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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만나야 할 이도 가야할 곳도 없는 이곳… 그럼에도 누군가를 위해 내 시간을 나누는 이유

2018.02.09 17:18 입력 2018.02.09 17:22 수정
이우일·선현경

선현경의 ‘잠시멈춤’

1년 만에 방문한 서울. 오랜 만에 보는 식구들을 위해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모두들 와줘서 고맙다고 한다. 그래. 누군가를 위해 절대적인 시간을 할애하는일, 그게 사랑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구나.하와이로 돌아와 몸이 불편하신 친구 어머니를 위해 요가 수업을 해드리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내 시간을 누군가에게 나눠주며 귀찮고 싶었다.좋아하시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행복해진다. 그래. 이러려고 사는 거다. 마음 다해 시간을 할애할 누군가가 있기에.

일러스트 | 이우일

일러스트 | 이우일

하루는 더디 가는데 일주일은 훌쩍 지나간다. 따져보니 이곳으로 옮겨 온 지도 벌써 석 달이 넘었다. 떠도는 삶이라 그런 걸까? 만나야만 할 사람도, 꼭 가야 할 곳도 없는 심심한 하루가 느리게 가는데 밖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집 앞에는 야자수가 흔들거리고 파란 하늘에는 커다란 무지개가 또렷하다. 무지개 색이 너무 선명해 촌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노숙인이 담요를 몸에 감고 질질 끌며 걷는 폼이 슈퍼히어로의 뒷모습처럼 비장해 보인다. 그와 함께 걷다보면 바다가 보인다. 서울에선 언제나 추웠을 2월이다. 바다를 석 달째 보고 있는데도 볼 때마다 비현실적이다. 그제야 우리가 하와이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거대한 바다를 보며 현실감을 찾고 있다니. 지금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게 맞기는 맞구나.

그런 내게 꼭 만나야만 할 사람이 생겼다. 작년 가을 서울에서 남동생이 수술을 했다. 하와이로의 이사를 결심하고 짐을 싸던 중이었다. 살다보면 언제나 주변의 누군가는 아프고, 수술을 했다. 삶은 그런 거라고 받아들이며 살자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갑자기 전해 온 동생 소식은 충격이었다. 막상 내게 닥치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내 마음은 심하게 흔들렸다. 안 가던 포틀랜드의 성당까지 찾아가 영어로 전혀 와 닿지 않는 미사를 보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잘 알던 익숙한 길을 걷다 만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뺨을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황스럽고 무서웠으며 정신이 얼얼했다.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잘되었다. 앞으로의 치료가 더 중요하긴 하지만 일단 수술은 잘되었다. 안심이었다. 당장 달려가 보고 싶었지만 낯선 곳에서 새 삶을 꾸리다보니 타이밍을 놓쳤다. 수술은 이미 끝났고 치료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간다고 도움이 되는 일도, 달라지는 일도 없다. 여기서 몸에 좋은 약이나 사 보내는 게 좋겠다 싶었다. 보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동생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믿고 살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가 그렇게 바쁘냐며 내 형편을 물어왔다. 엄마랑은 가까이 주변 동네에서 삼십년을 넘게 살았다. 막상 큰일이 닥쳤는데 마음을 나눌 큰딸이 없으니 많이 힘드셨나 보다. 하와이에서 당분간 지낼 집도 구했고 자잘한 일처리도 끝났다. 혼자 잠깐 다녀오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래. 가자. 바로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았다.

하던 작업이 있어서 흐름이 끊기는 게 부담스럽기는 했다. 동화책을 만들고 있는데, 글과 스케치가 정리되어 그림을 막 시작한 시점이었다. 요번 이사로 계획보다 많이 늦춰져버린 일정 탓에 속도를 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림을 같은 호흡으로 그리고 싶었다. 동화책 작업을 끝낸 뒤 그림 원화를 들고 가면 어떨까 하는 이기적인 생각도 들었다. 하와이에서는 한국으로의 택배가 터무니없이 비싸다. 한국으로 곧바로 가지 못하고 무조건 본토를 거쳐야만 하는 규정 때문이다. 그 탓에 하와이에서 보내는 우편요금은 포틀랜드의 두 배가 넘는다. 서울까지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는데 빙 돌아가야 하니 비용이 더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번 한국으로의 여행 목적은 엄마와 동생을 만나는 일이다. 모처럼 시간을 빼서 가려고 마음먹었는데 지나다가 들르는 식으로 비치는 건 싫었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럼 동생이 씻은 듯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하던 일은 모두 미루고 다녀오기로 했다.

짐을 싸다보니 내게 겨울옷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들 이번 서울의 한파로 어마어마하게 춥다고 난리던데 내가 가진 옷이라곤 얇은 초경량 오리털 점퍼 하나다. 고작 일주일이니 가서 엄마 옷을 빌려 입기로 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 년 만에 가는 서울인데 몸에 잘 맞지도 않을 칠십대의 엄마 옷을 얻어 입고 돌아다니겠구나. 식구들을 만나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동네 친구들만 보고 올 예정이다. 서울에 도착하니 생각만큼 춥지는 않았다. 다행히 내가 머무는 동안엔 큰 추위가 없어 엄마 옷을 입어볼 찬스는 누리지 못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영하 15도를 왔다 갔다 했다던데 거짓말처럼 따뜻한 날씨였다. 대신 어마어마한 미세먼지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하늘이 노래져서 건물들이 뿌옇게 보일 정도였다.

