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디자이너, 자유로운 노동에 대한 갈망이 만든 판타지

2018.02.14 19:11 입력 2018.02.14 19:17 수정

디자이너의 사회학

영화 <그대안의 블루>(1992년)

영화 <그대안의 블루>(1992년)

그대 안의 디자이너

“결혼식장을 뛰쳐나온 유림(강수연)은 거추장스러운 웨딩드레스 자락을 과감하게 잘라낸다. 디스플레이 디자이너인 호석(안성기)은 이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고,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호석의 제안으로 작업 동료가 된다. 유림은 호석과의 관계에서 일과 사랑 모두 완벽하고자 노력한다.”

개봉 당시 자신의 일을 하는 당당한 여자 주인공을 그렸다고 해서 페미니즘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대안의 블루>(1992년)의 도입부이다. 영화에서 안성기와 강수연은 디자이너인데, 둘은 스승과 도제 사이에 가까우며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유지한다. 물론 둘 사이에 묘한 감정이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안성기는 이를 철저히 외면한다. 심지어 그는 가끔 어떤 여성과 전화로 약속하고 만나서 관계(밀회?)를 가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경우에 안성기와 강수연 사이에 러브라인이 깔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감독은 정반대의 연출을 통해서 멜로드라마의 빤한 공식에 빠지지 않고 디자이너의 투철한 프로의식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현승 감독 자신이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디자이너가 만든 디자이너 영화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영화가 진짜로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과 사랑? 디자이너의 삶? 물론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노동’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유로운 노동에 대한 판타지’이다.

영화 속의 남녀 주인공들은 강박적일 정도로 일과 사랑을 분리하고 전자를 위해서 후자를 희생시킨다. 이들은 일과 사랑의 통념을 전도시킨다. 통상 멜로물에는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남녀 주인공들이 등장하지만 사실 일은 배경일 뿐이고 연애만 죽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문법을 뒤집음으로써 신세대의 주체적이고 쿨한(?) 면을 보여주려고 하는 듯하다. 안성기는 마치 일(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에로틱한 것이고, 정작 섹스(전화로 만나는 여자)는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디자이너라면 마치 그러하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은 일찍이 미국의 문화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한 SF 영화에 나오는 괴짜 과학자의 그것과 닮아 보인다.

“여기에서 신비성이란 외적인 권위나 사회적 기능보다는 과학자 자신의 생활방식에 대한 일종의 집단적인 ‘통속적 꿈’을 가리킨다. 과학자는 실제적인 일을 하지 않으며(그럼에도 권력과 사회적 지위는 그의 것이고), 그의 보수도 돈이 아니거나 혹은 적어도 돈이 목적이 아닌 것 같으며, 그의 실험실(공장과 진료소를 결합시킨 듯하며 기관의 규모로까지 확대된 가내 작업장)과 밤에 일한다는 점(그는 하루의 일과나 8시간 근무제에 얽매이지 않는다)에는 뭔가 매력적인 면이 있으며, 바로 그의 지적 작업 자체는 비지식인들이 지적 작업과 공부에 대해 상상하는 모습의 희화(戱畵)이다.” (<마르크스주의와 형식>)

그러니까 프레드릭 제임슨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영화 <그대안의 블루>는 대중이 디자이너에 대해 상상하는 모습의 희화인 것이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매력적인) 미장센은 파르스름한 조명이 비치는 지하 스튜디오에서 두 사람이 일하는 모습이다. 영화 제목 속 ‘블루’라는 말 자체가 ‘쿨’과 함께 당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일찍이 1960년대에 마셜 매클루언이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쿨’이 ‘핫’보다 더 핫하게 받아들여진다고 언명한 바 있고,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는 19세기 말에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에서 이미 짙은 서정성을 부여한 바 있는, 그리고 1970년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완벽하게 환상적인 이미지를 획득한 단어 ‘블루’야말로 어쩌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이미지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세계는 자유로운 노동, 소외되지 않은 노동, 노동이라는 이름의 자유, 자유라는 이름의 노동의 영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디자이너는 오로지 이러한 노동의 인격적 구현체로서 호출된 존재일 뿐이다. ‘X세대’가 부상하던 1990년대 초는 디자이너의 몸값이 한창 치솟을 때였다. 디자이너 출신이 만든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광고라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그대안의 블루>는 이런 시대에, 소외되지 않은 노동에 대한 대중의 판타지를 디자이너라는 페르소나에게 투사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중은 디자이너를 통해서, 이전이라면 예술가를 통해서 얻었을 자유로운 영혼과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주체라는 기호를 소비했던 것이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가였던 것이다.

디자인의 생산과정과 디자이너의 위상

디자인은 산업사회의 조형적 실천이다. 산업사회에서 대량생산되는 제품과 이미지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분업 노동의 한 형태이다. 디자인의 발생 자체가 노동 분업의 결과이다. 산업사회 이전에는 원칙적으로 한 사람의 장인이 생산과정 전체를 담당했다. 이를 유기적 노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는 생산과정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고, 여러 사람과 과정에 의해 분절될 수밖에 없다. 디자인은 바로 이러한 산업사회의 분업 시스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조형적 행위인 것이다.

