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올림픽? 평양 올림픽? 손님과 함께 즐기는 축제로

2018.01.26 17:07 입력 2018.01.26 21:04 수정
곽원철

곽원철의 ‘알프스 베베 레나’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그르노블은 196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였다. 즉 올해가 동계올림픽 개최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곳곳에서 관련 행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2018년 올림픽 대표팀 환송식 등 평창 관련 소식들도 눈에 띄어 반갑다. 그르노블이 속한 프랑스 동남부는 프렌치 알프스의 중심 지역이다. 알프스 하면 보통 스위스를 떠올리지만, 실은 알프스산맥은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4개국에 고루 걸쳐 있다. 그중 최고봉인 해발 4808m의 몽블랑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위치해 있다. 다만 상대적으로 면적이 작은 나라인 스위스는 국토의 대부분이 알프스산맥에 걸쳐 있다 보니 알프스가 곧 국가의 정체성과 동일시되었을 뿐이다.

그르노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산악스포츠센터(maison de la montagne)에 가면 이 지역에서 즐길 수 있는 동계 및 산악 스포츠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르노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산악스포츠센터(maison de la montagne)에 가면 이 지역에서 즐길 수 있는 동계 및 산악 스포츠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1992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알베르빌과 1924년 제1회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샤모니도 그르노블과 같은 지역에 속한 인근 마을이다. 강원도 내 평창, 춘천, 속초가 시차를 두고 돌아가며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느낌이랄까. 2006년 개최지인 이탈리아의 토리노도 산 넘어 바로 지척이다. 한국의 모 재벌기업 회장님께서 슬로프를 통째로 전세 내 ‘황제 스키’를 즐기셨다는 리조트도 이 근처이고, F1(포뮬러 원)의 황제로 군림했던 미하엘 슈마허가 2013년 스키를 타다가 크게 다쳐 혼수상태로 이송된 병원도 우리 집 길 건너에 있다(조용한 동네에 갑자기 각국의 기자들과 방송 중계차들이 몰려와 무슨 일인가 하고 깜짝 놀랐었다).

나의 경우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후 직장을 따라 이 동네에 정착한 경우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 지역에 살아온 회사 동료, 지인과 이웃에게 동계 스포츠와 산악 레저는 그야말로 생활의 일부다. 굳이 몽블랑까지 가지 않아도, 한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해발 3000m에 육박하는 설산이 즐비하고 크고 작은 스키장이 곳곳에 촘촘히 설치돼 있다. 스키의 종류도 다양해서 알파인과 노르딕 스키는 물론 스노보드, 크로스컨트리 및 산악스키, 설피를 이용한 산행 등 온갖 종류의 동계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대형 스키장이 있는 유명 리조트의 성수기는 연말보다는 2월이다. 프랑스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겨울방학이 따로 없고 연말에 성탄절을 전후로 2주간의 방학이 있고 나서 (이 기간은 우리나라의 추석이나 설날과 같은 명절이라, 가족이나 친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편적이다) 2월 중순부터 3월 초까지 지역별로 시차를 두고 주어지는 2주간의 ‘스키 방학’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네 스키장에서는 스키복을 비롯해 온갖 장비를 단단히 갖춘 이용객들이 눈에 띈다. 이들은 알고 보면 파리 등 타 지역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정작 이곳 주민들은 무릎·엉덩이 보호대 정도로 대충 갖추고 평상시 입는 청바지와 점퍼 차림으로 스키를 즐기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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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스키장이 있는 곳을 피해 산악스키 장비를 갖추고 산으로 올라가 마음껏 자유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아무런 안전설비나 장치도 없는 곳에서 스키를 타다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 어렸을 때부터 자전거 타듯 스키를 배워 타고 있는 이곳 사람들은 루트가 정해져 있는 스키 코스는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쯤 되면 안전은 각자의 몫일 것 같지만, 그렇다고 조난을 당했는데도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 성수기가 되면 구조 헬기가 바쁘게 뜨고 내리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빙상 스포츠 활동 또한 무척이나 활발해서 프랑스에서 가장 큰 실내 아이스링크뿐 아니라 크고 작은 아이스링크들이 산재해 있다. 전에 우리 팀에서 일하던 한 동료는 아마추어 아이스하키팀에서 활약했다(키가 190㎝에 가까운 거한이다). 이후 파리로 근무지를 옮겼는데 거기선 제대로 뛰어볼 만한 팀이 없다고 투덜댔다. 프랑스에는 김연아와 같은 빙상계 슈퍼스타는 없는 듯하지만, 적어도 우리 지역 소녀들은 각종 스키와 스케이트를 자연스럽게 익혀 일상적인 오락으로 즐기며 성장한다.

