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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산업·민족에 갇힌 디자인 담론엔 보편적 힘이 없다

입력 : 2018.02.28 21:28:00 수정 : 2018.02.28 21:32:04

평창 동계올림픽의 달항아리 성화대.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달항아리 성화대.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했다.
한국 디자인 담론의 구조

대문자 디자인의 탄생

내년 2019년은 바우하우스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독일에서 등장한 이 디자인학교는 바이마르공화국과 운명을 같이했다. 정확히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해에 바이마르에서 설립되었고, 나치의 집권으로 바이마르공화국이 사라진 1933년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이를 결코 우연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우하우스가 디자인을 통해서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했으리라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다.

바우하우스는 건축이나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알 정도로 유명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우하우스가 대문자 디자인(Design), 즉 바우하우스=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학교였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지냈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바우하우스는 학교가 아니라 하나의 이념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바우하우스 자체가 하나의 담론이었다는 것이다. 대문자 디자인이라는 담론.

나치에 의해 탄압을 받고 있는 바우하우스의 상황을 표현한 포토몽타주. 야마와키 이와오 작, 1932년

나치에 의해 탄압을 받고 있는 바우하우스의 상황을 표현한 포토몽타주. 야마와키 이와오 작, 1932년

담론이란 단지 말이 아니라 대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언어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우하우스를 하나의 담론이라고 일컫는 것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디자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우하우스가 유력한 프레임 또는 패러다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담론이든 프레임이든 패러다임이든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언어적 구조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

담론은 힘이 세다. 우리는 결국 담론이라는 틀을 통해서 세계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보편적 담론의 힘은 정말 강하다. 예컨대 오늘날 자유, 평등, 인권 같은 담론은 얼마나 강력한가. 왜냐하면 현실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그러한 보편적 담론의 틀로 세계를 보며 가치판단을 하고 실천적 의지를 다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담론은 그냥 말이 아니라 매우 실천적인 효과를 가지는 어떤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상이 그렇듯이 바우하우스 역시 하나의 커다란 저수지였다. 바우하우스 이전의 모든 디자인 운동과 사상이 바우하우스로 흘러들어갔고, 20세기 주요 디자인의 흐름이 그로부터 흘러나왔다. 마치 칸트의 선험철학이,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이 거기로 흘러들어가 합쳐지고, 이후의 모든 근대철학이 거기로부터 흘러나온 저수지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바우하우스는 현대디자인에서 하나의 보편적 담론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는 말이 오늘날에도 바우하우스가 아무런 훼손을 입지 않고 100년 전의 위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찌 보면 모던 디자인을 대표하는 바우하우스는 포스트 모던 디자인의 등장과 함께 사실상 역사의 창고 속으로 폐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정도가 아니라 ‘죽은 개’처럼 취급된 지도 오래되었다. 예컨대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우하우스는 백색 남근주의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일본의 사회 참여적인 여성 미술가 도미야마 다에코는 바우하우스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다.

“‘대건축의 날개 아래의 통합’이라는 그로피우스의 제기는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자본주의 사회의 기술 혁신과 고도 경제 성장 속에서 점차 대기업이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각 도시에 있는 디자인 스쿨은 공업 생산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여 디자이너를 육성하고 인테리어와 상품 디자인을 대량생산했다.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대건축이라는 권력의 구조물 속으로 통합되어 가기를 거부하는 곳에서부터 다음의 조형이 시작되었다. 20세기 우리들은 대건축이라는 것이 권력의 구축물이라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다… 바우하우스는 나름대로 훌륭한 유토피아 사상을 갖기는 했지만, 여성인 나는 그것 역시 남성 문화의 발상이었다고 생각한다.”(<해방의 미학>)

디자인 담론의 보편성과 역사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우하우스는 담론적 보편성을 가진다. 보편성을 가진다는 사실이 반드시 타당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편타당이라고 말하지만 언제나 보편이 타당과 함께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현실에서 보편부당한 것도 많다. 예컨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은 오늘날 전혀 보편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명제가 오랫동안 보편적인 것으로 인류의 의식을 지배해왔고, 지금도 상당 부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보편성이란 일단 형식논리적인 것이며, 반드시 특정 진리값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한 시대의 진리가 다른 시대에는 비리(非理)가 되는 경우도 많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터져 나오는 권력을 가진 남성에 의한 여성 성폭력 문제가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가.

보편이란 허구다. 보편이란 관념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라는 관념(보편)은 구체적인 개개의 나무(특수)의 실존을 사상(捨象)하고 추상화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무라는 관념(보편) 없이 우리는 나무들(특수)을 생각할 수 없다. 개별적인 나무를 눈으로 보는 것과 나무 자체를 머리로 사유하는 것은 다르다. 나무 자체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추상적 관념이 필요하다. 그래서 관념으로서의 보편은 실재하지 않지만, 관념으로서의 보편의 작용은 실재한다.

