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시인 “타인의 슬픔을 쓰다가 내 슬픔 섞여, 울기도 엄청 많이 울어”

2018.01.12 17:22 입력 2018.01.12 19:51 수정

지난 5일 서울 정동에서 만난 박준 시인은 현직 출판사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는 동시대 시인의 시를 먼저 읽는 일이 “노동이자 축복”이라고 말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지난 5일 서울 정동에서 만난 박준 시인은 현직 출판사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는 동시대 시인의 시를 먼저 읽는 일이 “노동이자 축복”이라고 말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시 쓰고 산문도 쓰고 울기도 엄청 많이 웁니다.” 박준 시인(35)이 자신의 트위터에 적은 소개글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지난해 나와 11만부가 팔린 박준의 첫 에세이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10만부가 팔린 박준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에 수록된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의 일부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젊은 시인군에 속하는 박준은 왜 그리 많이 우는가. 평일 오후 직장에 ‘2시간 반차’를 쓰고 나온 박준을 만나보았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가 제 초점이었어요. 개인에게 생긴 슬픈 일을 슬퍼하는 건 당연하죠. 관건은 타인에게 일어난 슬픈 일을 얼마나 잘 감지하느냐는 것이죠. ‘슬픔의 연대’라고 하면 좀 거창한가요. 2008년 여름, 시인 될 궁리만 하던 때였습니다. 20살 때부터 신춘문예에 줄창 냈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당선된다는 보장도 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광우병 촛불집회가 열렸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 되는 법은 학교나 강좌에서 배우는데, 시민 되는 법은 어디서 알려주나.’ 저희가 정치의식 있는 세대는 아니지만, 그때부터 집회에 자주 나갔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서 있기만 했어요. 용산참사 때도 그냥 걸어서 주변에 서 있다가 돌아오고…. 그때부터 ‘타인의 슬픔’에 대해 적어볼까 생각했습니다.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니, 깊은 속으로 들어가진 못하겠죠. 단지 그 슬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거기에 개인의 슬픔이 섞이니, 결국 슬픔의 절대량이 늘어났습니다.”

- 당신의 시를 읽으면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지난 일을 후회하는 일이 잦습니다. 게다가 이런 감정들은 대체로 연애에 얽혀 일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사회 속에서는 밝은 마스크를 쓰고 잘 살아가지만, 기본적으로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만나서도 할 말을 잘 못해요. 그게 제 첫번째 후회입니다. 후회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복기’입니다. ‘그때 괜히 그래서…’ 하는 거죠. 하물며 연애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에 대해서 후회할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단, 제 시에 ‘당신’ ‘미인’ 같은 호명이 많이 나오는데, 그게 모두 연애 상대는 아닙니다. 연인이기도 하고, 강이기도 하고, 정치인일 때도 있고, 젊은 나이에 죽은 누나이기도 합니다. 내 옆에 없으니까 후회되는 일이 많죠. 그런 감정들이 연시의 톤으로 나오는 것 같아요. 사랑시는 사랑을 시작해 두근두근하거나, 막 끝났을 때는 못 써요. 마치 컴퓨터 폴더 안에 있는 몇 년 전 여름 사진을 꺼내보듯이 써야죠.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는 모종의 슬픔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박준이 스스로 좋아한다고 밝힌 자신의 시 ‘환절기’ 일부다. 팔꿈치까지 과즙을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연인에 대한 사랑, 지금은 옆에 없는 그에 대한 그리움이 교차한다.

- 데뷔 시집이 10만부 팔렸다니 예삿일이 아니네요.

“젊은 시인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가 새로움, 전위성이죠. 젊은 예술가에겐 이전에 없는 세계를 열어나가기를 기대하죠. 저는 그런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전 습작할 때부터 새로움보다는 보편성에 기반을 둬 쓰자고 생각했어요. 또래 시인에 비교하면 도저히 새로운 시를 못 쓰겠더라고요. 아마 제 시의 보편성이 판매라는 성과와 연관돼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 독자와의 만남 행사에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20~30대 여성이 제 책의 주독자입니다. 제 책뿐 아니라 대부분의 문화 행사, 강연을 가면 이분들이 주를 차지하시죠. 돈과 마음과 시간을 문화에 쓰시는 20~30대 여성에 대한 감사함이 있습니다. 한편, 지역에 가면 저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도서관, 문화기관 행사에 오시는 분이 계세요. 그분들을 보면 ‘서사를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도 서사지만, 시에도 서사 요소가 있거든요. 타인의 이야기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언젠가 광화문 대형서점의 도서검색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 계신 백발 노인이 주머니에서 꾸깃한 종이를 꺼내시더니 거기 적힌 책 제목을 찾으시더라고요. 그게 제 시집이었습니다. 검색해서 위치가 적힌 표를 뽑아가시는 걸 보고 ‘허투루 쓰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는 혼자 쓰지만, 어찌됐든 출판의 형태로 세상에 나오니까요.”

- 내밀한 개인사나 감정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두렵진 않습니까.

“시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화자를 내세웁니다. 소월은 주로 여성 화자를 내세우지 않았습니까. 필요하면 외계인의 시점에서도 시를 쓸 수가 있죠. 제 경험이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진실에 가까운 것을 가상의 화자를 내세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숨을 수 있습니다. 반면 산문은 그렇지 않아요. 독자들은 에세이가 허구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산문집을 내니 민낯으로 세상에 나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의뭉스러워서 타인에게 제 모든 걸 얘기하진 않습니다. 필터를 거쳐 공개할 수 있는 것만 공개합니다. 핏빛 가득한 강렬한 것들은 아직 다 쓰지 않았습니다.”

