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이 달라진 것처럼, 한·일관계도 확 달라지길 기대한다

2018.03.09 17:06 입력 2018.03.29 16:26 수정
필자 박철현

박철현의 일기일회(一期一會)

이상화, 고다이라 나오 선수가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벌인 우정 어린 레이스와 기자회견 장면은 일본 방송에서 수십 차례 나왔다.

이상화, 고다이라 나오 선수가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벌인 우정 어린 레이스와 기자회견 장면은 일본 방송에서 수십 차례 나왔다.

“한·일전 이번엔 몇 개나 될까?”

국제 스포츠대회가 열리면 우리 가족이 공통적으로 내뱉는 물음이다. 원래는 아내와 나만 그랬는데 아이들이 크기 시작하면서 그들도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다. 참 격세지감이다. 예전에 WBC 세계야구대회 결승에서 운명의 한·일전이 벌어졌고 스즈키 이치로의 중전안타에 무너지는 한국을 보며 나는 깊은 탄식을, 아내는 엄청난 환호를 질렀다. 그때 큰딸 미우(아마 네댓 살 정도 됐을 테다)가 갑자기 울었던 적이 있다. 순간 내 편을 들어주나 했다. 그런데 미우는 누구 편도 아니었다. 다만 “한·일전이 열리면 엄마랑 아빠랑 누구 한쪽은 반드시 기분이 나빠지잖아. 한·일전 따위 없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했다. 아이의 신기한 발상에 아내와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일리는 있는 것 같다.

그랬던 미우가, 그리고 둘째 유나도 포함해서 한·일전이 열릴 때마다 기대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 학교에 다니다 보니 엄마 따라 일본을 응원한다. 방송이 일본 위주로 해설을 하니 더 그렇다. 태권도를 배우는 장남 준이 그나마 한국 편을 들어주기는 하는데 한국이 이기면 “아 일본이 졌어”라며 아쉬워하는 모습도 간혹 보이니까 이 집에서 진정한 한국팀 팬은 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평상시엔 화목하지만 한·일전이 열리면 항상 코너에 몰리는 기분이 된다. 일본 언론도 한·일전만 열리면 ‘숙명의 한·일전’ ‘절대 질 수 없는 승부’ 등등의 캐치프레이즈로 선동(?)을 해대니 더 졸아든다. 당연히 아이들은 세뇌(?)될 수밖에 없고.

큰딸 미우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소재로 쓴 일기.

큰딸 미우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소재로 쓴 일기.

그런데 그런 아이들의 세뇌된 라이벌 의식이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일대전환이 일어났다. 계기는 스피드스케이팅의 고다이라 나오 선수이다. 고다이라 선수가 자신의 경주를 마친 이후 일본인 관중들을 향해 입에 손을 갖다 대면서 다음 조에 출전하는 이상화 선수를 위해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이 장면이 일본 방송에서 수십번, 아니 아마 100번 넘게 방송됐다. 그리고 시합이 다 끝난 후 이상화 선수와 고다이라 선수가 포옹하는 장면이 적어도 수십번은 리플레이됐다. 평창 올림픽이 폐막한 이후 각 민방에서 방영된 올림픽 특집 버라이어티 쇼에서 이 둘의 우정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중요한 에피소드로 반드시 등장했다. 얼마나 세심하게 다뤄졌냐면, 시합이 끝난 후 가진 고다이라와 이상화의 합동기자회견이 거의 풀영상으로 나올 정도이며(일본 버라이어티 방송의 관례상 드문 경우) 이 기자회견에서 나온 고다이라의 일부 발언이 일본 전국에 퍼지면서 꽤 화제가 됐다. 다음 발언이다.

“이상화 선수와 오랫동안 라이벌이었던 건 맞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상화 선수를 존경해 왔다. 그리고 둘 사이의 에피소드가 사실 많은데, 특히 네덜란드 유학 당시 열린 서울 월드컵대회가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이상화 선수에게 이긴 그날 바로 네덜란드로 가야 해서 마음이 급했는데 준비된 차가 안 와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이상화 선수가 (시합에 졌기 때문에) 자기 기분도 그렇게 좋지 않았을 텐데 나를 배려하면서 호텔 입구까지 같이 나와 택시를 잡아줬다. 그리고 운전수에게 한국어로 ‘지금 엄청나게 급하니까 빨리 공항으로 가달라’고 하더라. 아참 택시비도 내줬다(두 선수 웃음. 회견장에 모인 기자들도 폭소).”

일본 방송에 이 기자회견이 수십차례 다뤄지면서 아이들도 이 발언 부분은 거의 외우고 다닐 정도가 됐다. 방송뿐 아니라 집에서 정기구독하는 아사히신문에는 아예 전면기사로 둘의 우정을 다뤘다. 그 덕분에 아이들도 한·일전을 좋은 방향으로 재인식하게 됐다. ‘절대 질 수 없는 숙명의 한·일전’이 아니라 ‘아름다운 우정이 넘나드는 국가대항전’으로 말이다. 그리고 며칠 후 열린 여자 컬링 한·일 준결승전이 이런 아이들의 변화되어 가던 인식에 결정타를 날렸다.

스포츠호치, 닛칸스포츠, 스포니치 등 일본의 주요 스포츠신문들은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컬링 준결승 소식을 모두 1면으로 다뤘다.

스포츠호치, 닛칸스포츠, 스포니치 등 일본의 주요 스포츠신문들은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컬링 준결승 소식을 모두 1면으로 다뤘다.

