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조선 공예, 보존에서 판매로…일제강점기 관광기념품으로 전락

2018.01.17 21:00 입력 2018.01.17 21:09 수정
최범 디자인 평론가

근대화와 한국 공예의 운명

조선미술품제작소의 나전칠기 제작 모습. 조선미술품제작소의 모체는 대한제국 황실이 1908년 설립한 한성미술품제작소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한성미술품제작소를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격하시켰고, 1922년 이왕직미술품제작소가 일본인 손에 완전히 넘어가면서 조선미술품제작소가 됐다. 당연히 황실이 필요로 하는 격조 있는 기물 대신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각종 기념품 및 장식품 제작이 주를 이루게 된다.

조선미술품제작소의 나전칠기 제작 모습. 조선미술품제작소의 모체는 대한제국 황실이 1908년 설립한 한성미술품제작소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한성미술품제작소를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격하시켰고, 1922년 이왕직미술품제작소가 일본인 손에 완전히 넘어가면서 조선미술품제작소가 됐다. 당연히 황실이 필요로 하는 격조 있는 기물 대신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각종 기념품 및 장식품 제작이 주를 이루게 된다.

공예의 타자화: 기념품이 된 공예

1908년 대한제국 황실은 한성미술품제작소를 설립한다. 개항 이후 일본을 통해 값싼 산업 제품들이 들어오고 전통적인 경공장(京工匠)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황실이 필요로 하는 격조 있는 기물들을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직접 생산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전에는 관영 수공업 체제인 경공장에서 왕실과 국가 수요의 물품들을 공급했었지만, 그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연대에 설립된 이 기관은 일제시대 후반기까지 존속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몇 차례의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운영 주체와 방식의 변화이면서 생산품의 변화이기도 했다.

이왕직미술제작소의 은제 향로.

이왕직미술제작소의 은제 향로.

1910년 한일합병이 되면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자 한성미술품제작소도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왕직(李王職)은 기존의 궁내부를 대신하여 이왕가의 살림을 맡은 기관이었다. 한성미술품제작소로부터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의 변경은 궁중음악을 담당하던 조직이 이왕직 아악부로 바뀐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여전히 이왕가의 소유이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일본인들이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2년에는 운영이 완전히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조선미술품제작소가 되었다. 조선미술품제작소는 주식회사 형태로 1937년까지 운영되었다.

이처럼 대략 30년에 걸쳐 한성미술품제작소(1908~1910), 이왕직미술품제작소(1910~1922), 조선미술품제작소(1922~1937)로 바뀌어간 조선 왕실 공예의 마지막 행적은 이후 한국 현대공예가 밟게 될 운명의 데자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한국 현대공예의 주요 양상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통 왕실 기물의 제작에 충실했던 한성 시기가 전통공예의 보존을 의미한다면, 이왕직 시기에는 고대 중국의 의례용 청동기와 고려청자의 재현에 몰두하였는데, 이는 상류층의 완상 취미에 부응하는 고급 수집품으로서의 공예에 치중한 것이었다. 마지막 조선미술품제작소에 오면 판매에 한층 적극적이 되면서 전통공예를 응용한 각종 기념품과 장식품 제작이 주를 이루게 된다. 그러니까 이 일련의 미술품제작소들이 생산한 공예품들은 각기 전통공예, 완상용 수집품, 기념품으로서의 공예라는 다기한 존재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나는 이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조선미술품제작소 시기의 경향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한국 현대공예의 관광기념품화의 원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미 조선 공예는 인기 있는 수집품이자 기념품이었다. 아니 19세기 말부터 조선은 일본인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였다. 반도를 관통하는 철도가 부설되고 현해탄을 오가는 관부연락선이 개통되었으며, 조선 관광 지도와 엽서 등이 많이 제작되었다. 당시의 지도와 엽서, 기생 소개 책자 등은 지금도 한국이나 일본의 고서점과 골동품점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고려청자는 일본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어, 그것을 얻기 위한 고분 도굴이 성행했고 일본인들을 위한 경매시장이 조선에 형성될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주와 이천 지역의 도자기산업은 일본 관광객의 수요에 의존했다. 아무튼 기념품이란 타자(他者)에 의한 현지 풍물의 대상화인 만큼 주체적 근대화를 하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공예가 주로 그들을 위한 관광기념품으로 변용되어간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하겠다.

공예의 예술화: 미술이 된 공예

1922년 조선총독부는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를 개최한다. 1920년대에 들어오면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같은 민족지 창간, 경성제국대학 같은 4년제 대학 설립 등이 이어졌다. 이때 도입된 것의 하나가 바로 관제 미술 전람회였다. 총독부는 <선전>을 개최하면서 미술 전시야말로 문명국의 기준의 하나이며, 이제 그것을 조선 땅에 실시하노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11회인 1932년부터는 ‘공예부’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공예가 미술 제도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생활용품에 속했던 공예가 전시장에서 관람의 대상이 되는 미술이 된 것이다. 이처럼 미술이 된 공예를 ‘미술공예’라고 부른다. <선전> 공예부의 의의와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일상 생활용품이었던 공예를 미술로 인식하게 만들고 천한 신분이었던 장인을 근대적인 예술가로 격상시켰다. 그와 동시에 공예가 미술이 됨으로써 일부 공예가로 하여금 공예의 본래 자리, 즉 아름다운 생활용품 제작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예술이라는 낭만적이고 초월적인 세계 속에서 음풍농월하게 만들었다.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처럼 공예의 예술화(미술공예)는 상호 모순된 모습을 보이면서 한국 현대공예사에 매우 짙은 그늘을 드리우게 된다.

