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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표 균형외교

2017.11.14 21:16 입력 2017.11.14 21:17 수정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외교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인 ‘균형외교’를 말하기 시작했다. 최근 중국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갈등 봉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 한·중 정상회담,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정상회의 등으로 이어지는 외교 일정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균형외교’는 중심에 있었다. 한때 ‘미국의 가랑이 밑을 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에 경도된 모습을 보였던 것을 감안하면 분명 의미 있는 변화다.

[유신모의 외교포커스]문재인표 균형외교

그런데 청와대와 문 대통령이 말하는 균형외교는 결이 조금 다르다. 미·중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미·중 외에 다른 외교 파트너들과 협력을 확대한다는 설명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일 한·미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라며 “중국을 포함한 아세안(ASEAN), 러시아, EU(유럽연합) 국가와의 외교관계를 다변화해 균형 있는 외교를 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지난 9일 베트남에서 발표한 ‘신남방정책’에 대한 설명도 유사하다. 사드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논란 등을 거치면서 미·중 중심의 외교에 한계가 드러난 만큼 유라시아 신북방과 이어지는 아세안 중심 신남방 경제외교를 확대해 외교의 균형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물론 외교영역 확대는 장기적으로 미·중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다. 문 대통령의 공약에도 아세안 등에 대한 외교를 강화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하지만 정부가 이를 균형외교라고 지칭한 적은 없었다. 지금 정부가 설명하는 내용은 ‘외교의 다변화’이지 균형외교가 아니다. 아세안, EU 등으로 외교지평을 넓히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미·중 사이에서 한국이 안고 있는 전략적 딜레마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정부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문 대통령은 균형외교 논란의 시발점이 된 지난 3일 외신 인터뷰에서 “대미외교를 중시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도 더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균형 있는 외교를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균형외교는 ‘미·중 간 경쟁구도 속에서 한국의 전략’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결국 정부가 외교 다변화 개념을 끌고와서 균형외교라고 강변한 것은 균형외교라는 표현에 질겁을 하는 국내 보수층과 미·중 시선을 의식해 본질을 살짝 피해 간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지금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복원을 위해 중국에 매우 빠르게 다가서고 있다. 정부는 사드 갈등을 풀기 위해 사드 추가 배치나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계 편입, 한·미·일 군사동맹 추진 등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3불(不) 원칙’을 공개했다.

미·일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에도 당장은 참여할 수 없다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 같은 원칙을 공개 천명하는 것은 훗날 발목을 잡히는 빌미가 될 수도 있다. 또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은 아직 개념이 확립되지도 않은 구상인 데다 한국에 필요한 요소와 부담스러운 요소가 혼재돼 있어 단번에 선을 그어버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 같은 부담을 떠안은 것은 그만큼 중국과의 관계복원을 서두르고 있다는 방증이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미·중 패권 경쟁 사이에서 딜레마를 안고 살아야 하는 한국 외교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중국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집권 2기를 시작하면서 2050년까지 경제·군사적으로 미국을 능가하는 사회주의 대국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미·중 충돌은 더 거칠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균형외교는 민감한 사안을 회피하고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다. 미·중이 충돌하는 사안에 대해 국익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하고 한국 입장을 세련된 방법으로 분명히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고도의 판단력과 확실한 명분, 절제된 외교력과 단호한 결기가 필요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 거듭된 북한의 도발과 미국의 대북 강경 자세로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외교안보 전략이 일시에 무너져버린 경험을 했다. 문 대통령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자조적 한탄을 수차례 내뱉을 정도였다. 좌절감에 빠져 미국의 주도에 이끌려가는 과거 정부의 대응 패턴을 답습하던 정부가 비로소 외교적 좌표를 재설정하고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아직은 정교함이 부족하고 장기적 전략도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 내놓은 친(親)중국 조치들은 문 대통령의 12월 중국 방문,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 개최 등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시간적으로 쫓기고 있는 정부가 중국을 달래기 위해 서둘러 내놓은 단기처방에 가깝다. 지난 6월 한·미 정상회담을 서두르면서 정부의 외교적 스탠스가 미국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던 모습이 연상된다. 미국을 상대할 때는 미국 쪽으로 기울고, 중국과 마주해서는 중국의 입장을 배려하는 ‘시계추 외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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