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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과 배려’란 말로는 성별이 왜 권력으로 작동하는지 설명 못해

필자 최현희
입력 : 2018.03.09 17:01:01 수정 : 2018.03.09 17:08:52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로 열린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 걸린 메시지.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로 열린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 걸린 메시지. 경향신문 자료사진

많은 여성들의 용기와 연대의 결과인 미투 운동의 사회적 반향을 지켜보는 것은 페미니스트로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투 운동은 잊고자 했던 과거의 기억을 강제적으로 끄집어내기에 지켜보기 괴로운 일이다. 많은 여성들이 그럴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 이제는 오랜 시간이 지나 희미해졌다고 믿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미투 운동과 함께 선명하게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내가 당한 것을 성폭력이라고 인지조차 못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이제는 용기 있게 대면하려고 한다. 내가 당한 폭력과 나의 감정을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했을 뿐, 그 일은 괜찮지 않았다. 2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학생 때 교복을 입고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서있는 나에게 목 뒤로 뜨거운 입김이 전해졌다. 곧 세 명의 남학생들이 시시덕대며 뒤에서 나를 희롱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아무 대응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너무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에 나는 아무것도 눈치 못 챈 것처럼 애써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 후 그 불쾌했던 경험이 떠오를 때면 버스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도 함께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 걸 분명히 목격했지만 침묵했다. 즐거운 듯 빤히 쳐다보던 한 남성의 호기심 어린 표정도 생생하다.

자라오면서 혹은 교사가 된 이후로 경험했던 여러 수위의 성적 폭력에 대해 이 지면을 다 할애하여 묘사하고 싶지 않다. 수많은 기억 속에 단 두 가지의 경험을 꺼내 간략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가 않는다. 하물며 특정인을 지목하여 자신의 피해사례를 공개하고 가해자를 고발하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일지 이 글을 쓰며 더욱 절감한다. 그렇기에 미투 운동에 동참하는 분들을 향해 마음 깊이 응원과 지지를 다할 수밖에 없다.

대다수의 상식적인 사회구성원이라면 같은 마음일 거라 믿었다. 당장 피해자가 자신의 실명까지 걸고 나와 절박한 심정으로 가해자를 고발할 때, 누구라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아픔을 공감할거라고 생각했다. 침묵 대신 말하기를 선택한 수많은 이들의 용기와 연대가 기적처럼 느껴졌고, 이제는 피해자가 혼자 고통을 감내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될 거라 희망했다. 그러나 가해자 남성에게 유독 선택적으로 공감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걸 보고 낙담했다.

피해자가 오랜 시간 겪어왔을 모멸감이나 고통보다 가해자의 명성이 일순간에 하락하는 것에 더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들, 무고의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대단히 중립적인 통찰인 양 내뱉는 사람들, 자신은 주변에서 비슷한 일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며 자신의 빈약한 인식과 경험을 절대화하고, 성폭력을 예외적이고 특수한 사례로 축소하려는 사람들을 보며 절망했다. 진보적인 언론인을 자처하는 어떤 이는 미투 운동이 섹스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쉬우며, 정치 공작에 이용될 수 있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미투 운동에서 섹스를 떠올리는 그의 성인식은 물론 성폭력 피해자를 진영의 논리에 따라 진보와 보수로 구별하는 작태가 ‘진보적인’ 그들이 그렇게 타도하고 싶어 하는 우리 사회의 ‘적폐’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열린 ‘찾아가는 성교육’ 프로그램. 형식적인 성교육이 아닌, 사회의 구조적인 폭력을 깨닫게 하는 성교육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열린 ‘찾아가는 성교육’ 프로그램. 형식적인 성교육이 아닌, 사회의 구조적인 폭력을 깨닫게 하는 성교육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들의 행동은 내가 성희롱을 당하던 버스에서 그 모습을 관음했던 한 남성 승객의 표정과 바로 눈앞의 폭력을 보면서도 모른 척 침묵했던 승객들의 표정을 떠오르게 한다. 그들은 직접적인 가해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가해자들이 나에게 가하는 폭력을 승인했으며 가해자들이 수치심 없이 그런 행동을 저지를 만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나는 그 버스의 분위기를 약자의 생존본능으로 간파했을 것이고, 여기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또 하나의 공포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얼어붙었다. 체계적인 반성폭력교육은커녕 제대로 된 성교육조차 받은 적이 없었던 10대의 나는 그렇게 주변의 묵인과 방조 속에 속수무책으로 온몸으로 성희롱을 겪어내야 했다.

