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의 급변사태 논의가 갖는 함의

2017.12.27 21:10 입력 2017.12.27 21:19 수정

[유신모의 외교포커스]미·중의 급변사태 논의가 갖는 함의

“이제 미국과 중국은 북한 체제 붕괴에 대해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할 때가 됐다. 그런 대화가 이뤄지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중국이 이 같은 현실이 도래했음을 인정해야 하고, 미·중이 이런 논의를 한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가 몰라야 한다.”

미 행정부 고위 관리를 지낸 아시아 전문가가 2013년 초 사석에서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했던 말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갑작스러운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3대 권력세습이 이뤄져 정권의 불안정성이 고조되고 있었고 한국은 강경 보수 성향의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열렸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 피벗(회귀)’을 내세우며 집권 2기를 시작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북한 체제가 정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미국과 ‘북한 붕괴’를 상정한 논의를 회피했다. 미국도 동맹국이자 북한 문제 당사국인 한국이 미·중 간의 이 같은 논의를 지켜보기만 하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했다.

4년 반이 지난 현재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2일 애틀랜틱카운슬 주최 토론회에서 중국 고위 관계자들과 북한의 급변 사태를 논의하고 있다고 매우 직설적이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중국과 (북한의) 핵무기 확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했다. 그는 또 중국이 이미 준비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공개하고 “(미·중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미군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에 진입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휴전선 이남으로 복귀할 것을 중국에 약속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공개석상에서 이처럼 민감한 발언을 거리낌 없이 했다는 것은 중요한 함의가 있다. 중국도 이제는 과거와 달리 급변사태 논의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으며 미국 역시 동맹국을 배려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북핵 문제를 급박한 안보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북핵 문제는 이미 한·미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지점에 도달했으며, 북한과 중국 역시 더 이상 북핵 문제에 대한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급변 사태 가능성은 1990년대부터 북한 정권이 취약성을 보일 때마다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 기반이 공고해지고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할 정도로 북한 정권이 안정돼 있는 지금 미·중이 함께 북한의 급변 사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단순히 대비하기 위한 차원을 넘어 인위적으로 그와 같은 사태를 만들어 갈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인식을 미·중이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핵으로 무장한 북한 정권의 붕괴는 한국에는 혼돈 그 자체다. 더구나 지금 상태라면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급변 사태가 발생하면 미·중의 최대 관심사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중은 군사작전을 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사전에 자세한 행동규범을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 한국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 따라 핵무기 관련 문제에 관여할 수 없으며 전시작전통제권도 없다. 난민·국경·식량 등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도 한꺼번에 떠안아야 한다.

그동안 북한의 급변사태와 정권 붕괴는 곧 ‘한반도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 문제가 미·중의 이해관계에 따라 처리된다면 상황은 다르다. 틸러슨 장관 말대로 북한 핵무기가 확보된 이후 주한미군이 휴전선 이남으로 복귀하고 북한에 친중정권이 수립되면 중국은 여전히 북한이라는 ‘버퍼(완충지대)’를 유지할 수 있고 미국은 더 이상 안보를 위협받지 않아도 된다. 미·중은 실리를 얻고 타협할 수 있지만 한국은 북한 급변사태라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평화가 얻어진다 해도 그것은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가 아니라 ‘분단 영구화를 위한 평화’가 될 수밖에 없다.

틸러슨 장관 발언이 전략적으로 계산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미래에 커다란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이로 인해 직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북핵 문제는 기존의 판을 모두 걷어치우고 새로 깔아야 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패턴화된 대응, 진영논리에 기초한 접근법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며 북핵문제가 여기에 이른 것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지는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 완전히 새로운 국가전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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