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이후, 그 불확실성의 미학

2018.02.27 20:32 입력 2018.02.28 11:56 수정
이대근 논설주간

평창, 잔치는 끝났다. 이방카는 워싱턴으로 돌아갔고 김영철도 평양으로 떠났다. 정성스럽게 모신 손님들이 떠난 자리에는 그들의 달콤한 약속과 반가운 미소, 예의를 차린 은근한 압박, 약간의 무례가 남아 있다. 평화, 정상회담, 북·미대화 용의, 한·미 공조, 최대의 압박을 통한 비핵화. 어지러이 흩어진 낱말들이 말해주는 것은 모호하다.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두 집단이 정해진 순서와 규칙도 없이 낱말을 억지로 한 바구니에 담아봤자 의미를 알 수 없다. 하나의 문맥 안에서 질서 있게 자리 잡지 않는 한 낱말과 낱말은 연결되지 않고 소통되지 않을 것이다.

[이대근 칼럼]평창 이후, 그 불확실성의 미학

우주 공간에서 두 개의 우주선을 연결하려면 랑데부-도킹의 2단계를 거쳐야 한다. 랑데부는 두 우주선이 접근해 같은 속도로 나는 걸 말한다. 회전 운동을 하며 총알의 열 배 넘는 속도로 비행하는 두 우주선을 같은 속도로 맞추는 건 고난도 작업이다. 두 우주선은 나란히 간격을 유지하며 날다 점차 거리를 좁혀 종이 한 장 차이까지 간격을 줄여야 한다. 도킹 때도 두 도킹 장치가 서로 잘 맞물리도록 위치와 방향을 미세 조정해야 한다. 한 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우주선이 파괴되거나 다른 우주로 사라져 영영 이별이다.

한국은 북·미라는 우주선을 우주 공간의 한 점에서 도킹시키려 한다. 남북대화와 한·미 공조라는 두 엔진을 장착한 뒤 북·미대화를 유도하면서 랑데부(핵동결)-도킹(비핵화)할 계획이다. 김정은·트럼프가 문재인이라는 내비게이션을 잘 따라가 준다면, 둘이 만날 수는 있다.

하지만 미국은 자기 손 안에 한국을 잡아둔 뒤 함께 대북 압박에 나서 북한의 항복을 받아내려 한다. 북한은 핵보유국 입지를 흔들지 않으면서 남쪽과 손잡고 북·미대화에 나서 대북 압박체제를 이완, 생존 공간을 확보하려 한다. 그런데 세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만난 적도 없는 사이다. 남녀가 만나자 마자 합방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두 사람이 문재인의 길안내만을 믿고 먼 우주로 함께 손잡고 날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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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두 사람은 설사 협상을 해도 바닥부터 하지 않을 게 틀림없다. 김정은은 핵 무력의 정점에서, 트럼프는 대북 압박의 정점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북·미 도킹은 우주선 도킹처럼 계산할 수 없다. 북·미 두 세계 사이에는 우주보다 변수가 더 많다. 이런 조건에서 계산기를 두드려 북·미의 경로를 정확하게 설정하는 북핵 로드맵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북핵 협상의 마지막 단계를 비핵화로 명기한 로드맵을 작성해 보라. 북한은 협상장을 뛰쳐나갈 것이다. 비핵화를 명기하지 않은 로드맵을 제시해 보라. 미국이 협상장을 박차고 나올 것이다. 로드맵을 작성하는 순간 로드맵은 사라진다. 외부의 관찰이 관찰 대상의 운동에 영향을 미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북핵문제에도 잘 적용된다.

쿠바 미사일 위기 30년이 지난 1992년 아바나에서 미국은 러시아·쿠바와 함께 역사 기록을 위한 회의를 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미사일 위기 때 쿠바에 주둔했던 러시아 장군이 놀라운 증언을 했다. 당시 소련군이 단거리·장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했다고 밝힌 것이다. 그때 CIA는 핵탄두 탑재를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다. 단거리 핵미사일 배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쿠바 주둔 소련군이 본국과 통신이 두절될 경우 미군 침공에 맞서 단거리 핵미사일을 독자적으로 사용할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말에 “로버트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은 의자에서 거의 떨어질 뻔했다”(전 케네디 대통령 특별 보좌관 아서 슐레진저 2세). 당시 맥나마라 장관을 제외한 미군 수뇌부는 쿠바 침공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려 깊게 처신했고 핵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불확실성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불확실한 조건에서 완전한 해법, 만족스러운 해결책에 집착하는 게 오히려 위험하다. 지난 두 차례의 북핵 합의가 깨진 것도 당사자들이 확실한 결과, 최대의 만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합의에 불만을 품은 쪽이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히 합의를 위반하는 행동을 했고 그 결과가 우리 앞에 닥친 전례 없는 위기다. ‘코피전략’의 위험성은 북한을 타격하면 김정은이 보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있다. 확신은 무모한 행동을 불러온다.

불확실성과 불만족한 상태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늘 위험에 깨어 있고, 서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다. 그런 자세를 가져야 진정 문제해결에 다가갈 준비가 됐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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