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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민과 동떨어진 공공디자인은…이렇게 조용히 잊혀진다

2018.01.03 21:48
최범 디자인 평론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 때 만든 ‘해치’ 캐릭터. 예산만 낭비한 채 잊혀진 디자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 때 만든 ‘해치’ 캐릭터. 예산만 낭비한 채 잊혀진 디자인.

■ 새공공디자인, 헌공공디자인

“공공디자인은 수명을 다했다. 애초의 문제의식은 간데없고, 공허한 스타일과 구호만이 공공디자인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해 11월10일부터 30일까지 ‘문화역 서울 284’(구서울역사)에서 <안녕, 낯선 사람>이라는 낯선(?) 제목의 전시가 열렸다. 위의 인용문은 전시의 들머리에 내걸린 ‘새공공디자인 매니페스토’ 10개 항목 중 첫 번째이다. ‘새공공디자인’이라는 수식어를 단 이 전시는 한국 사회의 공공디자인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마련된 것이었다. 주제인 <안녕, 낯선 사람>은 뭔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타자(他者)를 호명하는 것 같았다. 이 행사에는 전시와 함께 국제 심포지엄도 진행되었다. 심포지엄에서는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일본의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가 강연하기도 했다.

아무튼 낯선 주제의 이 전시가 호명하는 타자는 누구인가. ‘새공공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새공공디자인’이 있다면 ‘헌공공디자인’도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튼 심상치 않은 제목과 매니페스토 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 전시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공공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일들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반성을 깊이 깔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필자는 이 전시의 추진위원장이었다)

■ 상상으로서의 공공디자인

2001년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그 전해인 2000년에 열린 <간판을 보다>전에 이어서 한국 사회의 시각문화에 대해 비판적 접근을 한 전시였다. 그런데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이라니? 그럼 디자인의 공공성은 아직 현실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과연 디자인의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전시 기획자 중 한 사람인 권혁수는 이렇게 말한다. “전시의 부제 중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에 디자인이 시작된 계기가 사회적 상상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담고 싶었습니다. 공공 영역의 디자인 문제를 대상으로 삼았을 때 개인이나 자본의 영역에서보다는 훨씬 폭넓게 디자인의 본질과 현상, 즉 공공성이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디자인 자체가 이미 공공성을 담지하고 있으니까 말이죠.”(전시 도록)

과연 디자인 자체에 공공성이 담지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전시 역시 강력한 매니페스토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디자인은 그 자체로 공공적인 것이다, 개인이나 자본의 영역보다 공공 영역의 디자인이 훨씬 더 디자인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개인이나 자본의 영역에 갇혀서?), 그래서 디자인의 공공성은 아직은 현실보다는 상상이다, 이런 이야기이다.

아무튼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이 전시는 대통령 선거 포스터에서 주민등록증 같은 각종 증명서와 교과서, 도시의 공간들(거리상점, 화장실, 정류장), 나아가 사이버상의 정보 디자인 등에 대해서 보다 민주적이고 세련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보이는 디자인들을 제시하고 있다. 전시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한 사람만 해도 거의 100명에 이르렀던 이 전시는 디자인미술관 개관(1999년) 이후 최고의 대형 전시로서 제목 그대로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을 한껏 펼쳤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전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 공공디자인 담론의 출발점으로 꼽힐 정도로 기념비적인 이벤트였음이 분명하다.

■ 공공디자인의 현실

지자체의 각종 꼴불견 조형물과 수준 이하의 시설물 디자인들. 김종균 제공

지자체의 각종 꼴불견 조형물과 수준 이하의 시설물 디자인들. 김종균 제공

그러면 과연 <de-sign korea>전 이전에는 공공디자인이 없었던가. 아니 그렇지는 않다. 공공디자인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있었다. 공공디자인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공공 주체, 즉 중앙정부·지방정부·공공기관이 만드는 디자인이 공공디자인이다. 그러니까 디자인을, 그것이 제작·공급·사용·전유되는 영역에 따라서 구분하면 크게 ‘사적 디자인(Private Design)’과 ‘공공디자인(Public Design)’으로 나눌 수 있다.

