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개입한 러시아 댓글부대, 호시탐탐 ‘워싱턴 흔들기’

2018.02.23 16:55 입력 2018.02.23 17:06 수정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예브게니 빅토로비치 프리고진(56). 공교롭게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동갑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의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재벌)이다. 한때 스키선수를 꿈꿨지만 10대 후반부터 20대의 대부분을 절도와 강탈, 사기로 징역을 살았다. 유형에서 풀려난 1990년 시작한 핫도그 체인점 사업이 성공하면서 첫 번째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식료품 체인점 콘트라스트가 다시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스트라야 타모쥐냐’라는 고급 레스토랑을 열었다. 내친김에 바트카강에 선상 레스토랑 ‘뉴 아일랜드’를 띄웠다. 옛소련 붕괴와 시장경제 이행기의 혹독한 시절이었다. 그때 단골 중 한 명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상트를 방문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2001년)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2002년)을 각각 뉴 아일랜드에 초대했다. 대통령 취임식 역시 프리고진의 콩코드 케이터링이 맡았다. 러시아 언론이 그를 ‘푸틴의 요리사(chef)’로 부르는 까닭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선거캠프와 러시아 측의 관계를 수사하고 있는 미국 법무부의 로버트 뮬러 특검이 연방수사국( FBI) 국장이던 2013년 6월13일 하원 법사위 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워싱턴 | 로이터연합뉴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선거캠프와 러시아 측의 관계를 수사하고 있는 미국 법무부의 로버트 뮬러 특검이 연방수사국( FBI) 국장이던 2013년 6월13일 하원 법사위 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워싱턴 | 로이터연합뉴스

권위주의 국가에서 1인자와의 관계는 성공의 보증수표다. 프리고진은 이후 러시아 군대와 학교 등에 대규모 관급계약을 따내는 케이터링 사업으로 덩치를 키웠다.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성공 이야기다. 푸틴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활동영역을 해외로 넓혀왔다. 내전 중인 시리아에 수천명의 용병을 파견, 유전을 보호하고 원유수입의 일부를 보장받는 사업을 시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온라인 댓글부대(troll) 사업은 우연한 계기에 시작했다. 모스크바 공립학교에 점심을 제공하는 사업을 하던 2011년 음식이 상하자 학부모들 사이에서 업체를 바꾸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위기였다. 프리고진은 젊은 남녀 블로거를 댓글부대로 고용해 온라인상에 떠돌던 불리한 여론을 단 몇 분 만에 돌려놓았다. 인터넷상에 콩코드 케이터링의 음식을 칭찬하는 글과 댓글을 무더기로 포스팅, 비난하는 글들을 묻어버렸다. 프리고진은 이후 상트 시내에 인터넷리서치에이전시(IRA)를 설립, 관급계약의 수입 일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관급계약을 받는 대신 정부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해온 것이다.

■뮬러 특검, 러시아 댓글부대(troll)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확인

베일에 싸인 푸틴의 요리사가 국제적인 초점을 다시 받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선캠프의 러시아 커넥션을 수사하고 있는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가 지난 16일(현지시간) IRA를 비롯한 러시아 업체 3곳과 러시아인 13명을 2016년 대선 개입 혐의로 정식 기소하면서부터다. 물론 프리고진도 기소했다. 특검은 이들이 2014년부터 IRA를 거점으로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미국 소셜미디어(SNS)에 침입해 미국 정치시스템에 불화의 씨를 뿌려왔다고 발표했다. 로드 로즌스타인 법무부 차관은 “음모 가담자들이 원했던 것은 미국 사회의 불화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공신력 훼손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소셜미디어상에 미국인 신분을 도용해 가짜 계정을 만들거나 자동증식 프로그램인 ‘봇(bots)’을 심어 놓고, 주요 이슈에서 미국 사회의 분열을 극대화해왔다. 인종과 불법이민, 총기판매 등 고질적인 이슈는 물론 미식축구 선수들의 무릎 꿇기 시위 등 돌출 이슈에도 적극 달려들었다. 대선에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낙선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당선이 목적이었다.

미국인 신분으로 페이팔 계정을 만들고 대선 기간 클린턴을 공격하거나 트럼프를 띄워주기 위한 정치광고 13건의 대금을 지불했다. 주·야간으로 팀을 나눠 수백개의 소셜미디어에 거짓 메시지를 흘렸다. ‘#힐러리 클린턴은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 ‘힐러리는 사탄이다’ 등의 문구를 살포한 것이다. 특히 테네시주 공화당을 가장해서 만든 트위터 계정(@TEN.GOP)은 10만명의 팔로워를 갖고 있다. 한 달 운영비용이 125만달러에 달했다. IRA에서는 그래픽과 데이터 분석, 정보기술 등을 전담하는 그룹도 포함됐다. 필요하면 오프라인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러시아 댓글부대는 텍사스주의 풀뿌리 보수단체의 충고를 따라 지지정당이 자주 바뀌는 콜로라도와 버지니아, 플로리다 등 스윙스테이트에 집중하기 위해 미국 출장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곳곳에서 친트럼프, 반클린턴 집회를 열었다. 특검이 밝힌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2016년 5월 말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한 미국인으로 하여금 ‘보스(boss)의 55세 생일을 축하한다’는 푯말을 들고 서 있게 한 것이다. 특검은 오바마 전 대통령의 생일이 8월인 만큼 프리고진의 생일(6월1일)을 축하하는 메시지였다고 해석했다. 특검의 추정이 맞다면 워싱턴 한복판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통렬하게 우롱한 한 편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프리고진은 특검의 기소 뒤 러시아 리아 노보스티 통신에 “미국인들은 매우 감상적이어서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들이 악마를 보고 싶어한다면 보게 하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푸틴의 요리사’로 불리는 예브게니 프리고진(왼쪽)이 모스크바 외곽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을 찾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  2011년 11월11일의 자료사진이다. 입맛으로 푸틴의 마음을 산 프리고진은 각종 관급계약으로 신흥재벌이 됐다.  모스크바 | AP 연합뉴스

