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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름달 품은 달항아리(하)

2018.02.23 17:01 입력 2018.02.23 17:15 수정

도예가의 손으로 화가의 붓끝으로 사진가의 렌즈로 300년 여전히 ‘숨쉬는 달’

그렇게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 후기에 등장, 수십년 만에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우리에게 풀어야 할 숱한 궁금증만 남겨 놓은 채…. 하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명작은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달항아리도 그렇다.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끊임없이 안겨주고 있다. 달항아리만큼 현대적으로 다채롭게 변주되는 문화재도 드물다. 300년 전의 문화재 달항아리가 현대 도자는 물론 회화와 사진, 디자인, 설치미술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한 시대를 응축하고 있는 문화재의 힘은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이렇게 훈향을 풍긴다.

신철 작가 “한마디로 말 할 수 없는 아름다움” 조선 후기의 백자 달항아리는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현대 예술가들에게 끊임 없이 예술적 영감을 안겨주고 있다. 사진은 달항아리를 빚는 신철 작가(58)가 달항아리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합치는 장면이다. 달항아리는 워낙 크다보니 두 부분을 따로 빚어 합체한 뒤 가마 속에서 구워진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신철 작가 “한마디로 말 할 수 없는 아름다움” 조선 후기의 백자 달항아리는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현대 예술가들에게 끊임 없이 예술적 영감을 안겨주고 있다. 사진은 달항아리를 빚는 신철 작가(58)가 달항아리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합치는 장면이다. 달항아리는 워낙 크다보니 두 부분을 따로 빚어 합체한 뒤 가마 속에서 구워진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창덕궁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대로

달항아리는 조선 문예부흥기인 18세기에 집중적으로 빚어졌다. ‘중국풍’을 떨쳐버리고 문학과 미술, 음악 등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조선 고유의 특성을 활짝 꽃피우던 시기다. 지난 글 ‘보름달 품은 달항아리(상)’에서 언급했듯, 아직 우리는 달항아리의 변천 과정, 쓰임새 등을 학술적으로 규명하지 못한 실정이다. 다만 조선만의 유일한 작품으로 최고 수준의 장인이 빚었고, 궁중에서 활용되다 사라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달항아리는 격동의 근대기에 들어서며 한동안 그 가치가 잊혔다. 골동품으로 미학적 차원에서 관심을 끈 것은 일제강점기 들어서다. 특히 야나기 무네요시, 아오야마 지로 등은 1920~1930년대 일본에서 ‘조선 민예품’ 전시를 열어 달항아리 등에 관심을 높였다. 실제 야나기 등과 친분이 있던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는 한국 골동품점에서 달항아리를 구입했고, 1935년 귀국하면서 남긴 “이것을 영국에 가져가는 게 나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란 말은 지금도 자주 언급된다. 현재 영국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이 리치의 그 달항아리다. 영국박물관은 한빛문화재단과 화정박물관 설립자인 화정 한광호 박사(1923~2014)의 기부금으로 이 달항아리를 소장했다.

달항아리를 빚고 있는 신철 작가의 손.

달항아리를 빚고 있는 신철 작가의 손.

해방을 전후해 한국 최초의 미술사가인 고유섭(1905~1944)과 최순우(1916~1984) 등이 한국인의 눈과 가슴으로 한국 미의 토대를 쌓기 시작했다. 특히 당대 문화예술인들의 달항아리를 향한 사랑은 눈에 띈다. 화가 중에서는 도상봉(1902~1977)과 김환기(1913~1974)의 달항아리 예찬, 관련 작품이 이름나 있다. 단아한 정물화로 유명한 도상봉은 호를 ‘도자기의 샘’이란 뜻의 ‘도천(陶泉)’이라 지을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정물’(1954) 등 그의 작품 속 달항아리는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고 담백하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는 “내가 아름다움에 눈뜬 것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정도로 심취했다. 그는 1940년대 작품인 ‘섬 스케치’를 비롯해 ‘항아리와 여인들’(1951), ‘항아리와 매화가지’(1958), ‘항아리’(1950년대) 등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명작을 남겼다. 이밖에 화가·미술평론가인 김용준, 소설가 이태준, 백자수집가이던 시인 김상옥 등이 당대 애호가들이다.

달항아리는 현재 국보 4점, 보물 3점을 포함해 국내외에 20여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순간에도 각 장르에서 거듭나고 있다. 달항아리를 빚는 도예가만도 150여명에 이른다. 백자를 넘어 ‘분청 달항아리’도 빚어질 정도다. 달항아리를 주제·소재로 한 화가와 사진가, 조각가도 많고, 디자이너와 건축가 등도 달항아리에서 창작 아이디어를 얻는다.

<b>달항아리를 사랑한 화가들의 작품</b> 김환기의 ‘섬 스케치’(1940년대·캔버스에 유채·80×99.6㎝) |서울미술관 소장.

달항아리를 사랑한 화가들의 작품 김환기의 ‘섬 스케치’(1940년대·캔버스에 유채·80×99.6㎝) |서울미술관 소장.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대로도 재탄생했다. 성화대 디자이너인 김영세(이노디자인 대표)는 “달항아리는 가장 우아한 한국적 디자인이면서 세계적인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실제 문명비평가인 프랑스의 기 소르망은 국내 특강에서 “달항아리는 어떤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미적·기술적 결정체로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를 정하라면 달항아리를 심벌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달 초 문재인 대통령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에게 달항아리를 선물했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회담 자리에 달항아리가 놓여 눈길을 끌었다. 저명한 저술가 알랭 드 보통은 달항아리를 한국 전통공예의 대표로 꼽고 “단순함, 겸손함, 검소함 등 철학과 실용성이 조화를 이룬다.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서 달항아리를 볼 때마다 ‘착하게 살아라’ ‘단순해져라’ 같은 말을 속삭이는 듯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저서 <영혼의 미술관>에서 달항아리를 소개하며 “보다 나은 자아로 거듭나라는 도덕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달항아리는 쓸모 있는 도구라는 점 외에 겸손의 미덕에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라고 적었다.

