용히 늙어서 계속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중에 뭐 30년 뒤에 이런 인터뷰 나와서 멋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모두에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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