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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 수단으로 양적 발전…현실은 빈곤한 일상의 디자인

입력 : 2018.03.14 21:45:00 수정 : 2018.03.14 21:51:24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서울 개포동의 타워팰리스와 구룡마을 전경.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서울 개포동의 타워팰리스와 구룡마을 전경. 경향신문 자료사진
양극화 사회의 디자인

“하나의 국가에는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한다. 그 두 나라의 사람들은 쓰는 언어가 다르며, 문화가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그 두 나라란 부자들의 나라와 가난한 자들의 나라를 말한다.”-벤저민 디즈레일리(19세기 영국 총리)

어느 국가인들 그렇지 않으랴. 물론 가파르게 산업화가 진행되던 19세기 영국의 상황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엥겔스가 쓴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보면 당시 영국 하층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이 잘 묘사되어 있다. “세상에는 세 가지의 거짓말이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이다”라는 말로도 유명한 명언 제조기 디즈레일리의 주옥같은 말들은 한국 디자인을 이해하는 데도 뛰어난 통찰을 제공한다.

한동안 한국 사회를 달구었던 양극화라는 말이 새 정부의 화두인 ‘적폐청산’에 의해 가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극화는 엄연히 우리 사회가 해결해나가야 할 중대한 과제이다. 그리고 양극화의 극복은 적폐청산과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양극화야말로 적폐의 산물이며 적폐야말로 양극화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양극화를 빼곤 한국 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만이 아니어서 일본에서도 ‘격차사회’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분명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을 것이다. 양극화의 수준은 모름지기 한국이 일본보다 한 수 위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국의 경우 사회 전 부문에 걸쳐서 심각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양극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일단 그 자체로도 비극일 뿐 아니라 사회적 통합에도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양극화 하면 주로 경제적·사회적 양극화를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디자인의 양극화도 심각하다. 디자인의 양극화? 물론 낯선 말이다. 디자인의 양극화는 경제적·사회적 양극화의 디자인 판본일 수도 있지만, 디자인의 특성상 경제적·사회적 양극화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러한 양극화의 구조적 원형 같은 것을 드러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면 디자인의 양극화란 무엇일까. 그것은 디지털 분할(digital divide)처럼 디자인 분할(design divide)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부자는 고급한 디자인을, 가난한 사람은 저급한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 말이다.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한 이해방식이다. 어느 사회이든지 화려한 곳도 있고, 누추한 구석도 있는 법이다. 깨끗하고 세련된 도시 공간이 있는가 하면, 햇볕이 들지 않는 컴컴한 쪽방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적·사회적 양극화가 가시적으로 드러난 풍경일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도 경제적·사회적 양극화의 시각적 반영으로서 디자인의 양극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양극화는 그것보다 좀 더 근본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 사회의 피부 아래에 감춰져 있는, 진짜 양극화의 뿌리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한국 디자인의 양극화는 제도와 현실의 양극화이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는 공식적인 디자인 부문과 대중의 일상생활을 이루는 비공식적인 디자인 부문의 양극화인 셈이다. 디자인 역시 사회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제도적·공식적 부문이 있고 일상적·비공식적 부문이 있다. 어느 영역이든지 이 두 부문은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평행선을 그리게 마련이다. 다만 그 차이가 지나치게 클 경우 체제의 정당성은 상실되고 사회적 통합성은 깨어진다. 예컨대 세금을 내는 공식적 경제 부문과 세금을 내지 않는 비공식적 경제 부문, 즉 지하경제의 간극은 어느 사회나 일정 정도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만약에 지하경제가 공식 경제를 압도할 정도라면, 그 사회의 경제 구조를 결코 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제도의 디자인과 비공식적인 생활세계의 디자인이 하늘과 땅만큼 벌어져 있다면, 그런 사회의 디자인을 전체적인 차원에서 결코 긍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한국 디자인이 바로 그렇다.

디자인 제도의 과잉 발달과 무책임성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의 디자인 제도가 과잉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디자인 제도라고 하면 크게 교육 제도, 전문직 제도, 공공 정책이 있다. 교육 제도는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 교육을 가리킨다. 전문직은 보통 디자이너라고 부르는 직업군을 가리킨다. 공공 정책은 국가 또는 지자체 차원에서의 디자인 정책 및 관련 기관을 가리킨다. 한국의 디자인 제도는 이 세 부문에서 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외형적 규모를 자랑한다.

조화롭지 못한 거리의 풍경.

조화롭지 못한 거리의 풍경.

2·4년제 대학 디자인 전공 졸업자 수는 한 해 2만5000명 수준을 헤아리며,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수도 엄청나며, 국가 또는 지자체 차원에서의 디자인 정책이나 기관도 많고 활발하다. 적어도 양적 수준에서 한국의 디자인 제도는 세계 최고 수준임을 의심할 수 없다(디자인 전공 졸업생 수는 예체능계 전공 전체 졸업생 수의 절반에 해당되며, 인구 대비 세계 최고이다). 이처럼 한국은 방대한 디자인 제도와 인프라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곧 한국이 디자인이 발달한 나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적인 면만을 보고 그렇게 말할 수는 결코 없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생활 속의 미적 문화로서 구체적으로 경험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한국의 제도적인 디자인이 대중의 일상적 삶과는 유리된 그들만의 유사 관료주의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그 증거의 하나는 바로 양적 언어에 있다. 생활 속의 미적 문화인 디자인은 수치로 계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제도 디자인은 언제나 이를 양적 언어로 표현해왔다.