서울에 가서 엄마와 동생 얼굴을 직접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반가웠다. 만나자마자 썰렁한 농담으로 시작하는 우리 집 식구들. 너무 까맣게 타서 흑인 같다는 엄마의 말도, 머리는 왜 그렇게 짧게 잘라 사나워 보이냐는 동생의 말도 칭찬처럼 마냥 기분이 좋았다.

서울에서 내가 식구들을 위해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 때문에 모두들 더 귀찮기만 했다. 간만에 왔다고 모든 식구들이 모여 밥을 먹어야 했고, 늦게까지 올케와 수다를 떨어 아픈 동생을 쉬지도 못하게 했다. 아픈 동생은 밤늦게 내가 묵고 있는 엄마 집으로 데려다주기까지 했고,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엄마는 날 기다리느라 잠도 잘 못 주무셨다. 민폐만 끼친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동생이 웃으며 말했다. 와 줘서 고맙다고. 엄마와 다른 식구들도 말했다. 잘 왔다고.

모처럼 사람구실을 한 기분이 들었다. 전화로 격려의 말을 하고 몸에 좋다는 약을 보내는 일보다 만나서 수다나 떠는 일이 더 뿌듯하다니. 누군가를 위해 절대적인 시간을 할애하는 일. 사랑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구나.

호놀룰루 공항에 내려 집으로 가는데 여전히 낯설었다. 나는 집에 도착한 것일까? 이곳에 고양이와 남편이 머무르는 집이 있으니 그럼 나는 집으로 돌아온 건가? 어디에서도 안정감은 없다. 언젠가는 끝이 날 생활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집이 없으니 어디나 집이 될 수 있다.

며칠 전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내가 떠나자마자 서울의 날씨가 다시 추워졌다고 한다. 수도도 보일러도 한강까지 얼어버렸다고 했다. 엄마는 그런 추위에 인천에 있는 병원을 가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외삼촌이 입원하셔서 병문안을 가야 한다고 했다. 역시 한국에서는 언제나 해야만 할 일들이 생긴다. 찾아봐야 할 사람도 많고 꼭 가봐야 할 곳도 많다. 그런 엄마에게 힘들고 고생스러워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엄마가 웃으며 이야기하신다.

“그래. 힘들고 귀찮지. 하지만 왜 살아? 그러려고 사는 거지!”

며칠 전 하와이에서 친구를 만났다. 미국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친구인데, 부모님이 이곳에 살고 계셔 만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 어머니 몸이 많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이 불편하니 외출도 점점 안 하시고 요즘은 사람들 만나기도 꺼리신다며 고민했다. 자식들이 다들 하와이에서 멀리 살기에 자주 못 뵈니 더 걱정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문득 생각이 났다.

일주일에 한번 집으로 찾아가 요가 수업을 하면 어떨지를 물었다. 집도 멀지 않고 일주일에 한번이라면 부담도 없다. 몸이 아프시니 최대한 스트레칭 위주로만 할 예정이니 꼭 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나도 이렇게 먼저 내 입으로 잘 모르는 사람을 가르치겠다고 말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우리의 이곳 생활이 그리 긴 게 아니라 선뜻 해 보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일 년이라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 끝이 있으니 해 볼 수 있다. 점점 외출도 안 하신다니 가끔 찾아가는 일이 어머니에게도 활력이 될 거라 믿었다. 무엇보다도 내 시간을 누군가에게 나눠주며 귀찮고 싶었다.

마음이 통했는지 허락해주셔서 매주 한번 시간을 정해 가게 되었다. 내심 좋아하시고 열심히 하신다. 하고 나면 몸에 피가 도는 것 같다며 아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요가를 끝내고 수다도 떨고 오는데 내가 치료받고 오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지난주에는 공교롭게도 몹시 기분이 상한 날 요가 수업을 가게 되었는데, 수업 후 수다까지 떨었더니 팍팍했던 마음이 스르르 정리가 되었다. 집으로 걸어오는데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엄마 말대로 이러려고 사는 거다. 마음을 다해 시간을 할애할 누군가가 있기에.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거다.

이우일·선현경 부부는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다. 이우일은 <콜렉터> <좋은 여행> <굿바이 알라딘> 등을 쓰고 그렸으며 <노빈손 시리즈>와 <용선생 한국사>의 그림 작가다. 선현경은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 <가족 관찰기>를 쓰고 그렸으며 <이모의 결혼식> <엄마의 여행가방> 등 동화를 냈다. 지난 2년 동안 미국 포틀랜드에서 딸, 고양이와 함께 쓰고 그리며 살다가 최근 하와이 오아후섬으로 터전을 옮겼다.

[다른 삶]꼭 만나야 할 이도 가야할 곳도 없는 이곳… 그럼에도 누군가를 위해 내 시간을 나누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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