준결승 당일 밤늦게 퇴근하자마자 큰아이가 “아빠 컬링 봤어? 와! 내가 지금까지 본 경기 중 최고였어. 안경선배 최고, 최고”라고 흥분하더니 둘째 유나도 “아빠, 나 컬링 배울래”라며 빗자루를 들고 날뛴다. 자타가 공인하는 역대 최고의 한·일전 명승부였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아이들 반응은 의외였다. 그 전까지 컬링에 대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평소에 응원하던 종목과 상관없이, 아무튼 ‘일본팀’이 져서 조금은 억울해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NHK의 중계방송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을 내놓는다. 말인즉슨 NHK답지 않게(?) 준결승 컬링 시합 전 한국팀 스킵 김은정을 설명하면서 만화 <슬램덩크>의 식스맨 고구레 기미노부(한국 번역본에선 권준호)의 애칭인 ‘안경선배’를 대입시키더니 아예 자막에도 안경선배를 공공연히 적시했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게다가 이미지가 매우 좋은 캐릭터의 닉네임을 한국팀에 선사한 덕분에 이 경기가 끝나자마자 일본 방송은 안경선배의 물결에 휩싸였다. 승패를 초월한 명승부였던 이 시합은 25.7%의 엄청난 시청률로 평창 동계올림픽 2위의 시청률을 기록(1위는 피겨스케이팅 하뉴 유즈루의 남자 프리 33.9%. 참고로 고다이라 나오의 1000m 결승은 24.9%로 4위)하기도 했다. 또한 이 경기는 다음날 일본의 3대 스포츠신문(스포츠호치, 닛칸스포츠, 스포니치)의 1면을 장식하기도 했는데 3사 모두 제목에 ‘안경선배’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김은정 선수의 모습을 넣었다. 특히 닛칸스포츠는 ‘아재개그’까지 동원해 “안경선배에게 완패했다”는 파격적인 제목을 선보였다(완패는 일본어로 ‘간파이’라고 읽는데, 한국을 ‘간코쿠’로 읽는 점에 착안해 ‘완전할 완’ 한자를 ‘나라 한’으로 바꾸어 한국에 완전히 패했다는 중의적 의미를 띠는 제목을 달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난 몇 년간 한·일전만 열리면 왠지 수세에 몰린 듯한 느낌을 받던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일본인 거래처 사람을 만나도 이상화-고다이라의 이야기가 나왔고, 연달아 여자 컬링 준결승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당연히 안경선배는 필수요소고. 본업인 공사 발주 이야기는 제쳐두고 평창 이야기만 하다가, 시간이 다 되어서야 “아참, 그런데 이 공사는 그러니까…”로 끝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니 아예 ‘아, 얼어붙은 한·일관계가 앞으로 풀린다면 혹시 이 두 사례가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뿌듯하고 들뜬 며칠이 지난 어느 일요일, 큰딸이 밤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을 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학교에 제출하는 숙제용 일기장의 여백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다. “왜 쓸거리가 없어?”라고 물으니 “응. 테마가 안 떠올라”라며 한숨을 쉰다. 아, 너도 어느새 마감의 고통에 시달리는 나이가 됐구나. “일기인데 그냥 아무거나 쓰면 되지”라고 조언하자 더 깊은 한숨을 쉬며 “아빠, 글 쓰는 사람 맞아?”라며 핀잔을 준다. 한 2~3분 같이 생각하다가 번득 뇌리를 스쳐 지나간 평창. “아! 그거 써. 평창 동계올림픽”이라고 말하자 미우 눈이 번쩍 빛나면서 “맞네. 올림픽 쓰면 되네!”라고 연필을 손에 쥐고 일사천리로 써내려간다. 어쩌면 이리도 나와 비슷할까. 주제 정하기가 어렵지, 정해지기만 하면 한번에 써내려가는 스타일. 그렇게 한 3분 정도 지나자 읽어보라며 건네준다. 일기지만 어차피 공개하는 거니까(개인일기는 또 따로 쓴다) 읽어도 괜찮다면서 “지적해도 수정은 안 할 거니까, 그냥 읽어보기만 해”라고 덧붙인다.

제목은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감동적이었던 세 가지 장면’인데, 하뉴 유즈루 이야기로 시작하더니 다카키 미호 자매와 고다이라의 메달 수확, 그리고 여자 컬링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한국 이야기가 별로 안 나오고 철저하게 일본 입장에서 쓴 글이다. 글 자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 썼는데 한국인 아비로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한국 이야기를 좀 더 썼으면 싶었다.

필자 박철현

필자 박철현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가서 기분이 풀려 버렸다. 본문이 다 끝난 후 아마도 자기 자신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그림을 그려놓고 “아참, 참고로 한국은 17개 메달을 획득했어요. 데헷”이라고 말풍선을 넣은 게 아닌가. 그렇지, 일기든 뭐든 결론이 중요하다. 어떤 글이든 미괄식이 가장 아름답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평창의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 한·일전을 계기로, 한·일관계도 최근 평화물결을 타고 있는 남북관계처럼 좋아지기를 기대한다. 우리 아이들의 인식이 평창을 계기로 확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필자 박철현

2001년 도일. 한국에선 영화 연출을 공부했지만 일본에선 오마이뉴스재팬, JP뉴스 등에서 기자로 10년간 일했다. 도쿄 우에노에서 바를 운영하기도 했다. 일본인 아내와의 러브스토리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출간해 화제를 모았고, <일본 제국은 왜 실패했는가>와 <인터넷 동반자살>을 번역했다. 1976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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