달항아리가 근래 선호되는 이유는 이밖에도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정신적 안정과 마음의 휴식을 주고, 미니멀 라이프와도 어울리며,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유용한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달항아리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대.

달항아리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대.

■ ‘달항아리 작가’가 말하는 달항아리

이쯤에서 문화재 달항아리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요즘 달항아리를 살펴볼 만하다. 문화재로서의 달항아리, 현대적 도예작품 달항아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다.

달항아리를 빚는 도예가를 찾았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두드러진 달항아리 작업으로 이름난 신철 작가(58)다. 경기 이천시 신둔면 ‘이천도자예술촌’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에는 장작·가스 가마, 전시장, 마당에는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설치작품까지 있다. 10대 때 도자기에 매료돼 공장을 거쳐 대학, 대학원에서 도예를 공부하고 대학교수도 지낸 그는 이론에도 밝다. 특히 독특한 문양으로 이목을 끄는 고려시대 연리문 청자를 처음 재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달항아리 작업에 매달린 것은 40대 들어서다. “조선 달항아리 아름다움의 정체는 젊은 시절부터 늘 궁금했죠. 40대가 되니 비로소 그 아름다움을 깨우칠, 나만의 현대적 재해석을 할 엄두가 났습니다.” 그는 어깨에 병이 날 정도로 지난 10여년간 달항아리를 빚었다. 흙과 유약, 나무, 가마구조 등을 연구·개발하고, 1000여점의 달항아리를 구우며 실험한 것은 꽤 알려져 있다. 스스로 “나만큼 가마에 불을 때 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자신할 정도다. “넉넉하고 시원하며 소박한 맛으로 대표되는 조선 달항아리에 더해 나만의 ‘당당하고 건강하고 준수한’ ‘어떤 것도 품고 담아내는 넉넉한 품성의 군주(달항아리를 탄생시킨 영조·정조 임금) 마음이 녹아든 항아리’를 빚고자 합니다.” 그는 단원 김홍도의 <병진년 화첩>(보물 782호)에 실린 ‘소림명월도’ 속의 보름달 맛이 나는 항아리를 빚으려 한다.

<b>달항아리를 사랑한 화가들의 작품</b> 도상봉의 ‘정물’(1954년·캔버스에 유채·72.5×90.5㎝)  |서울미술관 소장.

달항아리를 사랑한 화가들의 작품 도상봉의 ‘정물’(1954년·캔버스에 유채·72.5×90.5㎝) |서울미술관 소장.

신 작가를 통해 달항아리 제작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먼저 백자용 흙을 구해 점력과 강도를 높인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현할 좋은 흙을 구하는 게 늘 어려운 문제다. 태토라 부르는 흙이 준비되면 물레 위에서 형태를 빚는다(성형). 달항아리는 워낙 크다보니 물레 위에서 무너지기 때문에 아랫부분, 윗부분을 별도로 성형해 나중에 접합한다. 달항아리의 특징 중 하나다.

성형은 완성품보다 10~20% 크게 만든다. 가마 속에서 축소되기 때문이다. 건조시킨 달항아리는 가마에 넣고 초벌구이한 뒤 유약을 입혀 재벌구이를 한다. 작가가 제조한 유약, 태토의 성분에 따라 유백색, 설백색, 청백색 등 달항아리 특유의 흰색이 나온다. 초벌구이 가마 온도는 800~900도, 재벌구이는 1200~1300도가 일정 시간 유지돼야 한다.

신 작가는 “작업이 쉬운 가스·전기 가마를 많이들 사용하지만 나는 경험상 장작가마의 항아리 맛이 좋다. 장작도 어떤 나무인지에 따라 다른데, 껍질 벗긴 소나무 장작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그도 다른 작가들처럼 “흙과 나무와 물, 바람 등 자연이 돕지 않으면 힘든 작업”이라고 밝혔다. 준비부터 가마에서 완성된 작품을 식힐 때까지 과정마다 세심한 손길, 숱한 작업으로 얻은 경험,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실제 달항아리는 가마 속에서 주저앉거나 깨지는 등 훼손율이 높고, “됐구나” 하고 작가를 흡족시키는 작품은 매우 드물어 전체 작업의 10% 정도다. 현대 달항아리 작품이 1000만원대에서 1억원에 이르는 이유다.

달항아리의 아름다움, 독특한 멋과 맛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지금까지 다양한 분석과 표현이 있었죠. 그것들은 기본으로 하고 개인적 견해를 얘기하면, 굽에서는 당당함이, 전(입)에서는 짜임새가, 소박미는 어깨선에서, 준수함은 불룩한 배에서 굽까지 떨어지는 선의 각도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여기에 전에서 굽에 이르는 선, 굽과 전의 비례, 비대칭 원형의 형태에서 독특한 아름다움이 피어납니다. 색에 따라 따뜻하거나 차고, 부드럽거나 경직되기도 하고….”

작가가 보는 달항아리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 아닐까” 하고 되묻는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생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고, 그때마다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는 뜻으로 들렸다. 아무런 장식 없이 모든 것을 비워낸 달항아리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달항아리가 빚어지는 신 작가의 작업실을 나서면서 문득 ‘버림으로써 얻으리라’는 경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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