‘푸틴의 요리사’로 불리는 예브게니 프리고진(왼쪽)이 모스크바 외곽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을 찾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 2011년 11월11일의 자료사진이다. 입맛으로 푸틴의 마음을 산 프리고진은 각종 관급계약으로 신흥재벌이 됐다. 모스크바 | AP 연합뉴스

■푸틴의 저주인가? 최대 피해는 미국 민주주의

인터넷이 여론의 주요 통로가 되면서 권위주의 국가에서 관제 댓글부대를 동원해 여론 조작에 나선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러시아는 1990년대 말부터 시작한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 우마오당(五毛당)은 국내 SNS 포스팅 178건당 1건꼴로 관제 포스팅 또는 댓글을 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버드대 개리킹 박사팀의 2013~2014년 연구 결과 연간 4억8800만개의 정보 옹호 포스팅을 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2013년 미국 프리덤하우스는 22개국에서 친정부 성향의 댓글부대를 운영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우마오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경우 정부에 대한 찬사와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러시아 댓글부대는 미국 선거 개입은 물론, 궁극적으로 미국 사회의 분열과 미국 민주주의의 파멸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미국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댄 코츠 국가정보국장(DNI)은 지난 13일 상원 정보위의 연례 위협평가 청문회에서 “러시아는 계속 선전과 소셜미디어, 가짜인물 등의 수단을 동원해 미국의 사회적·정치적 분열을 악화시키려고 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올해 11월 미국 중간선거는 물론 유럽 각국의 선거에 반드시 개입할 것으로 분석됐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왜 서구, 특히 미국 사회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을까.

이와 관련해 뮬러 특검의 기소장이 밝힌 대로 러시아 댓글부대의 활동이 시작된 2014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무력개입했던 시점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해 3월 서방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배제하면서 그 이유로 러시아는 미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우려가 없는 ‘지역강국(regional power)’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초강대국(super power)이 아니란 말이었다. 이후 푸틴은 물론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비난하는 등 국제적 논란을 야기했던 발언이다. 크림반도 병합과 미국의 제재 이후 미·러 관계는 복원되지 않고 있다. 푸틴이 미국 SNS에 제2의 전선을 구축할 만한 이유는 충분했을 것 같다.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외국 선거 개입과 여론 조작은 그다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 분야의 챔피언도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다. 중앙정보국(CIA) 요원을 파견해 우호적인 외국지도자를 당선시키기 위해 돈 보따리를 배달하거나 특정 후보의 스캔들을 폭로하는 것은 물론 민주언론과 정당을 지원해왔다. 러시아 댓글부대는 미국이 오프라인에서 했던 공작을 온라인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또 CIA가 연방예산으로 실행한 작전을 프리고진과 같은 민간인, 민간기업을 활용하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그럼에도 댓글부대는 종래의 지정학적 현실정치에서 행해졌던 외국선거 개입과는 사뭇 결을 달리한다.

■미국 사회가 최종 분열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봇’

자국에 유리한 정치인을 당선시키려는 목적은 같지만, 사회 자체를 분열시킨다는 점에서 폐해의 범위와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댓글부대의 ‘봇’은 한 사회에서 의견이 갈라지는 지점을 포착해 달려들도록 프로그램화돼 있다. 중간선거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러시아 댓글부대는 지난주 플로리다주 고교 총격사건 역시 먹잇감으로 삼고 있음이 드러났다. 총기소지 찬·반 양론을 각각 극단으로 몰고 간 뒤 결국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래야 언론과 정당, 선거 등 민주주의 기성제도에 대한 좌절이 깊어져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풍토가 조성되기 때문이다. 바로 포퓰리즘이 만개할 토양이자, 제2·제3의 트럼프가 등장할 최적의 조건이다.

푸틴의 저주가 설치해놓은 러시아 댓글부대로 인해 미국 사회와 미국 민주주의는 물론, 트럼프 행정부 취임 이후 엉뚱하게 유탄을 맞고 있는 세계가 피해를 입고 있는 셈이다. 특검의 이번 기소는 러시아의 대선개입 사실만을 규명했다. 트럼프 대선캠프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물론, 러시아인들의 대선 여론조작이 러시아 정부에 의해 주도된 것인지조차 밝히지 않았다.

트럼프에 대한 직접조사 역시 여전히 협의 중이다. 그 사이 트럼프는 건재하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30%대에 머물던 지지율이 여론조사기관 모닝컨설트와 퀴니피액대학 등 두개 기관의 이번 달 조사 결과 40% 후반대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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