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명단

2018.01.23 17:11 입력 2018.01.23 20:14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이른바 블랙리스트 범죄란 형법 123조 직권남용에 해당한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혐의로 기소돼 어제 서울고등법원 항소심까지 유죄가 선고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게도 적용됐다. 법조문을 보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후략)’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정의를 대법원 판례를 인용한 김 전 실장 재판부가 설명했다.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을 불법적으로 사용하면 직권남용이라는 것이다. “직권남용죄의 직권남용이란 공무원이 그의 일반적 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관하여 그것을 불법하게 행사하는 것, 즉 형식적, 외형적으로는 직무집행으로 보이나 그 실질은 정당한 권한 이외의 행위를 하는 경우를 의미한다.”(대법원 90도2800 판결 등)

그런데 김 전 실장은 리스트가 있더라도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정에서 “지원배제 명단을 전달하면서 탈락을 건의한 적이 있다 해도 부탁 또는 협조요청에 불과해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것이 아니고, 의무 없는 일의 결과가 실현되지도 않았으며, (리스트의 누군가가) 탈락했다고 해도 사업규모 축소 결정이 정당한 이상 인과관계가 없다”고 했다.

이에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은 “직권남용은 개입 지시 행위 그 자체이고, 지원배제가 실현됐는지는 다른 문제”라고 했다. 재판부는 “심의 과정 등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행위를 한 이상 의무 없는 일이 이룩되어 범행이 기수(旣遂)에 이른 것이고, 해당 사업에서 일부 배제 대상자가 배제 지시와 무관하게 지원심의 과정에서 탈락했다고 하여 달리 볼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을 법의 언어로 정리하면, 이모 판사가 실행하기를 거부한 법원행정처의 불법한 지시 그 자체다. “거기에 판사들 뒷조사한 파일들이 나올 텐데, 그러더라도 놀라지 말고 좋은 취지에서 한 거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2017년 조사위가 밝힌 이모 부장판사의 지시) 이 단계에서 이미 이 판사에 대한 행정처의 직권남용 범죄가 성립된다.

지난해 조사위의 결론을 다시 읽어본다. “이○○ 판사가 이규진 상임위원으로부터 들었다는 기획조정실 컴퓨터의 판사들 뒷조사 파일은 결국 위 (국제인권법연구회 공동학술대회) 대책문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고, 더 나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아가 연구회 대책문건들 이외의 전체 판사들 동향을 조사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할 가능성을 추단케 하는 어떠한 정황도 찾아볼 수 없었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국제인권법연구회 공동학술대회에 대한 행정처의 대책문건 2건 이외에는 행정처가 판사들의 동향을 조사한 또 다른 파일이 없다고 근거 없이 단정한 점, 그리고 블랙리스트를 ‘전체 판사들 동향 조사’라고 정의한 점이다. 조사를 촉발한 지난해 4월7일 경향신문은 ‘대법원 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들에 관한 동향을 파악한 일종의 사찰 파일’이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시작된 추가조사위 과제는 ‘공동학술대회에 대한 행정처의 대책문건 2건 이외’의 문건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됐다. 양승태 조사위가 미진한 조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매우 협소한 정의에 들어맞는 파일을 찾아내는 것은 과제가 아니었다. 양승태 조사위가 정의한 판사 블랙리스트는 조사위의 직무유기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알량한 법지식의 지뢰다.

이번 추가조사에서 드러난 대로 행정처는 직권남용 범죄를 저질렀고, 판사들에 대한 불이익도 실현시켰다. 판사들의 성향을 분류해 강성은 검은색으로 적었고, 이 명단으로 법률상 기구인 사법행정위원회 참가 법관을 골라냈다. 위법이고 위헌이다.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고 지원에서 배제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김 전 실장 사건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이 그대로 적용된다.

추가조사위는 공무원의 고발의무를 어겼다. 행정처의 범죄 혐의를 알고도 검찰에 고발하지 않았다. ‘공무원은 그 직무를 행함에 있어 범죄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고발하여야 한다’는 형사소송법 234조 2항 위반이다. 고만고만한 판사들이 모여 벌이는 대법원 자체 조사의 태생적 한계다. 법원은 성역이 아니다. 그런데도 피의자들은 도리어 공용컴퓨터 검증에 반대하기 위해 프라이버시 운운하고 있다. 검사가 영장을 받아 검증하는 수밖에 없다.

“피고인 ○○○은 사법행정권을 남용하여 법원행정처 소속 심의관으로 하여금 판사들의 성향을 분석하여 보고하게 함으로써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였고, 피고인 ○○○은 행정처 공용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삭제함으로써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하였다.”

이 나라 사법의 정의를 위해, 공소장을 써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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