스키에 푹 빠진 사람들은 그해의 눈 상태에 따라 늦게는 4월 중순에 2주간 있는 부활절(성탄절과 더불어 프랑스의 양대 명절이다) 방학까지 스키를 타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알프스라도 일 년 내내 스키를 탈 수는 없다. 여름엔 여름대로 즐길 거리가 많다. 가벼운 산행은 물론이거니와 래프팅, 암벽 등반, 패러글라이딩 등 다양한 아웃도어 스포츠가 성행한다. 우리나라의 ‘암벽 여제’ 김자인 선수가 활약한 스포츠클라이밍 월드컵이 해마다 열리는 브리앙송, <레옹> 이후 한국 개봉 프랑스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경신한 <언터처블: 1%의 우정>에 등장하는 패러글라이딩 장면의 배경인 보포흐(이 동네는 치즈로 유명하기도 하다) 모두 이 근처다. 가히 산악 및 동계 스포츠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그르노블은 요즘 ‘1968 그르노블 동계올림픽’ 개최 5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 준비에 한창이다. 기념 포스터도 여러 버전으로 제작됐다.  출처: 그르노블 시청 홈페이지

그르노블은 요즘 ‘1968 그르노블 동계올림픽’ 개최 5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 준비에 한창이다. 기념 포스터도 여러 버전으로 제작됐다. 출처: 그르노블 시청 홈페이지

관광 안내서도 아닌데 굳이 이 지역의 레저 활동을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이곳 사람들에게 자연 속에서 즐기는 레저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일부인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르노블 및 알프스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어릴 때부터 이러한 야외 활동에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어떤 직업을 갖건 이런 레저 활동이 삶의 한 축이자 빼놓을 수 없는 일생의 즐거움이 된다. 개중 특출한 재능을 드러내 엘리트 스포츠에 편입되는 경우도 있지만(국제 경기에서 활약하는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동계 스포츠 선수들 거의가 이 지역 출신이다), 대부분은 취미 생활이자 삶의 즐거움으로 만족한다. 한편 이 지역에는 우수한 이공계 대학과 연구기관, 첨단 기술 기업이 집중되어 있기도 하다(우리나라의 대덕연구단지나 포항을 떠올리면 된다). 이곳에 사는 프랑스인의 전형적인 프로필은 주중에는 연구소나 기업에서 첨단 기술을 연구하고, 주말이면 산악 동계 스포츠를 즐기는 엔지니어 내지는 과학자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파리지엔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인들의 모습과는 꽤 차이가 있다.

그르노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산악스포츠센터(maison de la montagne)는 이 지역에서 즐길 수 있는 동계 및 산악 스포츠에 대한 안내를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각 동네 도서관에는 이 지역과 알프스 전역의 지리 정보와 풍경 등을 담은 책들을 모아 둔 서가를 따로 구비해두었고, 서점에서는 각각의 봉우리별 등산로를 표시한 정밀 지도를 쌓아 두고 판매한다. 해마다 산악 영화제니, 산악 도서제니 정말로 온갖 종류의 행사를 연다. 앞서 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들 있다고 했지만, 사실 뭐 특별히 대단할 것은 없다. 그냥 해마다 해오던 것들을 50주년 핑계로 좀 더 거창하게 한다고나 할까.

즉 이들에게는 동계올림픽이 특별히 대단한 행사라기보다는 그냥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스포츠를 주제로 큰 잔치를 벌이되, 자기들끼리만 즐기기 아까우니 세계인들을 초대한다는 개념 정도로 보인다. 올림픽 같은 ‘국가적인’ 행사를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리가 있겠느냐고? 인근 지역인 앙시의 경우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우리나라의 평창, 독일의 뮌헨과 함께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놓고 경합을 벌인 바 있는 앙시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로 구성된 유치단과 지방 및 중앙 정부가 나름으로 열심히 유치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작 지역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해 유치가 무산됐다.