문제는 이것이 식민지 시기에만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에 와서 더욱 확대 재생산되었다는 사실이다. 건국 직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1949~1981)의 공예부와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상공미전·1966년, 1976년부터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람회로 개칭) 등의 이른바 관전(官展)이 공예계를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공모전에서 수상한 공예가들이 대학교수가 되어 공예교육을 담당함으로써 이러한 구조를 재생산했다. 이들 엘리트 공예가는 애당초 민중의 생활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공예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허위의 예술가 의식에 충만한 채 철저히 제도 속에서의 생존만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일제는 조선의 장인을 예술가로 신분 상승시켜주었지만, 정작 예술가가 된 장인들은 현실을 배반하고 식민지 구조를 온존시켜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제시대로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적 공예 구조가 장기지속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자 한국 현대공예의 지독한 역설인 것이다.

죽음 또는 재생: 근대공예의 운명

관광기념품과 예술로서의 공예. 나는 이 두 가지가 한국 현대공예의 지배적인 존재방식이라고 본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관광기념품과 예술로서의 공예를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예는 관광기념품이 되기도 하고 예술이 될 수도 있다. 그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공예의 본령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공예의 운명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둘째는 주변적 존재로 생존하는 것이다. 셋째는 죽어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첫째인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역사적 연구의 대상일 뿐이다. 둘째인 주변적인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주류로부터는 밀려났지만,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문화재가 된 전통공예와 전통적인 방식의 장인의 삶이 해당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기념품화와 예술화도 일종의 주변적인(그러나 한국에서는 사실상 지배적인) 존재방식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고집스러운 장인정신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변용된 형태라고 할 것이다.

내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 번째인데, 이것은 공예로는 죽고 디자인으로 재생하는 것이다. 물론 디자인은 더 이상 공예가 아니다. 하지만 낡은 시대의 공예적 가치가 디자인 속으로 침투, 내재해서 그 본질적 가치를 온존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적인 의미에서의 ‘지양(止揚·Aufheben)’이 아닐까 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서구와 일본의 근대 공예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이나 독일의 바우하우스, 스칸디나비아의 공예적인 디자인, 일본의 민예운동 등이 그렇다.

이러한 운동들은 하나같이 죽어가는 것(중세의 전통공예)을 새로운 시대(근대의 산업사회)에 적응시키려는 몸부림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미술공예운동처럼 중세적 인 복고주의로 치달은 것도 있었지만, 그 역시 실제 역사에서는 전통을 보존하고 긍정적인 면을 지양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현대디자인의 원류로 꼽히는 바우하우스는 아예 공예라는 문으로 들어가서 디자인이라는 문으로 나왔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1919년 개교 당시 바우하우스는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공예학교였다. 하지만 1923년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일’을 테제로 내세웠을 때 바우하우스는 더 이상 공예학교가 아닌 디자인학교가 되었다. 일본의 민예운동 역시 조선과 동아시아의 전통공예로부터 에센스를 추출하여 일본 현대디자인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전통공예를 근대화(Modernization)했다는 것이다.

서구와 일본의 근대공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죽음을 통한 재생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습합과 응축을 통한 중심성의 지속이다. 전자는 공예로는 죽고 디자인으로 재생하는 것이며, 후자는 공예의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서 여전히 문화의 응축된 핵심으로서 생존해나가는 것이다. 한국 현대공예에서 결정적으로 결여된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그래서 한국 공예는 디자인을 낳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전통공예는 현대디자인의 아버지가 아니고 한국 현대디자인은 전통공예의 자식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 공예와 디자인은 일종의 막장 드라마(“나는 네 아비가 아니다.”)인 셈이다.

한국 공예의 새로운 변화

그런데 식민지적 공예 구조의 장기지속에 최근 변화가 일고 있다. 나는 크게 두 가지 경향에 주목한다. 첫째는 대학 공예교육의 퇴조이다. 둘째는 핸드메이드와 메이커 붐이다. 몇 해 전부터 대학 공예과의 지원자가 줄면서 폐과가 잇따르고 있다. 이것은 공예교육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정반대로 대학 공예과의 축소는 다양한 공예교육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엘리트주의화·관료주의화 공예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자생공예 운동의 하나인 핸드메이드 붐에 주목한다. 사진은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 2017 장면. 일상예술창작센터 제공

엘리트주의화·관료주의화 공예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자생공예 운동의 하나인 핸드메이드 붐에 주목한다. 사진은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 2017 장면. 일상예술창작센터 제공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의 대학 공예는 식민지 시기로부터 연유하는 미술공예의 재생산 기지였다. 그것은 생활세계의 공예가 아니라 미술 제도 속으로 도피한 비현실 공예의 온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예를 엘리트주의화하고 국가 체제의 일부로서 관료주의화하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히려 대학 공예의 몰락을 환영하는 바이다. 공예교육은 제도 교육을 벗어나 도제 교육, 사회 교육, 전문가 교육 등 다양한 형태로 자유롭게 발전해야 한다.

두 번째로 핸드메이드와 메이커 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공예운동이기 때문이다. 핸드메이드야말로 공예의 핵심이며, 메이커 운동은 디지털 시대의 공예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제도 바깥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공예가 발전하면 무엇이 좋을까? 민족문화의 자랑거리? 돈 벌어주는 한류의 효자? 아니다. 공예가 발달한 사회는 솜씨가 좋은 사회이다. 생활 속의 작은 것 하나, 길거리 구석조차 반듯하게 잘 맞춰진 사회가 공예 사회이고 솜씨 사회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현실의 생활세계 속에서 공예가, 아니 솜씨가 살아 있는 사회인 것이다. 왜냐하면 공예는 관광기념품도 아니고 예술은 더더욱 아니며, 바로 솜씨이기 때문이다.

▶필자 최범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디자인 평론가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출판·전시·공공 부문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 국내 유일의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 편집인이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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