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남북 ‘이산 문화재’

2018.01.19 17:37 입력 2018.01.19 17:41 수정

‘평창 훈풍’에 더 그리워지는 ‘반만년 역사의 반쪽’

북한의 ‘국보유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 ‘안악3호분’의 내부 동쪽 벽의 행렬도(부분). 고구려시대 고분벽화는 1600여년 전 삼국시대 생활문화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타임캡슐’로 불린다.

북한의 ‘국보유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 ‘안악3호분’의 내부 동쪽 벽의 행렬도(부분). 고구려시대 고분벽화는 1600여년 전 삼국시대 생활문화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타임캡슐’로 불린다.

“언제쯤이나 제대로 볼 수 있으려나…. 유물, 유적 사진 좀 많이 찍어와요, 발굴현장도 좋고.” 1998년 10월, 북한 방문을 앞둔 필자에게 문화유산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사진을 강조했다. 북한 사회과학원의 고고학자·미술사가 이름을 대며 그들에게 확인하고픈 질문지 수십 건을 주기도 했다. 북한에 있는 문화재 자료가 그만큼 절실한 것이었다. 필자는 당시 경향신문의 남북 문화재 교류 추진을 위한 조사차 방북, 유적들을 답사하고 사회과학원 등의 관계자를 만났다.

“거, 무령왕릉은 어때요? 경주 쪽 무덤떼 발굴은….” 북한 연구자들도 ‘남조선 민족유산’ 상황을 많이 궁금해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나 미술사적 성과를 알고 싶어 했다. 연구자로서의 학문적 열의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똑같았다. 정치체제를 뛰어넘어 뜨거웠다.

벌써 20년이 됐다. 하지만 남북한 연구자들에게 변한 것은 없다. 민족 동질성의 뿌리인 문화재 교류는 이뤄지지 않는다. 반만년의 역사·문화라고 자랑하지만 그 증거물인 문화유산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분단 전까지 함께한 이 땅의 문화유산을 남쪽 아니면 북쪽, 그 절반밖에 누리지 못한다.

남북 분단은 ‘이산가족’과 더불어 ‘이산 문화재’도 낳았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지금 내가 안다고 떠드는, 연구하는 문화유산이 그저 반쪽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사실을.

■북한의 유적·유물 고구려 금속공예품 ‘금동맞뚫음장식(해뚫음무늬금동장식)’/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북한의 유적·유물 고구려 금속공예품 ‘금동맞뚫음장식(해뚫음무늬금동장식)’/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평양 시내 ‘대동문’/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평양 시내 ‘대동문’/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60년 분단, 5000년의 망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06년 열린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전은 남북 문화재 교류사에 기록되는 특별전이다. 북한이 소장한 선사~조선시대 명품 문화재 90점이 남한을 찾았다. 소문으로 듣던, 사진으로도 볼까 말까 한 국보급 문화재들이 대거 휴전선을 넘은 것이다. 당시 이건무 중앙박물관장은 “거울 같은 전시회”라 평했다. 남북 동질성을 확인하고 통일의 당위성을 되새기게 한다는 의미다.

한편에서는 ‘이산 문화재’의 ‘상봉’이 관심을 끌었다. 광배가 없는 남쪽의 불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118호·리움 소장)과 불상이 없는 북쪽의 광배 ‘금동영강7년명광배’(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가 한 쌍인지를 확인하자는 것이다. 평양 평천리 절터에서 나온 고구려 반가사유상과 광배가 한 쌍이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나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한 쌍이 아니었다. 짝을 잃은 불상과 광배의 상봉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남북으로 헤어진 이산 문화재들의 안타까움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분단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넓게 문화유산 전반에 남아 있다. 남쪽 사람은 고구려 유적·유물을, 북쪽은 신라와 백제·가야 문화유산을 볼 수 없다. 고려·조선시대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구석기 유적인 ‘검은모루 유적’은 역사교과서 맨 앞을 장식하지만 늘 희미한 사진으로만 접한다. ‘서포항 유적’ 등 일제 식민사관을 뒤엎은 유적들도 답사할 수 없다. 가장 오래된 악기(기원전 2000년)인 ‘뼈피리’도, 고려 석탑의 백미라는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 김홍도의 ‘선녀도’도 우리는 만날 수 없다.

심지어 중국의 고구려 고분벽화보다 북한의 고분벽화를 보기가 더 힘드니 ‘그림의 떡’이다. 러시아의 발해 유적은 우리 손으로 발굴까지 하지만 북한의 발해 유적은 실태조차 모른다. 이젠 한민족 생활문화를 상징하는 아리랑, 김치마저 남북으로 쪼개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유적과 유물, 문헌기록을 제대로 접할 수 없는 역사·문화의 연구나 복원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는 더 치명적이다. 그러다보니 100년 전 일제의 연구, 사진들이 아직도 주요 자료로 활용된다. 남북의 문화재 교류가 막히고, 북한의 관련 자료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으면서 분단 60년이 5000년 역사와 문화를 망각시키고 있다. 흩어진 이산 문화재는 한반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 연구를 절반에 그치게 한다.

묘향산의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묘향산의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김홍도의 ‘선녀도’/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김홍도의 ‘선녀도’/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북한의 국보와 보물들

북한도 주요 유적·유물을 특별히 보존·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남한의 ‘문화재보호법’에 해당하는 ‘민족유산보호법’이 있다. 그 법에 따라 ‘민족유산’(남한의 ‘문화재’)을 물질유산(유형문화재 등), 비물질유산(무형문화재), 자연유산(천연기념물 등)으로 분류한다.

