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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술수출’에서 ‘디자인 서울’까지…경제 위한 도구 전락

2017.12.06 21:40 입력 2017.12.07 09:45 수정
최범 디자인 평론가

국가주의의 그림자

1967년 9월1일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디자인센터를 방문해 남긴 휘호 ‘미술수출’.

1967년 9월1일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디자인센터를 방문해 남긴 휘호 ‘미술수출’.

1967년 9월1일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디자인센터를 방문해 휘호를 남긴다. ‘미술수출(美術輸出).’ 이것은 당시 국가 최고 지도자가 디자인계에 내린 명령이었다.

■ ‘미술수출’이라는 명령

‘미술수출’은 ‘미술을 수출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술은 회화나 조각 같은 순수미술이 아니고 ‘응용미술’, 즉 지금의 디자인을 가리키는 것이고, 수출의 의미도 디자인을 수출하라는 것이 아니라 수출을 위해 디자인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술수출’은 ‘수출을 위한 디자인을 하라’는 일종의 교시였다. ‘미술수출’, 나는 이 네 글자가 지난 50년간 한국 디자인의 유일 이념이었다고 생각한다. 유일 이념은 유일 체제를 낳게 마련인데, 그것은 바로 국가 주도 ‘디자인 진흥 체제’이다.

박 대통령은 매달 개최되던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수출품 포장이 부실하여 클레임이 제기된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1969년 기존의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를 수출디자인센터로 개칭하고, 그와 별도로 한국수출품포장센터를 설립하였다가, 1970년에는 다시 이 둘을 통합하여 한국디자인포장센터를 출범시켰다. 한국디자인포장센터는 1991년 한국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으로 개칭되었다가 2001년 현재의 한국디자인진흥원(KIDP)으로 되었다.

이 유구한(?) 기관의 명칭들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 디자인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수출품의 포장, 바로 그것에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골판지나 크라프트지 같은 포장지 생산이 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주요 사업이기도 했었는데, 구로공단 내에 생산 공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정부에서 설립한 디자인 진흥기관의 이름에서 ‘포장’이라는 글자를 떼는 것은 21세기에 들어와서이다.(2001년의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 진흥의 출발이 수출품 포장이었고, 진흥기관의 명칭에 오랫동안 포장이라는 용어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의 국가 차원 디자인 정책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 너무나 중요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국의 공공 부문이 디자인을 이해하는 기본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정신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러한 정신은 수출품 포장에서 새마을운동으로, 그리고 근래의 간판개선사업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미술수출’이었다.

■ 경제 개발과 ‘동원된 디자인’

사람들은 디자인처럼 말랑말랑하고 소프트한 분야는 국가 권력과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오늘날 디자인은 소비사회의 꽃으로서, 산업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고 자본주의 시장을 통해 교환되며 개인의 욕구와 취향을 충족시켜줌으로써 사적 영역을 구성하는 문화적 요소의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은 최종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적 영역이 결코 공공 영역과 무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공공 영역에 의해 창출되고 끊임없이 포위되어 있는, 그리하여 하버마스가 말한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일상적 경험인 사회에서 그것은 결코 순수하게 사적일 수 없는 것이다. 한국처럼 사적 영역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페미니즘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말할 때 디자인은 ‘정치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일상의 디자인 경험은 개인적이지만 그것의 생성과 작용은 결코 개인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한국 디자인은 경제 개발 중심의 근대화 과정에서 동원된 것이라는 점에서 사실 다른 분야와 다르지 않다. 사회학자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 시대를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하면서 “그것은 ‘근대화(개발, 산업화, 발전 혹은 성장)’라는 국민적·민족적 목표(혹은 그렇게 인식되는 목표)를 향해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이다. 근대화가 지체되어 그것이 국민적·민족적 달성 과제로 되어 있는 특성과 그것을 ‘전투적’으로 달성하고자 하고, 그것을 통해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강화하면서 체제를 유지하는 특성이 개발동원체제에는 일반적으로 존재한다. 동원은 바로 민족적·국민적 목표를 전투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위로부터의 전략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조희연, <동원된 근대화>, 후마니타스)

그러니까 박정희의 ‘미술수출’은 그러한 위로부터의 전략적 행위의 일환으로서 디자인을 동원하기 위한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산업 관료로부터 아래로는(?) 실무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온 것이 한국 디자인 역사의 커다란 장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절대 권력자인 박정희의 영향력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어마어마했지만, 디자인에서도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식당에서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밥공기가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그저 여러 에피소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아무튼 박정희는 한국의 윌리엄 모리스였고,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박정희는 ‘미술수출’ 이념의 고안자일 뿐 아니라 경부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디자인하는 등 직접 실행을 보이기도 했다. 서울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기념관을 가보면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를 지낸 박정희는 다소 전인적인 면모를 지닌 지도자였다. 그는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웬만큼 그리고 풍금도 잘 쳤던 것 같다. 그는 ‘새마을노래’와 ‘나의 조국’을 직접 작곡, 작사하기도 했다. 북한 최고의 미술평론가가 김일성(“우리의 미술을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미술로 발전시키자”)이고, 최고의 영화이론가가 김정일(1973년 <영화예술론> 집필)이라면, 박정희는 그 둘을 합쳐 놓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의 디자인은 수출 위주의 경제성장 도구였으며, 디자인 진흥 정책은 ‘관학복합체’의 성격을 지닌다.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 제도 자체가 국가에 의해 창출된 영역이며, 대학을 지배하는 교수 집단의 형성 자체가 국가가 권위를 부여한 공모전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상공미전을 돌아보고 있는 박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의 디자인은 수출 위주의 경제성장 도구였으며, 디자인 진흥 정책은 ‘관학복합체’의 성격을 지닌다.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 제도 자체가 국가에 의해 창출된 영역이며, 대학을 지배하는 교수 집단의 형성 자체가 국가가 권위를 부여한 공모전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상공미전을 돌아보고 있는 박 대통령.

