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법관

2018.03.06 21:30 입력 2018.03.06 21:38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때로는 사건의 본질과 무관해 보이는 얘기가 사건의 본질일 수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혐의 상당 부분에 무죄를 선고한 서울고법 정형식 재판장 얘기다. 그는 “법리는 양보할 수 없는 명확한 영역이었고 고민할 사안이 아니었다”고 지난달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하지만 판결문을 거듭해서 읽어보아도 어떤 법리를 말하는지 가늠이 안 된다.

[이범준의 저스티스]삼성과 법관

이재용 부회장 사건이 사실상 무죄가 된 이유는 법리가 아닌 사실에 있다. 정형식 재판장은 “포괄적 현안으로서 피고인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작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고, 이것이 피고인의 형량을 대폭 줄여 집행유예를 가능케 했다. 특별한 법리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그의 말과 달리 고민하거나 양보할 것도 없었다. 법리라는 표현은 시민을 주눅 들게 하고, 비판을 봉쇄한다. 형사재판의 핵심은 법리가 아닌 사실이고 그래서 수재라는 판사들도 기피하는 것이다.

정형식 판사가 무죄를 선고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 “현안 없는 대기업은 없다. 그렇게 엮으면 다 잡혀간다”고 법리를 세우는 것과 “삼성그룹 현안에 승계작업은 없다. 다른 회사는 몰라도 그렇다”고 사실을 정하는 방식이다. 둘째 방식을 그는 택했다. “이재용의 삼성전자 또는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력 확보에 유리한 영향을 미치는 효과가 있었다는 사정은 개별 현안들의 진행에 따른 여러 효과(예컨대 구조조정을 통한 사업의 합리화 등)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첫째 방식이 이론상 일관성과 보편성이 있지만 택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대기업 총수에 대한 재판 결과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당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면세점 허가라는 현안 때문에 징역형을 받고 법정에서 구속됐다. 정형식 재판장 입장에서는 자신의 무죄 선고가 대법원에서 파기될 가능성도 크다. 그야말로 법리를 건드렸기에 법리를 판단하는 대법원이 유무죄와 상관없이 지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승계작업 현안이 없다는 사실 부인의 길로 갔다.

삼성그룹을 둘러싼 진짜 법리논쟁은 10년 전에 있었다. 2008년 대법원은 이른바 삼성에버랜드 사건과 삼성SDS 사건을 심리했다. 삼성그룹의 3세 승계작업을 위해 삼성그룹 임원들이 관리자의 임무를 저버리고 회사에 손실을 입혔다고 기소된 사건이다. 검찰은 수하 경영진만 기소했으나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이후 조준웅 특별검사가 이건희 회장을 기소했다. 두 사건 모두 삼성그룹을 순환지배할 수 있는 주식을 이재용 부회장 등에게 헐값에 넘긴 혐의다. 2009년 대법원은 에버랜드 사건을 무죄로, SDS 사건을 유죄로 결론 내렸다.

유무죄가 엇갈린 이유는 에버랜드는 주주 배정 방식, SDS는 제3자 배정 방식이라는 점이었다. 두 회사의 주식은 모두 삼성그룹 3세들에게 주어졌는데 형식이 다르다고 대법원은 설명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는 주주에게 싸게 살 기회를 주었지만 인수하는 사람이 없어 3세에게 갔고,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는 처음부터 3세에게 싸게 배정됐다는 이유다. 기존 주주에게는 싸게 추가 주식을 팔아도 회사에 손해가 없지만, 제3자에게 주식을 헐값에 파는 것은 기존 주주의 이익을 해쳐 회사에도 손해가 된다는 것이다.

반대의견은 에버랜드 전환사채는 주주 배정의 외양이지만 실제로는 제3자 배정과 다르지 않다며 에버랜드 사건도 유죄라고 했다. 주주 배정 방식을 전제로 싸게 발행된 주식이 기존 주주에게 인수되지 않아 제3자에게 넘기게 됐다면 발행가격을 시가로 올려야 했다는 것이다. 반대의견의 대법관들은 “대량의 실권주를 불공정한 발행가격으로 제3자에게 배정한 이사들로 인해 회사에 자금이 덜 유입되는 손해가 발생했다면 업무상 배임죄가 성립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두 사건 모두 무죄라는 별개 의견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양승태 대법관이다. 그는 “아무리 헐값에 주식을 넘겼다고 해도 얼마라도 회사에 돈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배임이 되느냐”고 했다. 주주에게 불이익일 수 있지만 회사에 대한 배임은 아니라고 했다. 이런 논리라면 경영권 이전이나 주주들의 증여세 탈세를 위해 주식을 저가나 무상으로 발행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1인 주주회사의 배임과 횡령도 처벌하는 기존의 대법원 판례와도 맞지 않는다.

SDS 사건만으로 이건희 회장에게 유죄가 확정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같은 해 그를 사면한다. 이듬해에는 삼성그룹의 전면 무죄를 주장한 양승태 대법관을 대법원장에 임명한다. 세월이 흘러 지금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건희 회장을 사면해주고 대가를 받았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 원세훈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두고 청와대와 거래했다는 의혹이 있다. 에버랜드 사건에서 무죄의견을 낸 차한성 전 대법관은 이재용 부회장 변호인으로 나섰다. 이렇듯 현실은 언제나 법리보다 치밀하고 또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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