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만으로도 배운다, 그녀의 당당한 발걸음을 내가 보고 배웠듯이

2018.02.02 17:17 입력 2018.02.02 17:54 수정

여성들만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이 등장한 KBS2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

여성들만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이 등장한 KBS2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

내가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한참 걸어야 하는 거리였는데, 아침 등굣길마다 마주치던 언니가 있었다. 나를 지나쳐 걸어가는 그 언니의 모습은 어딘가 특별했다. 일단 발걸음이 매우 씩씩했고 표정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다. 멀리서 아주 작은 실루엣만으로도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인사 한번 나눠보지 못했지만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 듯 아직까지도 그 언니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교사로서 그를 떠올릴 때 의미 있게 기억되는 것은 그를 만난 후에 달라지곤 했던 나의 태도이다. 나는 어느새 허리를 펴고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자신감 있는 미소를 띤 채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바른 자세나 활기찬 태도에 대해 직접 가르친 적이 없었지만, 나는 배운 것이다. 꾸준히 보는 것만으로 배움이 일어나던 순간의 선명한 기억은 교육자로서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내가 입으로 가르치는 내용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나를 보며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하는 묵직한 두려움 때문이다.

배움은 학교 수업시간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이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과 타인에 대해 배우는 것을 공공의 교육과정(Public pedagogy)이라고 한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명시적 교육은 ‘남녀는 평등하다’였다. 그러나 학교 안팎 공공의 교육과정은 나에게 다른 메시지를 집요하게 주입하고 있었다. 남학생이 1번, 여학생이 51번부터 시작되는 학급번호, 태어나자마자 당연하게 아버지의 성을 따른 나의 이름, 명절이 되면 당연하게 아버지의 본가부터 방문하며 그곳에서 명절노동을 전담하는 어머니와 여성 친척을 보는 일, 모험을 하며 성장하는 주체적인 캐릭터가 모두 남성으로 재현되는 문학작품, 남학생들의 성적인 괴롭힘과 희롱(치마 들추기, 가슴을 만지고 도망가기, 성관계를 의미하는 손가락 동작을 여학생들 앞에서 하며 즐거워하는 행동)에 대해 ‘남자애니까 으레 그럴 수 있다’고 용인하는 어른들의 ‘너그러움’, 정치인이나 사회 주요 인사 등 세상에서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듯 보이는 어른들의 성별이 대부분 남성인 사회, 티브이 드라마에서 늘 여성이 분주하게 식사를 준비하며 돌봄노동 및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장면을 반복해서 봐야 했던 경험…. 이 모든 것이 교육이었다.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했던 젊은 여성의 모습이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이유는 그 모습이 내가 태어난 이후로 끊임없이 주입받았던 얌전하고 다소곳한 ‘여성성’의 규범에서 한참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여성이니까 씩씩하게 거리를 활보해선 안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대중매체에서 반복적으로 묘사되는 여성의 이미지와 주변의 성별화된 어른들의 역할행동을 통해 나는 그런 당당하고 호탕한 걸음걸이가 여성인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이것은 의식적인 배움이 아니라 삶의 곳곳에서 은밀하고 교묘하게 일어난 교육이었으므로 나는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고쳐나갈 능력이 없었다.

성역할 고정관념의 내면화는 이처럼 잠재적이며, 이를 반박할 만한 비판적인 지성이 형성되기 전에 고착화된다는 점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다.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분화된 규범을 마치 자연적이고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탐색하기 전에 이미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단단한 이분법적 범주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 아무리 명시적으로 남녀평등에 대해 배우더라도, 공공의 교육과정이 주입하는 위계적인 성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 자신의 역량을 펼쳐나가기는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위해 4단 도시락을 싸는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의 한 장면.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위해 4단 도시락을 싸는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의 한 장면.