“산업자원부가 디자인산업을 차세대 성장동력산업으로 적극 육성, 오는 2008년 세계 7위의 디자인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산업자원부는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개최된 ‘참여정부 디자인산업 발전전략 보고대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디자인산업 육성책을 발표했다.”(디지털타임스, 2003년 12월4일)

‘세계 7위의 디자인 선진국 진입’? 이 무슨 개그인가? 디자인에 순위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디자인이 무슨 올림픽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제도 디자인이 맨날 디자인 경쟁력이니 디자인 선진국이니 하는 언어들을 동원하는 이유는, 그러한 관료주의적 언어 말고는 달리 무슨 디자인 철학이나 이념 같은 것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이는 한국의 제도 디자인이 자신의 주체적 언어를 갖지 못한 채 오로지 국가에 의해 창출되고 자본에 봉사하는 가운데 그 하위 부문으로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국가와 자본이 디자인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순진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제도 디자인의 최소한의 책임성이다. 어쨌든 한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공식화되어 있는 부문은 사회 전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봉사해야 한다. 이는 정치든 교육이든 종교든 언론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제도권이란 오로지 소수의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하고 민중을 착취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제도 디자인이 한국 사회의 디자인 전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국가 선전과 자본 생산이라는 협애한 이익에만 봉사하고 민중의 생활세계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의 정당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생활세계의 추함과 황폐화

오늘날 한국 사회의 풍경은 디자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추하고 황폐하다. 도시, 거리, 아파트, 관공서, 상업지역, 예식장, 모텔, 유원지, 등산로 입구, 바닷가 횟집, 교외, 농촌…. 하나하나 묘사하자면 한이 없지만, 이러한 풍경들은 결코 아름답지도 조화롭지도 못하다. 경제 수준이 세계 몇 위니 어쩌니 하지만, 눈에 보이는 우리 사회의 실제 모습은 이렇다. SNS에는 아름다운 유럽 도시들을 배경으로 찍은 여행 사진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아름다운 환경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스타 디자이너 타령이나 해대는 제도권 디자이너들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매년 개최하는 ‘디자인 코리아’ 행사.

산업통상자원부가 매년 개최하는 ‘디자인 코리아’ 행사.

사실 대중은 대부분 국가와 자본에 의해 제공되는 디자인의 일방적인 소비자일 뿐 주체적인 디자인 문화 능력, 즉 디자인 리터러시(design literacy)가 거의 없다. 간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대중을 교육시키는 것은 상품과 매스컴일 것이다. 날마다 소비하는 상품들의 외양,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 라이프스타일 잡지들…. 대중의 취향은 이런 것들에 의해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대중의 취향은 생활세계를 만들고 일상을 통해 실천된다.

이러한 대중의 디자인 세계를 전문용어로는 버내큘러 디자인(Vernacular Design)이라고 부른다. 익명의, 민중의, 아마추어의 디자인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이러한 버내큘러 디자인의 세계가 제도권의 고급한 엘리트 디자인의 세계와 전혀 다른 품질을 갖는다는 데 있다. 물론 버내큘러 디자인을 일방적으로 폄하해서는 안되겠지만, 정반대의 맹목적인 긍정 또한 곤란하다. 그것은 자칫하면 관념적이고 낭만적인 민중예찬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제도에 의한 생활세계의 방기

아무튼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제도화된 전문적인 디자인과 대중의 버내큘러 디자인의 간극이 매우 크며, 그 결과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하버마스가 말하는 ‘체제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아니, 이것은 체제(제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가 아니라 무책임이며, 방기에 가깝다. 이것은 디자인에서의 기민(棄民) 정책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위로부터’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디자인 제도 자체가 외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자인 교육은 물론이고 디자인 제도 전체가 한국 사회의 ‘아래로부터’의 내적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대 국가 체제 구성의 필요성 또는 경제 개발을 위한 수단으로 요청된 것이다보니 현실의 생활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디자인 제도는 대중의 일상적인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로지 국가와 기업을 위한 자원으로만 동원된다. 이것이 바로 사회 전체의 디자인 수준이 고르게 발전한 서구와 다른, 한국 디자인의 양극화 양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맨 앞에 인용한 디즈레일리의 말에서 나라를 디자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한국에는 두 개의 디자인이 존재한다. 그 두 개의 디자인은 만드는 사람이 다르며, 쓰는 사람이 다르고, 결정적으로는 섬기는 대상이 다르다. 그 두 개의 디자인이란 제도의 디자인과 생활세계의 디자인을 말한다.”

▶필자 최범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디자인 평론가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출판·전시·공공 부문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 국내 유일의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 편집인이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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