앙시 주민들은 동계올림픽 유치 반대 운동을 위해 자체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다. 출처: 앙시 올림픽 반대위원회

앙시 주민들은 동계올림픽 유치 반대 운동을 위해 자체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다. 출처: 앙시 올림픽 반대위원회

호수와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마을인 앙시는 기왕에 스키 리조트가 조성되어 있고 세계 최대의 스키 휴양지인 샤모니 및 기존 개최지인 그르노블, 알베르빌과 지척이라 대규모 중복 투자 없이도 올림픽을 유치하기에 무리가 없었으나, 지역 주민들은 올림픽에 수반될 수 있는 환경 파괴와 공해, 향후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지자체의 재정 부담 등을 이유로 올림픽 유치를 반대했다.

물론 앙시가 평창에 밀린 것이 전적으로 이들의 활동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이 먼저 나서서 올림픽을 반대한 이 사례는 프랑스인들에게는 올림픽보다는 자신들의 삶과 환경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가 아닐까. (프랑스 올림픽 위원회는 이때의 불협화음을 교훈 삼아 이후 더 체계적인 유치전에 나서, 2024년 파리 하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파리로서는 1900년, 1924년에 이은 세 번째 올림픽 개최다.)

우리의 평창은 어떨까. 먼저 오해 없으시기를 바란다. 동계 스포츠계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이 작은 마을을 홍보하고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쏟아부은 노력을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올림픽을 통해 세계인과 함께 즐길 동계 스포츠가 나의 고향이기도 한 개최지 강원도민들의 삶에 얼마나 뿌리 내리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면 이것이 누구의, 누구에 의한 축제인지 선뜻 답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정작 사람들의 관심사는 올림픽 자체보다는 그 결과로 얻어질 각종 효과들에 더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국내 언론을 통해 멀리서나마 접하게 되는 올림픽 관련 소식들을 보면 동계 스포츠보다는 정치 공방에 관한 것들이 더 많은 듯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올림픽을 빌미로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상응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하는 것 자체를 말릴 수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예상외의 적극적인 참여를 두고 ‘평창 올림픽을 평양 올림픽으로 상납하려 한다’는 등의 자극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정치 공세의 도구로 삼으려 하는 모습에는 아연하게 된다. 가능하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초대해서 함께 즐기고 싶은 것이 잔치를 여는 사람의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남북 단일팀 구성을 놓고도 ‘피땀 흘려 노력한’ 선수들의 기회를 빼앗으려 한다며 비난을 위한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올림픽 출전을 위해 땀을 흘리는 것은 좋지만, 제발 피는 흘리지 말았으면 한다. 평화의 축제인 올림픽에 목숨까지 걸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는 어쩌면, 우리가 올림픽을 통해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 하기 때문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치적인 목적도 달성해야지, 경제도 활성화해야지, 개발 사업을 벌여 낙후된(?) 지역에 인프라 깔면서 조용히 살던 멀쩡한 시골 땅값도 올려야지(그 과정에서 슬그머니 이권도 챙겨야지), ‘세계 최초’ 5G 기술력 과시도 해야지…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또 ‘국위 선양’과 ‘개인의 영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것이다. 다 좋기는 한데, 적어도 올림픽의 축제 정신만은 잊지 않았으면 한다. 손님을 맞을 우리가 너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이번 기회를 통해 뭔가 대단한 걸 이뤄내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힘주고 인상 쓰고 있어서야, 손님들인들 제대로 즐길 수 있겠는가. 주인이 스스로 즐기지 않는 잔치를 손님이 즐기기를 기대하기는 난망할 것이다. 경기에서 메달을 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평창을 찾은 세계인들로 하여금 ‘한국인들은, 강원도민들은 진정 동계 스포츠와 축제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군’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국위 선양’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올림픽에 대한 잔뜩 부풀려진 기대를 이제는 좀 내려놓고, 기왕에 초대한 손님들과 함께 즐겁게 축제의 한마당을 벌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우리 스스로 시원하게 즐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올림픽의 성과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삶]평화 올림픽? 평양 올림픽? 손님과 함께 즐기는 축제로

필자 곽원철 강원도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에서 12년 남짓 직장 생활을 하다가 2009년 프랑스로 건너갔고,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실에서 근무하게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현재는 알프스 자락에 걸친 남프랑스의 산악도시 그르노블에서 아내와 갓 태어난 딸 레나와 함께 살면서 파리를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뭔가 남들과 다르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모토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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