사실 ‘미술수출’을 하나의 디자인 이념으로 볼 수는 없다. 거기에는 디자인 고유의 철학이나 가치가 표현되어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디자인을 수출 위주의 경제 성장 도구로 호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디자인관 이외의 디자인관이 이 땅에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디자인 혁명’이니 ‘디자인 강국’이니 하는 말들도 결국은 디자인의 경제적 가치를 절대시한다는 점에서 그 세련된 표현에도 불구하고 ‘미술수출’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박정희가 그런 교시를 내린 것 못지않게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는 데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박정희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그와 다른 디자인 이념을 제시한 디자인 전문가는 없었다. 국가 차원에서 볼 때 한국의 디자인이란 그러한 일극체제에 통합된 기능적인 하위영역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 디자인의 관료주의화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디자인 진흥정책이 결과한 것은 디자인의 관료주의화였다. 디자인의 관료주의화라는 말은 얼핏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역시 디자인과 같이 부드럽고 크리에이티브한 분야가 어떻게 관료주의화될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디자인처럼 부드럽고 크리에이티브한 분야조차 관료주의화되었다는 것이 사실은 진짜 문제이다.

앞서 나는 박정희의 ‘미술수출’을 한국 디자인의 유일 이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유일 이념을 구현한 유일 체제로서 ‘디자인 진흥 체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러한 유일 이념과 유일 체제가 결과하는 것은 디자인의 관료주의화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관료주의는 좁은 의미의, 형식적인 차원에서의, 즉 공공 부문에 한정된 것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디자인 관료주의는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정책 영역만이 아니라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영역(아니 차라리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 제도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니까 나는 한국의 디자인 제도 전반(정책, 교육)의 성격을 한마디로 관료주의적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한 사회의 디자인은 제도화된 영역 이외의 생활세계 영역이 존재하고 이것은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한국 디자인의 관료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까 사회가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를 만들어온 사회에서는, 디자인 사회가 국가의 디자인 정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가의 디자인 정책이 디자인 사회를 창출해온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 영역의 디자인 사회 자체가 국가의 디자인 정책에 의해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수출’이라는 이름의 국가 디자인 정책.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제1회 상공미전 개막식.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제1회 상공미전 개막식.

그래서 한국의 디자인 진흥 정책은 ‘관학복합체’의 성격을 지닌다. 앞서 말했듯이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 제도 자체가 국가에 의해 창출된 영역이며, 대학을 지배하는 교수 집단의 형성 자체가 국가가 권위를 부여한 공모전(멀리는 조선미술전람회,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1960년대부터는 상공미전-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 디자인 제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인 대학의 교수가 되는 과정 자체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디자인 사회의 경쟁과 선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일방적으로 권위를 부여한 제도적 장치(공모전)에서의 등용과 해외 유학을 통한 것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구성된 디자인 대학 교수집단은 산업 관료집단과 파트너가 되어 디자인 진흥 체제를 구동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관학복합체’의 성격을 띤 디자인 진흥 체제야말로 ‘미술수출’로 상징되는 유일 디자인 이념의 실제적인 구현체였던 것이다.

제1회 상공미전 포스터.

제1회 상공미전 포스터.

“정책이란 국가가 하기로 혹은 하지 않기로 결정한 모든 것”(토머스. R. 다이)이라는 정의에 비추어 보면, 결국 한국 디자인과 관련하여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1960년대 이후 한국 국가가 디자인과 관련하여 무엇을 하기로 혹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는가 하는 것이 되겠다. 이것은 한국의 권위주의 국가가 현대디자인에 끼친 영향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이라는 형태를 통해 표출되는 국가의 디자인 행위는 그 반대편, 즉 대중의 생활세계 디자인과 비교해볼 때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국가 주도의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디자인 정책은 그 반대편인 생활세계에 대한 방기와 무책임, 나아가 혐오와 짝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디자인 진흥 체제는 대중의 생활세계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보다 국가 주최의 공모전에 출품하여 상을 받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환경을 가진 사회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디자이너들은 모두 거기에 순응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활세계 디자인이 왜 이렇게 황폐한지에 대한 대답도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다.

권위주의 국가는 자원을 독점하고 선별적으로 분배하며, 국가 정책에 동조하는 집단에 보상을 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 결과 국가에 충성하는 디자이너는 점점 많아지는 반면 생활세계를 아름답게 하는 데 관심을 갖는 디자이너는 갈수록 줄어든다. 국가주의 디자인이 빚은 결과는 이런 것이다. 1960년대의 ‘미술수출’에 의해 착근된 디자인 의식은 지방자치시대에 들어와서도 변하지 않고 최근의 ‘디자인 서울’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래서 한국 디자인에 드리운 국가주의의 그림자는 여전히 길게 꼬리를 드리우고 있다. 아니, 아직 그것을 꼬리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필자 최범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디자인 평론가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출판·전시·공공 부문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 국내 유일의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 편집인이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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