디자인의 생산과정은 크게 사회적 과정과 기업적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적 과정이란 사회적 생산-소비라는 커다란 순환 속에서 디자인을 보는 것이다. 이때 디자인의 생산자는 비인격적으로는 사회 자체이며, 인격적으로는 사회 구성원 전체이다. 그러므로 디자인의 사회적 생산과정에는 한 사회의 가치관, 이데올로기, 취향 등이 기본 요소로 작용한다. 디자인을 사회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때는 이러한 거시 구조를 관찰해야 한다.

디자인의 기업적 생산과정이란 현대사회의 생산 조직을 대표하는 기업을 단위로 삼는 미시적 구조이다. 오늘날 기업은 제품과 용역의 생산과정에서 디자인을 중요한 요소로 채택한다. 이때 기업이 목표로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생산의 합리성을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제품의 생산과정에서 공정의 단축, 재료의 절감, 에너지 투입의 감소 등을 위해 디자인을 고려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장을 위한 것이다. 기업은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어필하기 위한 매력적 요소이자 비가격 경쟁 요소로서 디자인을 활용한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넓은 의미에서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업적 생산과정에서 디자인은 한편으로는 생산의 합리성을 위한,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 경쟁을 위한 필수적 요소이다.

디자인의 사회적 생산과정은 전 사회 구성원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여기에서 디자인 전문가, 즉 디자이너의 위상은 배타적일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다. 잘해야 취향 선도자(taste leader)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디자인의 기업적 생산과정에서 디자이너의 위상은 핵심적이다. 하지만 독점적이지는 않다. 그러니까 디자인의 기업적 생산과정에는 디자이너만이 아니라 경영자도 참여하는데, 이때 디자이너의 역할은 디자인 제안자(design presenter)이며, 경영자의 위치는 디자인 결정자(design decision maker)이다. 그러므로 디자인의 기업적 생산은 디자이너와 경영자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과정을 지휘·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영자이며, 디자이너는 전문적 스태프로서 참여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디자인 제안자로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경영자는 결국 디자이너의 제안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디자인 선택(design selection)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디자이너에게 달려 있다. 다만 이러한 디자인의 기업적 생산과정에 대한 착오나 오해가 오늘날 디자이너의 직업적인 자기 이해에 장애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디자인 역사가인 에이드리언 포티는 이렇게 지적한다.

“디자이너들이 보통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탓에 디자인은 전적으로 디자이너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고, 그러한 오해는 무수한 서적과 신문의 디자인 섹션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 재생산되었다. 더욱 심각한 결과를 낳은 것은, 디자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디자인 전공학교에서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학생들은 자신이 배운 디자인 기술의 본질에 대해 과장된 환상을 가지고 있다가 결국 직업전선에서 크게 좌절하게 된다.”

(<욕망의 사물, 디자인의 사회사>)

사실 오늘날 많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생산과정에서 자신들이 결정권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불만을 터트리며 경영자의 무지를 탓하곤 한다. 물론 실제로 경영자들의 미적 안목이 형편없는 경우가 많지만, 디자이너가 디자인 결정자여야 한다는 주장은 객관적으로 볼 때 타당하지 않다. 현대적인 생산과정에서 디자인만이 아니라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경영자가 결정한다. 그리고 이것도 디자인의 기업적 생산과정이라는 미시적 구조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앞서 이야기한 디자인의 사회적 생산이라는 거시적 구조로 시선을 옮기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앞에서 예로 든 영화 속의 디자이너 이미지는 이러한 사회적 생산과정을 전제로 해야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만 디자인의 사회적 의미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사회적 이미지와 현실의 간극

지난해 방한한 이집트 출신의 영국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 그의 행동과 명성은 대중적인 스타에 가깝다.

지난해 방한한 이집트 출신의 영국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 그의 행동과 명성은 대중적인 스타에 가깝다.

물론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 그려진 디자이너 이미지와 디자이너의 실제 현실은 일치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대로, 대중매체 속의 디자이너 이미지란 자유로운 노동을 갈망하는 대중이 디자이너라는 역할 모델에게 그러한 판타지를 투사한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사회 속에서의 디자이너의 이미지와 현실의 불일치일 뿐 아니라 대중의 사회적 의식과 실제 삶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결국 디자이너에 대한 판타지는 노동의 현실을 거꾸로 보여줄 뿐이다. 이는 일찍이 마르크스가 비록 종교 자체는 거짓이지만,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염원하는 방식으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회 구조와 의식은 디자이너를 하나의 이상적인 노동자로 제시하게 되며, 이에 대해 디자인계는 스타 디자이너 담론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간극 또한 오늘날 한국 디자인 풍경의 일부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필자 최범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디자인 평론가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출판·전시·공공 부문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 국내 유일의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 편집인이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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