이러한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해 당장 교육계가 시급히 할 일은 학교 성폭력 예방 교육의 전면적 재검토이다. 피해자의 행동이나 복장을 통제하는 식의 지금 교육으로는 성폭력의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잘못된 악습을 끊어내지 못할 것이다. 특히 남성을 본능적으로 성욕에 취약한 존재라고 가르치며 성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성폭력이 권력과 구조의 문제임을 은폐하는 교육부의 성교육표준안 폐기를 적극 논의해야 할 때이다. 이미 많은 전문가와 시민들이 성교육표준안의 수많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며 폐기를 요구했지만 교육부는 그동안 이에 대해 소극적, 방어적으로 대응해왔다. 이제라도 진지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성교육표준안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기를 촉구한다.

동시에 나의 고민은 내 교실을 향한다. 바로 숨 쉬듯 2차 가해를 일삼는 자들을 더 이상 양산하지 않는 교육을 향한 고민이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가해자에게 스스로를 동일시하며 시대의 변화에 걸림돌이 되는 비청소년들의 행태는 분노의 대상은 될지언정 나의 중요한 관심사는 아니다. 나에게는 학교에서 내가 만날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그들처럼 되지 않을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약자에게 더 귀를 기울이는 아주 기본적인 공동체성과 시민의식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 나의 경험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을 쉽게 재단하고 평가하는 반지성을 넘어서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이고 추악한 문제를 마주할 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거기에 기여한 바가 없는지 성찰하는 감수성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

초등학교를 둘러보면 교실과 복도마다 협력과 배려, 공감과 소통 등 ‘아름다운’ 말들이 걸려 있다. 페미니즘 교육 운동을 하는 나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칠 시간에 차라리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교육을 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고 보편적인 가치들이라도 페미니즘적 성찰 없이 상투적으로 전수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미투 운동 2차 가해자들을 보며 절실히 느낀다.

배려할 수 있다, 가해자를. 공감할 수 있다, 가해자에게. 협력할 수 있다, 가해자와. 이게 학교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배려와 공감, 협동인가.

사회가 어떻게 성별을 인위적으로 이분화하여 위계를 세우는지, 구조적인 폭력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며 그것이 나의 일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성별이 왜 권력으로 작동될 수 있는지, 사회에서 약자는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성찰하게 돕는 교육이 절실하며 그게 다름 아닌 페미니즘 교육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인 공감능력은 가지고 태어나는 듯하다. 그러나 그걸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그러한 배움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이 무겁다. 분명히 해야 할 일이기에 끊임없이 노력하겠지만 교실이라는 공간이 사회와 동떨어진 진공의 공간이 아니기에 나는 두렵다. 내가 최선을 다해 마음으로 만난 아이들이 약자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약자의 고통 앞에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교사로서 그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안타깝게도 교사 혼자 작은 교실에서 시민교육을 책임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지금 아이들에게는 교실 밖 좋은 시민의 롤모델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용기 내 일어선 이들을 지지하며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자신의 일상을 성찰하고 바꾸려고 노력하는 시민들을 아이들이 많이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경험은 교사가 학교에서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생생한 페미니즘 교육일 거라 믿는다.

▶필자 최현희

‘협력과 배려’란 말로는 성별이 왜 권력으로 작동하는지 설명 못해


14년차 초등교사. 좋은 교사가 되려고 노력하던 중에 페미니즘을 만나버렸다. 페미니스트가 되기 전에는 스스로 꽤 좋은 교사라고 믿었으나,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로 다시 바라본 교실과 학교는 좋은 교사에 대한 고민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했다. 페미니즘으로 직업과 일상이 고단해졌지만 고민하고 실천하는 삶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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