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올림픽’이 되려면

2018.02.19 20:44 입력 2018.02.19 20:45 수정

[정윤수의 오프사이드]‘역사적 올림픽’이 되려면

평창 동계올림픽은 ‘역사적’인 의미를 획득할 것인가. 폐회식까지는 며칠 더 남아있기 때문에 이 ‘역사적’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한정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를 걸고 싶다. 특정 국가 올림픽을 통하여 그 이전과 이후를 완전히 가르는 새 지평을 연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래도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이나 2012년의 런던 올림픽은 세계가 일본과 영국을 어떤 식으로든 달리 보게 만든 사건으로 기록된다.

[정윤수의 오프사이드]‘역사적 올림픽’이 되려면

우리의 기억도 선명하다. 88서울 올림픽과 2002 월드컵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규모 이벤트를 치르기 전과 후로 한국 사회를 일정하게 판별해 볼 수 있었다. 거대한 중산층 문화의 형성과 새로운 세대의 활기찬 등장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평창 올림픽도 그러한 분기점으로 기억될 것인가. 숱한 논란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난 9일 이후 수많은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과 그 이상의 사람들이 열렬히 터트린 함성의 무게를 직관적으로 판단하건대 88이나 2002만큼은 아니어도 2018이라는 숫자 역시 우리 사회의 새로운 분기점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세계적인 잔치를 어렵사리 잘 마무리했다는 판단을 서둘러 내리기보다는 좀 더 냉정하게 이번 올림픽 과정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집합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요컨대 이번 올림픽이 정치적으로 악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사실 나는 이 질문을, 올림픽 개막 전, 어느 외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받은 적 있다. 그 기자는, 남북 단일팀 및 북측 응원단의 참가 등에 대한 국내 일부 여론을 거론하면서, 순수한 올림픽을 정치에 이용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단호히 반대했다. 도구적 차원의 기술 수단으로서 정치라면 그런 면이 있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더 절박하다고 말했다. 소설가 한강은 지난해 추석 연휴 때 ‘뉴욕타임스’에 우리의 상황을 기고한 바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실험하고 미국이 북한을 선제 타격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와도 우리가 평온한 듯 고요하게 일상을 유지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고요는 전쟁의 공포를 극복해서가 아니라 수십년 동안 축적된 긴장과 공포가 우리 안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렇게 고요한 긴장, 그러나 속으로 멍들어가는 팽팽한 불안 속에서 올림픽이 개막되었으니 한번쯤은 그 긴장을 풀고 ‘평화’를 외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 유명한 나치 올림픽이나, 전범 국가가 패전 희생자 코스프레하는 도쿄 올림픽이나 강력한 군사력과 극단적 이념 대결을 펼친 모스크바와 LA 올림픽, 대국굴기 중화주의의 베이징 올림픽과 차르 푸틴의 대유라시아 퍼포먼스인 소치 올림픽과 비교할 때, 일단 잠시라도 군사적 긴장을 늦추고 대화를 해보자는 이번 올림픽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일단 북·미 간 군사 행동을 쌍중단하고, 여러 채널을 가동하여 올림픽 이후에도 긴장보다는 대화의 물꼬를 트자는 것은 단순한 외교가 아니라 거의 절박한 몸부림이다. 한 사회의 복합적인 갈등을 헤아리지 않고, ‘순수한 스포츠’라는 기계로 납작하게 눌러서,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 또는 악용한다는 의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북한을 이롭게 한다고? 그런 의견도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 북한이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일관되게 보여준 일방통행식 행동을 보면 그러한 의견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일팀을 비롯한 거의 모든 대화와 협상이 불발에 그쳤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연일 극우 언론이나 일부 고약한 인터넷 여론은 긴장과 파국을 노래하고 북한도 때마침 그들의 건군절에 미사일 열병식을 위협적으로 치르고 미국 또한 이른바 ‘코피 터트리기’ 전술을 당장이라도 벌이겠다는 식으로 사태가 전개되었을 경우를 상상해보자.

아니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몇 해 동안 늘 겪은 일상이다. 그 일상화된 긴장, 내면화된 대립, 언제든지 군사적 충돌이 벌어져도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니었냐며 체념할 수밖에 없던 상태에서 올림픽 개회식을 치렀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최민정의 시원한 질주나 이상화의 눈물을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침 설날 아침에 윤성빈 선수가 금메달을 땄는데, 만약 동북아를 둘러싼 모든 군사적 언어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중이었다면 설날의 금메달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 어딘가에는 실질적인 공포와 불안의 냉기가 일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올림픽 이후, 동북아 상황은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고 한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지만 설령 그 가능성이 높다 해서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단일팀 같은 이벤트 한두 번으로 평화가 오겠냐고 한다. 당연히, 한두 번의 스포츠 이벤트로 무슨 평화가 오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위하여 동북아의 정치, 군사, 외교의 모든 채널이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돌아간다.

수면 아래의 수많은 채널이 가동된 결과 지난 18일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북핵 해결을 외교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당신(북한)이 나에게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기를 귀 기울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포츠에 내재된 힘이 어떤 변화된 감수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스포츠에 내재된 미와 힘이 수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일들이 신중하게, 그러나 중단 없이 시도되어 훗날 북한 선수단이 내려오는 게 단신 뉴스가 될 만큼 자연스러워지기를 나는 상상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의 우리 일상은 긴장 속의 안정이 아니라 진실로 평화로운 안정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하여 다시 강조하건대, 이번 올림픽은 ‘평양올림픽’이 아니며 ‘종북올림픽’이 아니다. ‘종남올림픽’이며 ‘평화올림픽’이다. 진실로 그렇게 될 경우 2018평창 올림픽은 88서울 올림픽이나 2002 월드컵 이상의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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