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름달 품은 달항아리(상)

2018.02.02 17:12 입력 2018.02.02 22:18 수정

‘미지의 달’ 모두를 홀린 너인데…너에 대해 아는 게 없구나

‘달항아리’는 아름다운 이름만큼이나 사랑을 듬뿍 받는 백자 그릇, 항아리다. 국내외에서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아예 한국적 아름다움, 한국미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손꼽힐 정도다.

조선 후기에 등장했다가 갑작스레 자취를 감춰버린 달항아리. 하지만 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다채롭게 변주되면서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도예가라면 한번쯤 ‘나만의 달항아리’를 꿈꾼다. 박물관과 미술관, 갤러리에선 ‘달항아리전’이 끊이지 않는다. 미술가와 사진가, 건축가, 디자이너들도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얻는다. 여느 문화재처럼 박물관에 박제되지 않았다. 현대적 계승을 통해 여전히 살아 숨쉬는 문화유산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그런 달항아리 이야기를 상하로 나눠 살펴본다.

보름달을 품은 듯한 ‘달항아리’는 조선 후기에 등장, 한국미를 상징하는 문화재로 사랑받으며 지금도 다채롭게 계승되고 있다. 사진은 긴 세월을 말하는 듯 자연스러운 얼룩(오동나무 기름으로 추정)으로 유명한 국보 제309호 ‘백자 달항아리’(높이 44.5㎝,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보름달을 품은 듯한 ‘달항아리’는 조선 후기에 등장, 한국미를 상징하는 문화재로 사랑받으며 지금도 다채롭게 계승되고 있다. 사진은 긴 세월을 말하는 듯 자연스러운 얼룩(오동나무 기름으로 추정)으로 유명한 국보 제309호 ‘백자 달항아리’(높이 44.5㎝,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 아는 듯 모르는 달항아리

달항아리는 둥그런 보름달을 닮았다. 흔히 “달항아리”라 부르지만 문화재로서 공식명칭은 ‘백자 달항아리(백자호)’다. 문화재청이 2011년 문화재 명칭들을 정비하면서 확정했다.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시대의 대표 도자기인 백자, 백자 중에서도 무늬가 없는 순백자 항아리다. 색감과 형태가 보름달을 품은 듯하고, 높이와 너비가 40㎝ 이상을 말한다. 여기에 비춰보면 요즘은 달항아리란 이름이 남발되는 경우도 많다.

달항아리는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주로 18세기 전반)의 특정 시기에 나타났다. 당시 왕실의 음식과 식기를 담당한 기구인 사옹원의 분원이 있던 지금의 경기 광주 일대, 특히 금사리 등의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국영 가마에서 만들어진 왕실 전용 백자인 것이다.

<b>국보 제262호 ‘백자 달항아리’</b> 높이 49.0㎝, 우학문화재단 소장

국보 제262호 ‘백자 달항아리’ 높이 49.0㎝, 우학문화재단 소장

현존하는 달항아리는 국내외에 20점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깨지기 쉬운 데다 일상생활 속에서 손과 손을 거쳐 전해져온 전세품이다보니 귀할 수밖에 없다. ‘고려 불화’도 세계적으로 160여점 존재하는 것에 비하면 그 희귀성이 두드러진다. 대를 이어 전해진 달항아리는 그만큼 소중한 문화재다.

국내에 있는 달항아리 가운데 7점은 국가지정문화재 ‘국보’(3점)와 ‘보물’(4점)이다. 국보는 제262호(우학문화재단 소장)와 309호(삼성미술관 리움), 310호(개인소장)다. 보물은 제1437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1441호(디 아모레 뮤지엄), 개인들이 소장한 1438호·1439호다. 모두 높이와 몸체 지름이 40㎝를 넘는다. 또 굽 지름이 입 지름보다 짧다. 서로 닮은 듯하지만 다르다.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달항아리는 영국박물관 소장품, 300여 조각으로 박살난 것을 복원한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이다. 이 둘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특별전에 출품되면서 고향을 잠시 찾았다.