디자인도 마찬가지이다. 바우하우스는 최초로 보편적 관념으로서의 디자인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바우하우스 이전의 디자인은 개개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특수로서의 디자인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우하우스는 그러한 특수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보편으로서의 디자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문자 디자인’이다(물론 바우하우스 당시에는 오늘날의 영어 ‘디자인(design)’ 대신에 독일어 ‘게슈탈퉁(Gestaltu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바우하우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바우하우스 없이 디자인을 사유할 수 없다. 설사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우하우스의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보편성은 여기에 있고,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사적 의의도 바로 이런 것이다.

한국 디자인 담론의 성격

통상 바우하우스 같은 서구의 주류 디자인 담론을 보편적이라 하고, 한국과 같은 주변부의 디자인 담론을 특수적이라고 한다. 이는 중심과 주변, 서구와 비서구, 제1세계와 제3세계라는 문화정치적 지리에 대응하는 것이다.

흔히 ‘한국적 디자인’이라고 불리는 그래픽 작품들.

흔히 ‘한국적 디자인’이라고 불리는 그래픽 작품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위계적인 구별/차별을 부정할 수 있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에 대해 반대할 수 있다. 주변부란 없다, 이 세상 누구나 자신이 있는 자리가 곧 중심이다, 라고 외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이분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관념적으로 부정할 수는 있지만 실제적으로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담론(의 효과)으로서 계속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이분법적 구조가 단지 중심부의 강제나 음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주변부들 자신에 의해서 열심히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우리는 한국 디자인 담론의 구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 디자인 담론의 구조란 무엇인가. 전에도 한 번 쓴 적이 있지만, 한국 디자인 담론은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미술수출(美術輸出)’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담론의 하위 담론으로서 디자인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한국의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디자인 영역에서는 이를 넘어서는 담론이 등장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국 디자인 담론은 서구의, 바우하우스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그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바우하우스 선언문’(1919년)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조형예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에 있다.”

일단 이 명제가 타당한가 아닌가를 떠나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선언문의 주체와 주어가 건축가이며 조형예술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바우하우스의 경우에는 국가주의 담론이 아니라 적어도 예술 담론으로서의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 두 문장을 비교해보면 더욱 확연해질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 살아간다.”(‘프랑스 인권선언’, 1789년)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국민교육헌장’, 1968년)

앞의 것의 주어는 인간이고, 뒤의 것의 주어는 민족이다. 이것이 바로 보편과 특수의 차이이며, 보편과 특수의 차이는 이처럼 어느 일방에 의해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물론 서구의 보편 담론이 가진 허구성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프랑스 인권선언’의 주어인 인간이 실제로는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라 부르주아 백인 남성에 한정될 뿐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고, 그것은 어느 정도 적실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프랑스 인권선언’이 지닌 담론적 보편의 효과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자유, 평등, 인권 등의 보편적 가치가 바로 그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국민교육헌장’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체제 바깥을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보편과 특수의 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인 차이인 것이다.

한국 디자인 담론이 보편적 담론이 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디자인의 주어가 디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디자인 담론은 언제나 국가, 민족, 산업이라는 대주체 뒤에 숨어 있다. 그래서 특수한 파생 담론에 머물고 만다. 이러한 구조는 한마디로 보편에의 의식이나 의지 자체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의 보편적 의식 또는 의지란 다른 것이 아니라, 디자인의 주어/주체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 선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디자인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고 해석하려는 그런 것 말이다. 속된 말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디자인을 주어로 세계를 보고자 할 때 디자인 담론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 디자인은 자신의 특수성을 다른 방식으로 합리화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른바 ‘한국적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디자인의 보편성과는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 그러니까 보편의 일부로서의 특수성도 아닌, 그냥 고립된 특수성일 뿐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소문자 디자인(design)으로 위치시키고 만다. 물론 이것은 주변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중심부를 욕망하면 할수록 더욱더 깊은 주변부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잔인한 역설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면 디자인의 보편성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우리의 발밑에, 주변에 있다. 보편성이란 결코 저 높은 올림포스산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그런 것처럼 시장바닥에서 건져 올려야 한다. 보편은 특수의 종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기존의 보편의 모방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디자인은 우리의 특수한 현실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서구 디자인의 보편성(대문자 디자인)이 갖는 권력을 욕망해왔을 뿐이다. 한국 디자인이 하나의 보편성을 획득하려면 특수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그것을 종합하고 보편으로 상승시키는 것 이외에 달리 방법은 없다.

▶필자 최범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디자인 평론가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출판·전시·공공 부문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 국내 유일의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 편집인이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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