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 ‘자유’ 선택 고민하다…페미니즘 만나 교사로서 새 좌표 찾아

2018.01.19 17:40 입력 2018.01.19 17:42 수정
최현희|초등교사

“3월에 아이들을 잡아야 1년이 편하다.”

학교의 많은 교사들이 듣고, 또 하는 말이다. 이 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경력이 쌓이면서 몇 차례 달라졌다. 신규 때는 선배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니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아이들을 ‘잡는다’는 표현에 강한 회의와 반발심이 찾아왔다. 지금은 또 다른 단계로 넘어왔다. 아이들을 잡아야 한다는 말에 결코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말이 생겨난 학교의 구조를 더 문제적으로 바라보는 단계이다.

[최현희 교사의 학교에 페미니즘을]‘엄격’ ‘자유’ 선택 고민하다…페미니즘 만나 교사로서 새 좌표 찾아

학교는 매우 관료주의적이다. 교사들은 하루하루 학생들과의 만남과 배움의 과정을 성찰하고 사유하기보다, 기한이 정해진 공문서와 관례적인 학교행사 및 행정 업무 속에서 자율성을 잃고 점차 무기력해진다. 또한 교장이 일방적으로 학교운영에 대한 결정을 내리면 교사들은 따라야 하는 가부장적인 학교문화, 교사가 학교와 교실 안팎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는 취약한 노동여건,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의 터전이라기엔 오직 효율성만을 우선으로 부실하게 설계된 폭력적인 학교 건물, 그 안의 작은 교실에서 교사 한 명이 감당해야 하는 다인수 학급 등 학교는 ‘교육’은 고사하고 그저 교사가 학생들을 1년 동안 무사히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공간이다. 불안정한 시스템 속에서 교직사회는 보수화되며, 아이들은 교육이 아닌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어간다.

이러한 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며 학급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는 매번 교사로서 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자책해야 했다. 혹시 내가 3월에 학생들을 잘 ‘잡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학생들을 카리스마 있게 통솔하지 못하는 교사, 학생들을 너무 ‘풀어줘서’ 학급에 질서가 없는 무능력한 교사가 되는 게 두려웠다. 인권 의식과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잡는다’는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현실적 한계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닌지 헷갈려 했다. 자유롭고 도전적인 교육활동을 실천하기에 학교의 시스템은 안정적이지 않았고, 집단의 통제와 관리를 중요시 여기기엔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어려웠다.

엄격한 교사와 자유주의적 교사 사이에 늘 불안하게 서 있던 나는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확실한 좌표를 얻었다. 열악한 교육 여건 속에서도 물러설 수 없는 실천의 우선순위를 정해 나갔는데, 그중에 가장 공들여 지켜왔던 일순위가 아이들을 감히 ‘잡아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다인수 학급을 통솔하는 데 어느 정도 필요했던 카리스마적 권위를 내려놓는 일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편리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돌아가려는 관성과도 매일 싸워야 했다. 그러나 막상 내려놓기로 결심을 하니 다른 길이 보였다. 학생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집단의 일원이라기보다, 독자적으로 자신의 삶을 써내려가는 주체로 보였다.

해방감도 찾아왔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학생들을 대하니, 완벽한 교사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허점이 많고 서투른 나를 더 신뢰했다. 우리 사회에는 도덕적으로 완벽하며 감정적으로 동요되지 않는 성인군자적인 자질을 교사의 전문성이라고 여기는 풍토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서투르고 부족하며 감정이 있는 한 인간으로서 학생들과 진실하게 만나는 것이 교사의 전문성이라고 믿는다. 교사는 무색무취의 기계적이고 중립적인 존재일 수 없으며, 혹시 가능하다고 한들, 그러한 교사가 학생의 성장에 어떤 영감과 자극을 줄 수 있을까.

페미니즘은 교사로서의 권력을 성찰하고 교육관을 정립하는 것을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학생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시선을 갖게 했다. 교실은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해가는 공간이다. 경쟁과 성과주의에 매몰된 우리 사회 현실은 교실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성적, 성별, 외모, 신체능력 등에 의해 여러 집단이 나뉘며 필연적으로 약자 집단이 생겨난다. 아이들은 때로 잔인하다. 그들이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야만의 질서를 밖에서 어른의 시야로 보면, ‘아이들이니까’ ‘다 한때 저러는 거지’ ‘우리도 다 저렇게 컸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약자 입장에서 겪는 고통과 소외는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도, 지나가는 한때의 일도 아니다.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교실 안에서 힘이 있는 학생이 주축이 되어 학급의 문화를 주도하는 일은 교실에서 흔히 벌어지는 풍경이다. 사실 교사가 또래집단 내 권력을 가진 학생들과 연대하면 학급운영은 비교적 쉬워질 수도 있다. 반면 학급 내 약자의 위치에 있는 학생들과 연대하고, 때로 교실 내 권력을 가진 학생을 향해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교사로서 위험부담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교사가 교실에서 큰 권력을 가진 것은 맞지만 학생들이 교사를 소외시키며 권력이 전복되는 일 역시 오늘날의 교실에서는 흔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사는 이를 무의식적으로라도 인지하고 있으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교사에게 이러한 두려움을 외면해서는 안될 분명한 이유와, 회피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페미니스트 교사는 교실 상황을 민감하게 관찰하고 적절히 개입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학급문화의 중요성을 말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설득해 나간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학생들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폭력과 차별을 고민하고 서로 조심할 수 있도록 이끈다. 페미니스트 교사라고 해서 이러한 교육활동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이며 끝없는 좌절의 연속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바른 말을 사용하라’ 등의 규범적 지시보다 힘이 있는 교육인 것은 분명하다.

한 페미니스트 동료교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교사가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교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당연하게 여기던 교실의 익숙한 풍경들이 약자의 시선으로 재해석되는 경험, 기존의 학교 질서와 통념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상상력, 교사와 학생 혹은 어른과 아이라는 이분법적 틀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과 관계의 풍요로움…. 페미니즘을 통해 내가 얻은 것들이다.

관료적이고 보수적이며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학교라는 공간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이상, 나는 내가 교사로서 꾸준히 성장할 거라 믿는다. 페미니즘적 성찰과 실천이 나에게 매너리즘에 빠질 아주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힘들고 괴로워도 페미니스트 교사됨이 기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최현희 교사의 학교에 페미니즘을]‘엄격’ ‘자유’ 선택 고민하다…페미니즘 만나 교사로서 새 좌표 찾아


▶필자 최현희

13년차 초등교사. 좋은 교사가 되려고 노력하던 중에 페미니즘을 만나버렸다. 페미니스트가 되기 전에는 스스로 꽤 좋은 교사라고 믿었으나,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로 다시 바라본 교실과 학교는 좋은 교사에 대한 고민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했다. 페미니즘으로 직업과 일상이 고단해졌지만 고민하고 실천하는 삶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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