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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하와이에서, 더 느긋하게 지내라니…그 느긋함은 어느 정도일까

2018.01.19 17:36 입력 2018.01.19 17:41 수정
선현경|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

선현경의 ‘잠시멈춤’

하와이 사람들이 자주 하는 손동작 중에 ‘샤카’라는 게 있다. 주먹을 쥔 상태에서 엄지와 새끼손가락만을 펴고 좌우로 흔드는 동작이다. 사진을 찍을 때나 인사할 때, 운전 중 양보나 감사 사인을 보낼 때도 자주 하는 손동작이다. ‘샤카’는 근심·걱정을 잊고 느긋한 하루를 보내라는 인사가 포함된 손동작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느긋한 곳이다. 그런데 더 느긋한 하루를 보내라니 대체 이들이 원하는 느긋함의 끝은 어느 정도인 걸까?

일러스트 | 이우일

일러스트 | 이우일

“지금 몇 시지? 뭐 아직 11시도 안됐어?” 슈퍼에서 계산대 직원이 내 쇼핑 물건들의 바코드를 찍다 말고 갑자기 옆 직원과 하는 대화 내용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덧 명쯤 되었는데도 계산을 멈추고 옆 카운터 직원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벌써 배가 고프네. 이따가 잠깐 내 계산대 좀 맡아줄래? 오늘 약속이 있어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마치 서먹서먹해진 옛 친구를 우연히 슈퍼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뜬금없는 대화를 시작했고, 그녀는 (우리에게는 길지만 그녀에게는 순간이었을) 사적인 대화를 끝낸 후에야 방긋 웃으며 마무리 계산을 해주었다. 그동안 누구 하나 화를 내거나 불평하는 손님이 없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느리다. 느긋한 포틀랜드에서 어느 정도는 단련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모든 일처리가 따뜻해진 기온만큼이나 더욱더 느리게 느껴진다.

작년 12월 초에 우리가 머물고 있는 아파트 입구의 현관문 유리가 깨져 금이 갔다. 아침에 나갈 때 깨진 문을 보았는데 들어올 때는 현관이 주변까지 봉쇄되었다. 당분간은 옆문을 사용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노란색 ‘주의’ 테이프가 둘러졌다. 현관이 아니라 동선이 길어져 영 불편했지만, 노란 테이프를 무시무시하게 두른 폼이 얼른 고치겠다 싶었다. 영화에서나 봐왔던 사건 현장이 연상되는 험한 분위기였다. 아무리 느린 하와이라지만 여러 사람이 사는 아파트라 다르다. 빠른 조치가 취해질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일주일이 넘도록 그대로다. 그럼에도 아무 공지가 없고,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연말이라 들락거리는 사람도 많았는데 불평불만이 없다. 현관은 없는 셈 치고 옆문이 당연해졌을 즈음, 깨진 문이 복구되었다.

하와이는 유리문 하나를 새로 가는 일에 삼 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단 걸 알게 되었다. 느려도 보통 느린 게 아니다.

이 아파트를 계약하기 전 집을 보러 왔을 때 이 건물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오래된 아파트라 베란다 난간을 모두 새로 교체한다며 건물 전면부에 두 대의 공사용 도르래가 걸쳐 있었다. 외관상 지저분했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 위치도 좋고 가격도 적당했다. 건물 곳곳에 붙은 안내문에는 공사 스케줄이 쓰여 있었다. 조만간 끝날 일이니 상관없다며 집을 계약했다. 하지만 그 안내문의 날짜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 날짜대로라면 벌써 오래전에 끝났어야 할 난간 공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고, 그 공사로 인해 늘 꽝꽝 무척 시끄럽기까지 하다. 베란다 문을 열고 도르래를 타고 내려가던 공사장 아저씨와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한 적도 있다. 늦은 아침, 그들이 불러주는 노래에 잠을 깬 적도, 담배연기에 놀란 적도 있다.

한번은 집 앞을 통과하던 도르래 아저씨와 만난 김에 대체 언제 끝나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당황하더니 주위의 인부들에게 물어보고는 “흠, 글쎄. 우리는 잘 몰라. 그런 건 건물관리자에게 물어봐”라며 씽긋 웃음까지 날려준다. 그렇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공사가 언제 끝이 나는지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다. 언제든 일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그냥 하는 게 보통 이곳 인부들의 기본자세인 것이다. 이들은 오전 9시쯤 작업을 시작해 오후 4시면 일을 끝내는데, 그 사이사이 짬짬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먹기도 하고, 쉬기도 한다. 도대체 우리가 있는 동안 공사가 끝나긴 하는 걸까?

한번은 인부들이 도르래를 이용해 오르락내리락하며 집 안을 들여다보다 사람을 구하기도 했다. 도르래를 타고 어느 집 창을 지나쳐가다 거실에 쓰러진 노인을 보고 바로 응급차를 부른 것이다. 그들은 한참 방치되었으면 생명을 잃었을지도 모를 혼자 사는 노인을 구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한 건 정말로 다행이지만, 늘 그렇게 남의 집을 들여다보는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공사 때문에 가끔은 단수도 된다. 보통 아침 9시에서 11시까지 단수가 될 거라고 전날 엘리베이터 안에 고지를 한다. 문제는 그걸 우리가 못 보고 지나친 날이다. 우리처럼 하루종일 집 밖으로 안 나가기도 하는 사람들은 전날 급하게 써 붙인 경고문을 볼 수가 없다. 한번은 갑자기 물이 안 나와 나가보니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출력도 못하고 휘갈겨 쓴 글자가 당시의 급박함을 말해주는 것 같아 불평 없이 참았다. 하지만 11시까지라고 써두고는 2시가 넘어서도 물이 안 나오면 문제가 달라진다. 사무실에 찾아가 대체 언제쯤 물을 쓸 수 있냐고 묻는 수밖에. 그래 봤자 대답은 늘 같다.