- 왜 시인이 되고 싶었나요.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웃기게도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타의로 일기를 매일 썼어요. 중·고등학교 학칙이었어요.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일기에 솔직히 못 쓰잖아요. 제출용 일기는 학생이라면 살아야 할 삶을 적은 허구의 창작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혼자 보는 일기를 하나 더 썼어요. 왜 나는 공부를 못할까, 키는 왜 작을까, 원하는 대학은 갈 수 있을까, 누구누구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들을 적었어요. 갖고 있는 생각들을 솔직하게 쓰니 후련하더라고요. 시 쓰는 일은 미학적인 행위지만, 제가 시를 쓰는 첫번째 이유는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쓴다’는 겁니다. 그 쾌감을 자연스럽게 알았어요.”

- 소설은 안 쓰나요.

“사람마다 자기 심정을 이야기하는 화법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말의 길이가 달라요. 누군가는 여행을 다녀와도 짧게 얘기하지만, 누군가는 실제 여행시간만큼 길게 얘기해요. 저는 짧은 글의 호흡에 맞아요. 산문만 해도 6장만 넘어가면 힘들어요. 반면 평론가를 괴롭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짧게 써달라’는 요청이라는 말도 있죠.”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 실린 에세이들도 대체로 1~2쪽에 한 편이 담겨 있다. 어떤 글은 산문이지만 시처럼 쉽게 행이 갈리기도 한다.

- 등단 과정은 어떠했나요.

“제가 신춘문예를 무지 불신했습니다(웃음). ‘남한에선 내가 제일 잘 써’라고 생각했는데, 매년 1월1일이면 지면에 제 이름이 없는 거예요. 남의 당선작을 보는 기분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쓴다는 생각이 없었으면 그 오랜 시간 동안 시를 쓸 동력이 없었을 거예요. 시란 것이 토익 점수 올리듯이 노력해서 잘 쓸 수 없는 거잖아요. 오늘과 내일의 편차가 있고, 그 편차를 객관적으로 알려줄 지표도 없어요.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자기확신이 없으면 그 불확실함을 견딜 수 없어요. 어떻게 보면 자만심, 어떻게 보면 자아존중이죠. 물론 그걸로 그치면 안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행동, 창작물을 객관적으로 뜯어보는 자기비평도 해야 합니다. 그때 습작을 1000편 넘게 썼어요. 신춘문예는 중복투고가 안되는데, 전 모든 신문사에 다 다른 시를 냈어요. 그때 보낸 등기우편 영수증이 수백장 있어요. 최종심에조차 오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취재해서 시를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역마다 있는 교통사고 전문병원, 탄광촌, 고시원에 가보고 시를 썼어요. 그런 방식으로 쓴 시를 모아 냈는데 2008년 실천문학에서 등단했습니다.”

- 출판사 창비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시를 쓰기가 어렵진 않나요.

“만일 시만 써서 생계가 해결된다면 직장을 다니지 않을까 생각해봤어요. 저는 그래도 다닙니다. 만원버스 타고 벌서듯이 출근하며 일상의 감각을 가져야죠. 굉장한 혜안이 있어서 일상과 거리를 두고도 좋은 시를 쓰는 시인도 계시지만, 제겐 그런 능력이 없어요. 책을 읽는 독자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그분들에게 유효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제가 관계의 균열에 대해 자주 시를 쓰는데, 일상에서 관계를 가져야 균열도 있겠죠.”

- 그럼 언제 시를 씁니까.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좀 더 예민한 상태가 시인의 정체성입니다. 타인의 말에 민감하고, 구겨진 신문에도 민감하면 일상을 살기 불편하죠. 다만 일상에서 비일상적인 것을 목격할 때 시인의 자의식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로 메모 형태로 써둡니다. 그런 정서를 모았다가 물리적인 시간이 허락할 때 시를 씁니다.”

- 당신의 시집이 많이 팔렸다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시의 영토는 여전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1980년대는 시의 시대라 불렸습니다. 시가 사람들의 책가방, 편지, 라디오 속에 존재했죠. 지금 시는 귀신처럼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시 좋지, 좋아’ 하지만, 정작 시의 형체는 없어요. 전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서양에서는 시가 귀신은커녕 무(無)에 가깝거든요. 지금 다시 시집이 100만부씩 팔리는 시의 시대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 시, 시적인 것이 필요한 순간 읽힐 수 있도록 견고하고 단단한 형태로만 존재하면 될 것 같아요.”

박준은 올해 안으로 두번째 시집을 낼 예정이다. 그는 “문제 다 풀었는데 답안지 제출 못하는 수험생 심정으로 퇴고하고 있다”며 “삶을 잘 살아야 시도 잘 쓰고, 좋게 살아야 좋은 시를 쓸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 언제 행복하신가요.

큰 행복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거대한 불행이 닥친 적은 간혹 있었지만요. 행복은 늘 불행에 비해 몸집이 작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사소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행복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집 근처에 자주 산책을 나가는 공원이 있는데 매번 같은 벤치에 앉아 쉰다거나, 서울 종로 근처에서 일을 보고 난 후에는 으레 낙원동에 순대를 먹으러 간다거나 하는 일들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행복해요. 물론 좋아하는 사람과 이런 일들을 같이할 때면 별것이 되고 더 행복해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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