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날 좀 보소” 아우성…새마을운동식 획일적 정비는 ‘퇴행’

2017.12.20 20:29 입력 2017.12.20 20:35 수정
최범 디자인 평론가

‘간판 공화국’ 과거와 현재

각양각색의 간판으로 도배된 어느 상가의 모습. 행인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앞다퉈 손짓하지만 정작 거대한 간판 숲에 가려 개개의 상호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간판문화연구소 제공

각양각색의 간판으로 도배된 어느 상가의 모습. 행인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앞다퉈 손짓하지만 정작 거대한 간판 숲에 가려 개개의 상호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간판문화연구소 제공

■ 이웃나라, 먼 나라

올해 봄 대만을 방문한 나는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거리에 현수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배, 유교 전통, 오랜 권위주의 통치, 급격한 경제발전,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밀도…. 모든 점에서 우리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만은 우리와 달랐다. 쑨원과 장제스의 동상도 그들의 기념관을 제외하곤 눈에 띄지 않았으며, ‘대륙 탈환’이나 ‘본토 수복’ 이런 구호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대만에는 내가 기대했던(?) 그런 종류의 권위주의적인 구호가 없었다. 다만 ‘충효(忠孝)’라는 이름이 들어간 타이베이 전철(MRT)의 몇몇 역명들에서 유교 국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타이베이의 경찰서에는 경찰서 간판 이외에 어떠한 구호도 없었다. 그걸 보니 ‘경찰이 다시 새로워지겠습니다’라는 구호가 정면에 큼지막이 붙어 있는 우리나라의 경찰서가 생각났다. 과연 다시 새로워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냥 새로워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경찰서 앞을 지나칠 때면 언제나 그것이 알고 싶었다. 아무리 우리가 중국과의 실리 때문에 대만을 배신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왕년의 반공 형제 국가이자 1987년까지 계엄령이 실시된 대만이 우리에게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을 배신이라고밖에 달리 뭐라고 표현할 것인가.

크기에서만 조금 차이가 날 뿐 지구상에 과연 이처럼 한국과 비슷한 나라가 또 있을까 하는 평소의 생각을 확인이라도 할 요량으로 대만을 찾은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어졌다. 대만은 먼 나라였다. 우리와 가깝지만 비슷하지 않은 다른 나라였다. 일본이 그러하듯이. 이제 우리나라 관공서에 내걸린 권위주의적인 구호들과 거리에 덕지덕지 나붙은 현수막들과 건물을 뒤덮은 간판들을 식민지 경험과 전쟁과 개발독재와 도시 과밀화 때문이라고 핑계 대기는 어려워졌다. 대만 때문에.

■ 간판이라는 문제

사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 많은 문제 중에서 일부만이 논제(이슈)가 되고, 그중에서 또 일부만이 의제(어젠다)가 된다. 그러니까 사회에는 언제나 수많은 문제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고른 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의미 있는 것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회적 문제들 중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 몇몇만이 논의의 대상(논제)이 되고, 논의의 대상이 된 것들 중에서 또 일부만이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과제(의제)로 채택된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이 사회적 문제로부터 논제가 되고 나아가 의제로 선택되는 과정을 밟았다면, 일단 그 과정과 결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의 간판 문제를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시각적 차원이든 공동체 문화의 차원이든, 간판 공해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 중 하나이지만 그것이 사회적 논제와 의제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서둘러 지적하자면, 그 결과는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 물론 한국 사회의 간판이 안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꽤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것은 주로 지식인이나 문화인들의 몫이었다.

“…국회의원 선거 때 거리에서 흔들거리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나는 대체 국회의원을 뽑는데 그렇게 플래카드를 거는 데가 또 있을까 회의스러웠었다.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뭔가를 내거는 걸 좋아하는 백성이 또 있을까?”(연극인 박정자, ‘국민일보’ 1996년 5월24일)

“나는 문화 창조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입장이다. 원칙적으로 자율적인 통제를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의 간판 문화만은 예외다. 이것은 견디기 힘든 시각적 폭력이고 이런 폭력은 공권력으로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문화관광부 소관인지, 건설교통부 소관인지, 지방자치단체 소관인지 나는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부는 이런 무질서와 폭력을 다스릴 의무와 힘이 있다는 것이다.”(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한겨레’ 2000년 9월16일)

“어느 날 저녁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신도시의 중심 상업지역에 왔다. 전철에서 내려 육교 계단에 선 그는 아예 넋을 잃고 원색의 숨 가쁘게 점멸하는 간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를 낼 정신도 없는 듯했다. 한참 그 엄청난 간판의 숲 앞에 서 있던 그는 그 간판들을 미술로 써먹을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누가 혹시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문외한인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대신 이런 말을 했다. 누군들 좋아서 천박하게 번쩍거리고 싶겠는가….”(소설가 성석제, ‘중앙일보’ 2005년 7월21일)