“곧 나올 거야. 곧.” 그러고는 언제나 몇 시간을 훌쩍 넘겼다.

덕분에 자주 바다로 갔다. 공사 때문에 시끄러워서 나가고 단수가 되어 나가고. 베란다에서 자주 공사용 도르래 아저씨와 마주쳐서 나갔다. 다행히 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잡생각이 사라졌다.

이곳에선 온라인 쇼핑의 절대강자 아마존도 힘을 쓸 수가 없다. 포틀랜드에선 더 빨리 배송된 적은 있어도 늦게 오는 일이 없었던 아마존이다. 여기서는 가끔 미안하다는 메일과 함께 새로 지정된 배송 날짜가 온다. 그럼 그 새로운 날짜에는 배달이 되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다시 예정된 도착이 지연되면 또다시 미안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새로운 배송 날짜를 준다. 미안하다는 말도 자주 들으니 진심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의례적인 인사말처럼 들린다. 하와이다. 모든 것이 예외가 될 수 있는 섬이다. 느긋한 하루를 서로 빌어주며 살지 않으면 답답해 쓰러질 수도 있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그런 느긋한 하와이 사람들 덕에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포틀랜드에서 하와이로 이주할 때 당연히 같은 미국이라 전에 거래하던 은행을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들어왔다. 구글 지도로 검색해 보니 우리가 거래하던 은행이 이곳 지도에도 떠 있어 더 안심했다. 하지만 와서 보니 미국 본토의 대형 은행들은 하와이에 단 하나도 없다. 우리가 검색한 곳은 대출이나 재정 상담만 관리하는 곳이었다. 하와이엔 오직 하와이 은행들만 존재한다. 몇 번이나 본토의 대형 은행들이 하와이로 들어오려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어 실패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로컬은 로컬끼리 뭉친다. 로컬이 최고다.

덕분에 이주한 첫 한 달은 매일같이 은행을 들락거려야 했다. 본토 은행에 돈이 들어있는데도 하와이 은행으로 전환하는 데 시간이 걸려 원하는 날짜에 돈을 꺼낼 수가 없었다. 첫 달이라 집과 차, 보험료 등 큰돈이 드는 일이 많았는데, 은행에 넣어둔 돈도 못 꺼내 발을 동동 구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와이 사람들은 다들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집세를 낼 때도, 차를 살 때도 오히려 우리 걱정까지 해주며 계약을 기다려 주었다.

우쿨렐레를 사고 싶어 몇 군데 악기점을 기웃거릴 때였다. 사고는 싶은데 고를 수가 없었다. 2만원짜리 장난감 같은 우쿨렐레부터 1000만원대까지. 생김새는 비슷한데 가격차이가 엄청난 데다 종류까지 다양했다. 크기별로 소프라노, 콘서트, 테너, 바리톤이 기본이고 사이사이 크기를 살짝 달리해 슈퍼 소프라노, 슈퍼 콘서트 같은 모델명이 붙는다. 크기에 따라 소리의 음역대가 다르고, 만듦새에 따라 그 소리의 품격도 다르다. 소프라노는 소리가 가벼워 좋고, 바리톤은 묵직한 소리라 좋았다. 도무지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한 악기점에 들러 고민을 토로했더니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너의 첫 우쿨렐레를 사고 싶다고? 세상에. 나라도 고민스럽겠다. 결정하기 힘든 게 당연하지. 그냥 매일매일 와서 아무거나 들고 쳐 봐. 어느 날 이게 딱 나의 우쿨렐레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사는 건 그때 해도 돼. 내 고객 중에는 그렇게 매일 와서 치기만 하다가 가는 사람도 많다고.”

매일 가서 우쿨렐레를 칠 낯이 없어 그렇게 하진 못했지만 덕분에 오래 고심했고, 결국엔 고를 수 있었다. 처음이라면 분명히 안 골랐을 가장 작은 소프라노 우쿨렐레로 말이다. 치면 칠수록 마음에 쏙 드는 맑고 밝은 소리가 난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 준 덕이다.

예전에 본 일본 영화 <안경>에 나온 팥빙수 아줌마가 알려준 팥 졸이는 비법이 생각난다. 팥을 맛있게 잘 졸이는 비법은 바로, 서두르지 않는 것이라고.

인생을 잘 사는 비법도 그럴지 모른다. 당신의 느긋한 하루를 빈다.

▶이우일·선현경 부부는

[다른 삶]느긋한 하와이에서, 더 느긋하게 지내라니…그 느긋함은 어느 정도일까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다. 이우일은 <콜렉터> <좋은 여행> <굿바이 알라딘> 등을 쓰고 그렸으며 <노빈손 시리즈>와 <용선생 한국사>의 그림 작가다. 선현경은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 <가족 관찰기>를 쓰고 그렸으며 <이모의 결혼식> <엄마의 여행가방> 등 동화를 냈다. 지난 2년 동안 미국 포틀랜드에서 딸, 고양이와 함께 쓰고 그리며 살다가 최근 하와이 오아후섬으로 터전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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