<b>국보 제310호 ‘백자 달항아리’</b> 높이 45㎝, 개인 소장으로 국립고궁박물관 기탁

국보 제310호 ‘백자 달항아리’ 높이 45㎝, 개인 소장으로 국립고궁박물관 기탁

달항아리란 이름을 누가 처음 지어 불렀는지는 학술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다만 한국미의 본질을 천착한 미술사가 혜곡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1916~1984),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달항아리 애호가로 이름난 수화 김환기(1913~1974)라는 의견으로 나뉜다.

■ 이어지는 상찬, 왜?

달항아리는 국내외 미술사가, 예술가, 문인 등 저명 인사들로부터 아름다움을 칭찬받는 대표적인 문화재다. 하나같이 한국인의 정서와 삶, 가치관, 미적감각을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우선 세계적으로 유일하기 때문이다. 한국만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공예품이어서다. 17~18세기 당시 백자 항아리는 도자기의 종주국 중국, 유럽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일본에서도 많이 제작됐다. 그런데 달항아리 같은 순백자 항아리는 조선에만 있다.

<b>보물 제1437호 ‘백자 달항아리’</b> 높이 41.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1437호 ‘백자 달항아리’ 높이 41.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흔히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태토와 유약이 가마 속에서 불을 만나 어우러져 내는 색깔, 선으로 드러나는 형태미, 표면의 무늬 수준, 제작기법과 전반적인 완성도 등으로 판단한다. 병이든 항아리든 접시든, 청자나 분청사기, 백자도 그렇다. 이런 점에서 달항아리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형태로 볼 때 달항아리는 백자 중 가장 크면서도 어떠한 무늬장식이 없이 순백의 둥그런 모습이다. 둥글지만 대칭되는 완전한 원형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지러진 것도 아니다. 어설픈 듯한데 온전하고, 텅빈 듯한데 꽉 찬 것 같다. 혜곡 선생은 “어리숙하고 순진한 아름다움” “무심한 아름다움” “원의 어진 맛”이라 표현했다. “넉넉한 맏며느리” 같다는 것이다.

<b>보물 제1438호 ‘백자 달항아리’</b> 높이 47.5㎝, 개인 소장

보물 제1438호 ‘백자 달항아리’ 높이 47.5㎝, 개인 소장

“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낸 백자 항아리의 흰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을 어느 나라 항아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대견함을 느낀다”고 했다.

어리숙한 듯한 부정형은 오히려 관람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양감을 더 풍부하게 선사하면서 시선의 방향이나 높이, 날씨나 빛의 강도, 관람자 기분에 따라 다른 작품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전시장에서 달항아리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한바퀴 빙 둘러보는 게 좋다.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긴 수화 선생은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꽃나무를 배경으로, 하늘을 배경으로 삼는 때가 있다. (…)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온통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통한다. (…)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라고도 했다.

<b>보물 제1439호 ‘백자 달항아리’</b> 높이 47.8㎝, 개인 소장

보물 제1439호 ‘백자 달항아리’ 높이 47.8㎝, 개인 소장

달항아리는 가운데 불룩한 부분에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접합한 흔적이 있다. 크다보니 한번에 만들기 힘들어 아래와 윗부분을 절반씩 만들어 붙였다. 그런데 붙인 흔적을 감출 수 있음에도 오히려 드러냈다. 그 흔적은 한국미의 하나로 꼽히는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 가장하지 않는 솔직함으로 읽힌다. 또 밑의 굽 지름이 위의 입 지름보다 짧다보니 멀리서 보면 공중에 떠있는 듯하다. 자칫하면 윗부분의 풍만함이 안정감을 해칠 수 있지만 균형을 잡는다.

이토 이쿠타로 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장의 분석이다. “정제성을 기피·부정하고 ‘비정제’를 지향하는 듯하다. 모습과 형태에 있어 좌우 대칭성과 균형, 마무리의 완벽함, 소성에 있어서의 완전소성 등은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요구되는 것은 형태의 본질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형태’는 기피하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형태를 요구한다.”