한국의 간판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지식인들만은 아닐 것이다. 도시를 어지러이 뒤덮고 있는 간판과 온갖 현란한 구호가 난무하는 현수막들을 보면 누구나 눈살을 찌푸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현대 도시의 부산물, 심지어 먹고살려다보니 생겨난 어쩔 수 없는 문제 정도로 치부하지 이것을 심각한 사회문제, 심지어 문화적인 문제로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 몇몇 지식인과 문화인들은 이를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으로 보고 여러 각도와 차원에서 분석과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강준만 교수 같은 이는 한국 사회의 간판 현상을 일종의 인정 투쟁으로 본다. 간판이라는 말이 말 그대로 건물에 붙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대학 간판’처럼 사회적 자본의 기표로 사용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강준만 교수는 간판 정비 사업 따위로는 결코 한국의 간판 문화를 바꿀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심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정 투쟁의 결과이든 도시 과밀화, 나아가서는 다른 사회에 비해 비대한 자영업의 비율 때문이든 간에,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 크고, 더 많고, 더 튀는 간판 달기 경쟁은 분명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한국적 풍경 중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의 도시화율은 90%를 상회한다. 도시의 이미지를 가장 많이 결정하는 것은 건물이다. 하지만 한국 도시에서는 건물보다 간판이다. 왜냐하면 간판이 건물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 도시의 건물은 간판을 붙이기 위한 지지구조 내지는 부착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지난 수십년간의 도시화 과정에서 간판은 바이러스처럼 급속히 퍼져갔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행정적 규율은 거의 전무했다. 이제 한국의 간판은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백약이 무효한 상태가 됐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공공적 개입이 적절한 시기를 놓칠 때 얼마나 커다란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되는지를 한국의 간판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가운데 뒤늦게나마 간판 문제에 주목하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2000년대 들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 간판, 문제에서 의제로

2000년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간판을 보다’ 전시 장면. 한국 사회에서 간판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디자인미술관 제공

2000년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간판을 보다’ 전시 장면. 한국 사회에서 간판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디자인미술관 제공

2000년 예술의전당 내 디자인미술관에서 ‘간판을 보다’라는 전시가 열렸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전시라는 문화적인 형식을 통해 간판 문제를 다룬 최초의 행위였다. 말하자면 이 전시는 간판을 사회적 논제(이슈)로 삼았던 것이다.

“일찍이 망명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이 세상에 악(惡)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도 그것이 너무나 가깝고 평범한 것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전율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이곳의 간판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추한 현상들이 너무나도 가깝고 평범한 그 무엇으로 우리들 곁에 편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이 무슨 엄청난 음모의 산물도 아니고 통탄할 부정의 소산도 아닌, 그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욕망의 집합적인 실천이 만들어낸 것일 때 우리들은 절망하게 된다.”

이 전시 도록의 서문은, 이제는 여기저기에서 너무 많이 써먹어서 진부해진 느낌마저 드는 한나 아렌트의 말까지 인용하며 비장하게 시작한다. 한국의 간판을 ‘평범한 악’으로까지 비유하며, 한국의 간판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말을 건다. 반응은 매우 좋았다. 무엇보다도 관련 공무원들이 찾아와서 왜 이런 전시가 이제야 열렸는가 하며 반가워하기도 했다. 이후 간판 문제는 나름 사회적 논제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반드시 이 전시로 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전시가 한국 사회에서 간판 문제를 정면으로 이슈화한 것은 분명했다(필자도 이 전시의 기획자들 중 한 명이었다).

관 주도의 획일적인 간판개선사업이 만들어낸 경남 통영의 횟집 거리 모습. 간판문화연구소 제공

관 주도의 획일적인 간판개선사업이 만들어낸 경남 통영의 횟집 거리 모습. 간판문화연구소 제공

2007년에는 희망제작소 내에 간판문화연구소가 문을 열었다(필자가 소장을 맡았다). 희망제작소는 지금 서울시장인 박원순씨가 설립한 민간 싱크탱크로, 산하에 여러 특화된 연구소를 두고 있었는데 간판문화연구소도 그중 하나였다. 간판문화연구소는 간판을 단순한 광고나 시각물을 넘어서 도시와 공동체 문화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문화운동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2008년 ‘대한민국 좋은 간판상’ 대상을 수상한 서울 삼청동 액세서리점 ‘은나무’. 행정안전부 제공

2008년 ‘대한민국 좋은 간판상’ 대상을 수상한 서울 삼청동 액세서리점 ‘은나무’. 행정안전부 제공

출범하자마자 간판문화연구소는 정책 연구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당시 행정자치부와 함께 ‘대한민국 좋은 간판상’을 만들어 운영하고 SBS와 협력하여 캠페인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민단체에 핍박이 가해지고 그 결과 희망제작소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간판문화연구소도 문을 닫게 되었다. 간판문화연구소의 실질적인 활동 기간은 2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비록 활동 기간이 짧았지만 간판문화연구소는 간판 문제를 어느 정도 사회적 의제화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간판문화연구소의 퇴장으로 인해 간판문화운동의 동력은 상실되어버렸다.

■ 또 하나의 문제가 된 간판개선사업

2000년대 들어와 사회적 이슈를 넘어서 사회적 의제로 채택된 우리 사회의 간판 문제에 대한 정부의 해법은 간판개선사업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에 국제적인 행사를 앞둔 일시적인 불법광고물 정비로 시작되었다가, 이윽고 간판개선사업이라는 전대미문의 형태로 확대되어 나갔다. 그것의 실제는 관 주도의 획일적인 간판 교체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간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이는 잘해야 겉으로 페인트칠을 해서 보기 싫은 것을 감추는 표피적 접근을 넘어서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새마을운동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간판개선사업은 현재 우리 사회가 간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적·행정적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함을 증명해주었다. 그것은 간판 문제의 해결책이기는커녕 또 하나의 간판 문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간판문화운동을 주장해 온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 사회가 아직 간판 문제를 해결할 사회적·문화적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씁쓸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러한 문제를 의제화하는 것 못지않게 그것을 해결할 역량을 함께 갖춰 가는 것이어야 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간판 문제는 다시 미래의 과제로 남겨지게 되었다고밖에 지금 현재로는 말할 수 없다.

▶필자 최범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디자인 평론가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출판·전시·공공 부문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 국내 유일의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 편집인이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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