사적 디자인은 말 그대로 현대사회에서 주로 자본에 의해 생산되고 시장을 통해 상품의 형태로 전달되며 개인의 소비생활을 위해서 사용되는 사적 영역의 디자인을 가리킨다. 우리가 입는 옷과 사는 집, 각종 생활용품의 디자인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그에 반해 공공 주체, 즉 국가·지자체·각종 공공기관이 제작·공급하고 시민 누구나 사용하는 공공 영역의 디자인이 공공디자인이다. 관공서 건물, 거리의 공공시설물, 공공 교통시설, 각종 증명서, 국가 상징물 등이 모두 공공디자인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공공디자인이란 공공 주체가 존재하는 한, 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 형태나 수준과 상관없이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소비생활을 매개하는 사적 디자인이 크게 발달할 수밖에 없고, 공공디자인은 상대적으로 경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적 디자인과 공공디자인의 불균형적인 발전은 한국과 같은 후발 자본주의 사회의 경우 매우 심각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소수의 대기업이 디자인 자원(전문가집단)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반면에,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공공 부문은 생활세계에 대한 개발주의적 인식과 새마을운동 수준의 미적 의식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사회를 보면 사적 디자인과 공공디자인의 수준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그것은 물론 공공 주체의 책임감과 함께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과 문화적 감수성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사유재산권 같은 자유주의적 원리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원리처럼 절대시되는 반면, 공공적이라는 말은 거의 공산주의와 동일시될 정도로 폄하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적 디자인과 공공디자인의 불균형은 아찔한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de-sign korea>전의 기획자들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현실을 상상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의 상상은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다. 디자인의 공공성을 현실에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상을 가능하게 했던 현실(의 조건)은 또 무엇이었는가를 물어보는 것은 한국 사회와 디자인의 관계에 대해 매우 징후적인 독해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2000년대에 들어와서, 비록 상상의 차원에서나마 한국 디자인의 공공성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물음을 거꾸로 뒤집으면, 왜 그 이전에는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실질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불가능했는가 하는 설명이 될 수도 있다.

2000년대 들어와 이러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 사회적 조건이 한국 사회의 민주화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민주화로 인해 군부독재가 종결되고 시민사회가 열렸다. 1980년대의 변혁운동을 대신하여 1990년대의 시민운동이 태동되었다. 사회주의 담론은 퇴조하고 신사회운동 담론이 각광을 받았다. 이러한 조건들이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고, 디자인에서도 공공성에 대한 상상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과 가능태들은 이후 제대로 현실태가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소 복합적이다.

■ 지방자치시대, 공공디자인의 허와 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었다. 그러자 지자체들은 너나없이 지역 정체성 찾기에 몰두했으며, 지역 정체성을 표현하는 가장 손쉬운 도구로 CI와 캐릭터를 앞다투어 도입하였다. 그 결과 차별화를 위해 도입된 CI가 전국적으로 획일화되고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조형물들이 범람했다. 디자인업계에는 대박이었다. 그동안 주로 사적 영역의 디자인을 담당하던 주체들이 갑자기 공공디자인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 디자인계와 기업을 상대로 하는 디자인업계는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전문성을 갖출 기회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공공디자인은 IMF 이후 디자인 가격 하락에 허덕이던 디자인업계에 새로운 블루오션을 제공했다.

제도 디자인계와 디자인업계는 너나없이 이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었으며, 지방자치제 실시로 인해 갑자기 늘어난 수요에 부응하여 재빠르게 조직되었다. 2006년에는 국회의 대한민국 공공디자인포럼(공동대표 박찬숙, 권영걸)이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사업을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으로 선정하였다. 공공디자인과 정치의 결합이 본격화되었다. 한국의 공공디자인은 한편으로는 상업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화되어갔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시절의 ‘디자인 서울’ 정책은 그 정점이었다. 지금은 잊혀진 ‘해치 캐릭터’가 증명하듯이, 지자체 단체장이 하루아침에 자기 마음대로 도시의 상징물을 결정해버리는 현실에서 디자인의 공공성이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침내 공공디자인에 대한 비판과 혐오가 퍼져나갔다. 수요가 사그라들자 업자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서 발길을 돌렸고, 공공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수그러들었다.

■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

2016년에는 ‘공공디자인 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또한 2000년대 이후 공공디자인에 대한 관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제 한국의 공공디자인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단계로 접어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 권위적인 국가주의와 지방자치 시대의 신개발주의에 봉사해온 공공디자인이 아닌, ‘새공공디자인’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존의 공공디자인(헌공공디자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함께 새로운 공공디자인에 대한 상상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2001년 <de-sign korea>전이 기도한 공공디자인에 대한 상상의 2.0 버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한국의 공공디자인에 제대로 된 공공성이 없었다면,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한국 사회 자체에 공공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공공 주체인 국가와 정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공성은 그러한 주체 형식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진정한 공공성은 공공 영역을 담지할 시민사회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국가는 공화국이며 공화국의 핵심은 공공성이다. 그러나 그 공공성은 시민 없이 성립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공공디자인은 공화국의 시각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화국을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공공디자인인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국가적 차원이든 지자체 차원이든 간에 개발주의의 탈을 쓴 기존의 공공디자인(Public Design)을 시민적 관점에서 재공공(Re-public)화함으로써 공화국의 디자인(Republic Design)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공공디자인에 대한 한때의 들끓던 관심이 사라진 듯이 보이는 지금 이때,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필자 최범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디자인 평론가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출판·전시·공공 부문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 국내 유일의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 편집인이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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