우리의 ‘국보’ ‘보물’ ‘사적’ ‘국가중요무형문화재’처럼 특정 문화재를 지정한다. 남한의 ‘국보’는 ‘국보유물(유적)’, ‘보물’은 ‘준국보유물(유적)’에 해당하는 식이다. 물론 가치평가나 지정 기준에 차이는 있다. 문화재가 지닌 역사적 의의나 조형예술적 가치를 따지는 것은 같다. 여기에 북한에는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또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명명한 대상물도 지정(‘교시유산’)된다.

북한의 지정문화재는 국보유적(유물) 190여건 등 모두 4800여건으로 알려져 있다(2008년 현재). 평양과 개성을 각각 수도로 삼은 고구려와 고려시대 문화재가 많다. 고구려 고분 63기로 이뤄진 ‘고구려 고분군’과 개성 일대의 ‘개성 역사유적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는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옮기면서 쌓은 평양시내의 ‘평양성’이다. 2호는 고구려 왕궁터인 ‘안학궁성터’, 3호와 4호는 평양성 성문으로 처음 세워진 ‘보통문’과 ‘대동문’이다. 국보유물인 고구려의 대표적 금속공예품 ‘금동맞뚫음장식(해뚫음무늬금동장식)’은 고구려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익숙하다. 중앙의 삼족오(세 발이 있는 까마귀로 태양을 상징)를 중심으로 봉황·용을 맞뚫음(투조) 기법으로 조각했다.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한반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악기 ‘뼈피리’(기원전 2000년 후반) /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한반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악기 ‘뼈피리’(기원전 2000년 후반) /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삼국시대의 타임캡슐’로 불리는 고구려 벽화고분인 안악 1~3호분과 약수리·수산리 등의 고분과 ‘을밀대’, 평양성을 쌓을 때의 사람 이름 등 명문이 있는 ‘평양성 명문석’도 국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5세기의 ‘고구려 나무다리 유적’, ‘온달장군과 평원왕 공주(평강공주)의 묘’도 국보유적이다.

신라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 대에 세워진 비석 5기는 남북에서 모두 국보다. 남한에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국보 3호) 등 3기가, 북한에는 황초령·마운령의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개성 일대에 있는 고려 왕궁터 만월대, 왕건릉은 물론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으로 유명한 공민왕릉, 첨성대, 성균관, 정몽주가 희생된 선죽교 등도 특별히 관리된다. 왕건의 청동좌상인 ‘고려 태조상’, 명품 청자들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의 건축, 회화, 공예 등 문화재도 물론 국보가 많다. 특히 회화에서는 안견의 ‘운룡도’, 정선의 ‘옹천파도도’, 김홍도의 ‘선녀도’, 신윤복이 소나무와 매를 그린 ‘송응도’가 국보다. 하나같이 귀중한 사료, 민족의 보물들이다.

개성 ‘만월대 유적’의 남북 공동 발굴조사 모습./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개성 ‘만월대 유적’의 남북 공동 발굴조사 모습./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문화재 교류, 시너지 효과를 낳으니

지난 60여년 동안 남북 문화재 교류는 극히 드물었다. 정치 부문을 넘어 동질성 회복 차원에서라도 문화재 교류를 하자는 여론은 높았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반면 남북이 함께 손을 잡았을 때 그 성과는 매우 컸다.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은 남북한이 한 뿌리임을, 문화유산 공유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정기 교류전이 정착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남북 전문가들은 개성 만월대 유적을 공동 발굴조사하기도 했다. 2007년 처음 시작한 공동 발굴은 남북관계에 따라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송악산을 배경으로 1000여년 동안 묻혔던 고려 궁성의 초석, 유물을 드러내 보였다. 201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단 1점씩만 전해지는 고려 금속활자 1점을 발굴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을 만든 한반도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3점을 확보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궁예도성’의 남북 공동 발굴조사도 시도할 만하다. 후고구려(태봉국)를 세운 궁예가 1100년 전 왕건과 함께 수도를 송악(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기면서 세운 궁예도성은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에 있다. 군사분계선이 가로지르는 궁예도성을 공동 조사할 경우 ‘금단의 땅’이 ‘화해의 땅’, 교류·협력의 상징적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전문가들은 십수년 전부터 공동 조사를 외치고 있다.

일본에서 문화재를 환수, 제자리에 세우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돼 있던 ‘북관대첩비’가 2005년 시민들의 노력으로 10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무찌른 기록을 새긴 전승기념비인 북관대첩비는 1707년 함경북도 길주군(현 김책시 임명동)에 세워졌으나,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불법반출했다. 환수된 북관대첩비는 남북 협의로 원래 자리에 세워졌고, 현재 북한의 국보다. 북관대첩비의 제자리 찾기는 불법유출된 해외 문화재 환수의 좋은 사례다. 남북이 손을 잡으면 더 큰 힘을 발휘하지 않겠는가.

고고학적으로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때는 약 70만년 전으로 본다. 남북이 시간과 공간,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역사시대만 하더라도 5000여년에 이른다. 최근 평창 동계올림픽을 매개로 남북관계에 모처럼 훈풍이 이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새삼 분단이 뼈아프게 다가오고, 교류와 협력의 절실함이 더 간절하다. 볼 수 없는 반쪽의 문화유산이 그립고, ‘이산 문화재’의 상처가 더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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