이러한 현실에서 학교는 학생들이 특정 성별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사고하는 개인으로 발달하고 성장하도록 미디어, 가정, 광고 등의 성역할 강요와 억압에서 자유로운 곳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 나아가 성차별과 성역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고능력을 키우고 잘못된 관행과 악습을 끊어내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는 그런 역할을 해낼 역량이 없다. 오히려 위계적인 성별 이분법과 사회적인 성별화를 훨씬 더 공고하게 내면화하는 데 충실히 기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는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성평등한 공간이다. 여학생이라고 해서 입학을 제한당하거나 남학생이라고 해서 더 좋은 성적을 받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룰에 따라 경쟁하며 명시적으로는 평등과 인권의 가치를 교육받는다. 학교는 직업적으로 보아도 여성노동자의 차별이 비교적 적은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초등학교는 우리 사회의 몇 안되는 정규직 여초 직장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존중되는 편이며, 구성원 간의 수직적인 위계가 덜하여 권력에 의한 성폭력의 발생빈도도 다른 직업군에 비해 적은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평등한 학교’는 역설적으로 학교가 성차별 및 여성혐오 이슈에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무관심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우리 사회가 성평등을 이루었다고 믿는 만큼,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갖은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무관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의 젠더감수성을 무디게 하는 원인인 교직의 여초현상이 사실은 우리 사회 성차별의 지표라는 사실도 역설적이다. 여성에게 가사 및 육아 등의 재생산노동이 전가되지 않고, 직장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는 다양한 직업이 보장되는 사회라면 교직에 여성이 몰릴 이유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여아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직업의 여성 롤모델을 접할 가능성이 적고, 그나마 직업을 가진 여성 롤모델로 가장 많이 접하는 교사를 일찌감치 진로로 선택하거나 혹은 강요받기도 한다. 교과교육의 전문성이 발휘되는 중·고등 교사에 비해, 돌봄의 역할이 강조되는 유치원이나 초등교사에 여성의 비율이 높은 현상 역시 돌봄노동을 남성보다 여성의 역할로 인식하는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성평등하다고 느껴지는 학교라는 공간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과 여성혐오의 현실을 직면하고 교육적 대안을 세우는 대신, 오히려 성평등이라는 당위만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며 현실을 왜곡한다. 현실과 무관하게 당위만을 가르치는 교육은 무력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성차별을 은폐하고, 성차별적 경험에 질문과 의심을 품지 못하는 시민을 길러내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학교를 떠나, 불평등한 결혼제도에서 며느리나 모성의 역할을 과도하게 요구받거나 직업적 차별을 겪은 후에야 여성의 약자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자각하고 질문하도록 하는 데에 학교 교육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젠더 무감성의 학교와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 안에서 교사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늘 고민한다. 학교가 바뀌고 사회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내가 하는 실천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무력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 교육이 당장에 학교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만으로는 어렵고 힘든 실천을 꾸준히 이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당당한 발걸음만으로도 나에게 큰 배움을 주었던 어린 시절의 한 여성을 떠올리며, 페미니즘을 통해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자유롭고 주체적인 롤모델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상상한다. 더 당당하게 걷고 더 자유롭게 학생들과 만날 것이다. 페미니스트 교사가 많아진다는 것은, 낡고 억압적인 성 이분법의 규범에서 자유로운 어른을 아이들이 학교에서 한 명이라도 더 만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며, 그런 경험은 어떤 훌륭한 수업보다 좋은 교육이 될 거라고 믿는다.



[최현희 교사의 학교에 페미니즘을]보는 것만으로도 배운다, 그녀의 당당한 발걸음을 내가 보고 배웠듯이


필자 최현희

13년차 초등교사. 좋은 교사가 되려고 노력하던 중에 페미니즘을 만나버렸다. 페미니스트가 되기 전에는 스스로 꽤 좋은 교사라고 믿었으나,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로 다시 바라본 교실과 학교는 좋은 교사에 대한 고민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했다. 페미니즘으로 직업과 일상이 고단해졌지만 고민하고 실천하는 삶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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