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읽음

GM과 봉숭아학당

2018.03.05 21:08
박용채 논설위원

등장인물부터 소개하자. <그>=노련하고 냉혹한 사냥꾼. 돈 냄새 맡는 데는 탁월하다. <그녀>=그의 파트너. 약삭빠르지만 행동은 굼뜨고 발톱은 무디다. 살찐 고양이에 가깝다. <그녀의 뒷배>=마르지 않는 샘물. 그와 그녀는 공동으로 여러 채의 공장을 갖고 있다. <일꾼>=가끔 품삯 투정을 하지만 언제든 팔이 비틀릴 존재들이다.

[박용채 칼럼]GM과 봉숭아학당

그가 등장하면서 1막이 올라간다. 대사는 거칠다. “더 이상 공장을 돌릴 수 없어. 물건이 시원찮아 팔리지도 않고. 우선 한 곳부터 닫아야겠어. 생활비를 줄이고 양육비 부담을 덜어주지 않으면 추가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다. 거리에 나앉게 된 일꾼들은 양육비를 줄 때 나가서 독립하는 게 나은지 저울질하는 가련한 처지가 됐다. 그녀와 그녀의 뒷배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반격할 구석은 없는지 우왕좌왕한다. 여기저기서 훈수꾼들이 등장하며 그와 그녀의 진영까지 난타하지만 말에 책임은 없다. 그의 도발은 일자리와 선거라는 급소를 정확히 물어뜯었다. 냉혹한 뱀의 지혜 앞에 모두가 혼선을 일으키며 봉숭아학당이 되는 것이 무리는 아니지만 정도가 심하다.

그가 거칠게 나오는 데는 까닭이 있다. 그의 왕국은 한때 세계를 호령했다. 하지만 10년 전 무참히 쓰러졌다. 금융위기가 직접적 원인이지만 이미 경쟁자들의 공격으로 쇠잔해진 터였다. 61만명이던 식솔은 6만명으로 줄었다. 심폐소생술을 받았고 가까스로 회생했다. 그는 딴사람이 됐다. 그의 새 주인은 이익 최우선 집단인 사모펀드들이다. 숭배대상은 ‘돈’으로 바뀌었다. 벌지 못하면 버렸고, 벌리지 않는 곳에서는 떠났다. 최근 2년 연속 13조원을 벌어들일 정도로 성과는 좋았다. 물론 그녀가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몇몇 파트너들과 관계를 끊었다. 지난해 6월 그녀가 파악한 그의 모습은 오늘의 사태를 예고했다. 당시 그녀는 그의 대리인이던 <그2>의 재무 관리가 엉망이고 자료 투명성도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게다가 그와 그2 사이에는 불투명한 거래가 많았다. 결국 그가 조만간 떠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웬일인지 입을 다물었다.

암전. 뒤늦게 현실을 파악한 그녀 진영은 그가 양육비를 요구하기 전에 제대로 된 미래계획 그리고 이를 담보하기 위한 재정계획부터 갖고 오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와 그2 간의 불투명하고 정직하지 못한 거래관계를 파헤치겠다는 카드도 내밀었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반전은 가능할까.

곧 시작될 2막의 시나리오를 예상해보자. 그의 세계는 헤어짐과 결합이 쉼없이 일어나는 복잡한 곳이다. 잘나가다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덩치를 키우기도 하고 쪼개기도 한다. 버려지는 것은 예사롭다. 따지고보면 그는 애초부터 그녀와 오래 지속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공급하는 부품값을 높이고, 상궤를 벗어난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면서 잇속을 챙긴 것이 이의 방증이다. 그렇다고 아직은 완전히 내칠 생각은 없다. 급소를 물린 그녀 진영이 상황 악화를 방치하지 않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실제 한 번도 이런 거래를 성공시켜 본 적이 없는 그녀 진영은 “새 제품의 모델과 성격, 최소 5년 이상 지속적으로 생산 가능한지를 보겠다”는 말로 가진 패를 다 보여줬다. 그가 다소간의 성의만 보여주면 수표책을 긁을 준비가 돼 있다는 얘기이다.

그녀 진영 입장에서는 현 단계에서 이 해법이 최선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가 새 물건을 보내주면 나머지 공장은 돌리게 되면서 일단 불은 끄게 된다. 한 개 공장은 도리 없는 희생양으로 치부될 것이다. 적당히 고용 대책을 내놓으면 면피는 하면서 선거는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의 애초 의도와 다르지 않은 결말이다.

그럼 사태는 2막으로 끝날 것인가? 따져보자. 그가 새 물건을 던져주는 것과 그 물건이 잘 팔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 거론되는 물건은 이곳에 없는 물건임은 분명하지만 세계시장 차원에서 보면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제품이다. 미래 추이를 감안하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 근본적인 것은 그에게 그녀가 절실한 파트너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분간은 몰라도 그가 떠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결국 2막은 3막의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최종 해법은 그가 떠나는 자리를 어떻게 메울 것인지, 일자리는 무엇으로 충당할 것인지. 해당 지역의 경제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가 논쟁의 중심으로 와야 한다. 해당 산업의 미래를 위한 논의도 병행돼야 한다. 하나같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나마 이번 사태의 교훈이자 해피엔딩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