<b>보물 제1441호 ‘백자 달항아리’</b> 높이 44.5㎝, 디 아모레 뮤지엄 소장

보물 제1441호 ‘백자 달항아리’ 높이 44.5㎝, 디 아모레 뮤지엄 소장

달항아리들은 모두 우윳빛의 단색 같지만 실제로는 색감이 저마다 다르다. 겨울철 눈같이 하얀 설백색이 있고, 엄마의 젖 색깔이라 할 유백색, 푸른 빛깔이 은근히 감도는 청백색, 옅은 회색이 곁들인 회백색이 있다. 장인의 태토·유약 조제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장작가마 안에서 벌어지는 흙과 불의 조화가 빚어내는 결과로, 달항아리를 흔히 “자연이 빚는다”고 표현하는 이유다.

한 품으로 안기에 벅찬 크기임에도 인공적 장식이 없다. 당시 중국, 일본 백자는 삼채, 오채 등 화려한 색깔로 갖가지 무늬를 장식했다. 조선의 병이나 접시, 주전자, 연적도 순백자가 많지만 이 정도 크기에서는 없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한국 전통미술은 자연과 같아 억지로 꾸미지 아니하고 단순·간결하고 소탈·대담하며 너그럽고 익살스럽고 단아하다”면서 “아무 장식과 문양이 없이도 이렇게 크고 너그러우며 덕이 있고 잘생긴 아름다운 항아리가 다시 있겠는가”라고 했다. 동양미술사학자 마이클 R 커닝햄은 “도자기라는 외형 안에 감춰져 있는 한국적인 목소리의 영예로운 표상이 될 수 있다. (…) 서구인들이 조선 백자가 지닌 미의 세계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한국 그 자체와 문화사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 상대적으로 부족한 연구

사실 달항아리는 학술적으로 규명하지 못한 숙제들이 많다. 숱한 상찬에 비해, 다른 도자기들에 비해 학술적 연구성과가 변변찮다. 논문보다 심미적 차원, 인상비평에 집중됐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 달항아리를 다룬 논문은 상당수 있지만 현대 도예작품과 달항아리의 심미적 부분에 집중한 경우가 많다. 도자사, 공예사의 흐름 속에서 제작 배경이나 유형 분석, 변천과정 등을 다룬 논문은 드문 것이다.

달항아리는 역사적으로 숙종 말부터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1776~1800) 대에 등장하고 또 사라졌다는 게 학계 정설이다.

조선의 주체적 성리학을 기반으로 문화예술 전반에서 중국풍을 극복하고 고유의 문화예술을 꽃피운 시기다. 당시 달항아리(원호)와 더불어 제작된 아랫부분이 홀쭉한 청화백자 항아리(입호) 등에 비해 달항아리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진하다.

우리는 아직 달항아리의 용도도 정확히 모른다. 왕실의 단순한 먹거리 저장 용기인지, 중요 행사나 사신접견 등에 쓰인 의례용인지, 감상용인지 확실하지 않다. 꿀, 기름 같은 액체류를 담았다거나 꽃을 꽂는 화병이라거나 제사용 제기, 그저 장식품이라는 의견이 엇갈린다. 통념과 달리 달항아리가 청화백자 항아리 등 입호에 비해 위상이 훨씬 낮았다는 주장도 있다.

달항아리는 다른 항아리들에 비해 자료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문헌사료가 적은 데다 편년을 잡을 단서가 되는 자료도 없다. 의아하게 당시 의궤나 시각자료들 속에서도 다른 항아리 자료는 보이는데 달항아리는 없다. 물론 그 이유도 모른다. 여느 문화재보다 국내외적으로 상찬이 쏟아지며 한국미의 전형으로까지 대접받는 달항아리. 그렇기에 더 적극적인 학술적 연구성과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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