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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점 중 금 순도·나이 최고 보물은 못 됐지만 그래도 ‘신라의 혼’ 입니다

경주 교동 금관

경주 교동 금관

신라는 ‘10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삼국사기>로 볼 때 기원전 57년부터 935년 고려에 병합될 때까지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장구한 역사로 ‘천년 왕도’ 경주를 비롯한 곳곳에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겨놓았다. 그 가운데 신라를 대표·상징하는 문화재를 꼽으라면? 금관을 첫손에 꼽을 만하다.

1500여년 전 만들어진 금관은 신라의 사회문화상,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문화재다. 한국 고대사와 금속공예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다. 독특한 조형성, 빼어난 세공기술, 저마다 상징을 품은 장식물들…. 세계에 내놓을 걸작의 미술품이다.

현재 국내에 전해지는 신라 금관은 모두 6점이다.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지만 금관은 아직 미스터리가 많다. 기원과 성격, 사용자, 장식물들의 상징성 등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어서다.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많은 신비로운 문화재가 바로 신라 금관이다.

■ 금관, 신라 문화유산의 표상

신라 금관은 영원불멸을 증명이라도 하듯 1500년 세월을 넘어 여전히 찬란한 황금빛을 뽐낸다. 금관은 삼국 가운데 신라만 지금까지 6점이 확인됐다. 5점은 발굴조사로 출토됐고, 1점은 도굴품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공식적으로 출토된 적이 없다. 고구려도 금관의 존재 가능성이 있지만 출토된 유물은 금동관이거나 파편들이다.

백제는 금관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왕은)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관을 쓰고…’라는 <삼국사기> 등의 기록이 있어서다. 금관 대신 비단관에 금제 관꾸미개(관식)를 꽂은 것이다.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과 왕비의 관꾸미개가 각 2쌍씩 나와 국보 154호, 155호로 지정돼 있다. 가야 금관으로 전해지는 것은 2점이 유명하다. 대가야 영역이던 경북 고령에서 출토됐다는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국보 138호·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일본 ‘오구라컬렉션’으로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가야 금관’이다.

발굴된 신라 금관 5점은 모두 특정한 지역·시기의 고분들에서 나왔다. 경주 대릉원 일대의 왕릉급 무덤들로, 5~6세기 전반 150여년 동안의 시기다. 신라가 김씨로 왕위세습이 이뤄지고, 왕의 호칭도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뀐 시대다. 금관이 나온 고분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경주 천마총 내부 전시장을 둘러보면 유물 출토 상황, 무덤 구조, 시대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금관총 금관의 세부 모습.

금관총 금관의 세부 모습.

신라 금관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형적 형태가 있다. 금판을 다듬은 관테, 관테에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듯한 ‘出’(출)자 모양과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금못으로 고정시켜 세웠다. 이들 세움장식에는 비취색의 굽은옥, 동그란 금판인 달개 등을 금실로 매달았다. 금관을 살짝 건드리면 달개들이 흔들리면서 사방으로 부서지는 빛이 압권이다. 금관 아래로는 화려한 드리개를 늘어뜨렸다.

이 땅에서 처음 발견된 금관은 ‘금관총 금관’이다. 1921년 9월 봉황대 인근 노서리 주막 뒤뜰에서 공사 도중 구슬 등이 발견되자 발굴로 이어졌고, 마침내 1500년 무덤 속에 있던 금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관이 나오면서 ‘노서리 제128호분’으로 불리던 무덤은 ‘금관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인이 특정 왕으로 확인되면 ‘~왕릉’이지만 왕릉급이긴 한데 주인공을 모르니 ‘총’이 붙은 것이다.

국보 87호인 금관총 금관의 제작 시기는 5세기로 추정되며, 높이 27.5㎝에 무게 692g이다. 순도는 20.5K(금 85.4%, 은 13.4%)다. 금관이 발견되자 일제는 잇달아 고분조사에 나섰다. 고고학적 ‘발굴’이라기보다 유물 욕심에 따른 ‘도굴’에 가까웠다.

3년 뒤인 1924년, 금관총 인근 작은 무덤에서 6세기 대의 높이 27.0㎝, 무게 356.4g인 두 번째 금관이 나왔다. 보물 338호인 ‘금령총 금관’이다. 금제 방울(금령)이 함께 출토돼 ‘금령총’이란 이름을 붙였다.

‘서봉총 금관’(보물 339호)은 1926년 발굴된 5세기 작품으로 높이 30.7㎝, 무게 803.3g이다. 순도는 금령총 금관과 비슷한 19K다. 다른 관들과 달리 관 내부에 띠 모양 금판을 십자형으로 교차시키고 그 위에 봉황을 얹은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물을 세웠다. ‘서봉총’이란 이름은 스웨덴의 황태자가 당시 발굴현장에 온 것을 기념하고, 봉황 모양의 장식이 있어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의 ‘瑞’자와 봉황의 ‘鳳’(봉)자를 따 붙여졌다. 서봉총이란 이름을 접할 때마다, 일제 잔재이면서 황당한 문화재 명칭들은 개선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문화재청이 여론을 수렴, 적극 나설 일이다.

서봉총 금관 출토 모습.

서봉총 금관 출토 모습.

1973년에는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이 우리 손으로 발굴됐다. 정부가 경주관광종합개발사업을 하면서 가장 큰 고분인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한 ‘연습 발굴’을 하는데 나온 것이다. 높이 32.5㎝에 무게 1262.6g, 순도 20K, 6세기 작품이다. 다른 금관보다 3배나 많은 382개의 달개가 있고 굽은옥도 많아 화려함이 돋보인다. ‘천마도’(국보 207호)가 함께 출토돼 ‘천마총’이 됐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191호)은 표주박처럼 두 개의 무덤이 남북으로 붙은 황남대총의 북쪽 무덤에서만 1974년에 나왔다. 5세기 작품으로 높이 27.3㎝, 무게 1062g이다. 남분에 뒤이어 조성된 북분은 ‘夫人帶’(부인대)라는 명문의 허리띠 장식이 확인돼 여성 무덤이다. 금관은 여성 무덤인 북분에서, 남성 무덤인 남분에서는 은관이 나왔다.

마지막 한 점은 도굴품으로 압수된 ‘경주 교동 금관’이다. 가장 이른 5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높이 12.8㎝, 무게 50.4g으로 작다. 달개만 단 간단한 장식이 세워져 있다. 신라 금관 중 순도가 21.4K로 가장 높지만 도굴품이다보니 출토 정보가 적다. 다른 금관은 모두 국보나 보물이지만 ‘교동 금관’은 국가지정문화재가 아니다.

(왼쪽부터)금관총 금관, 천마총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관, 서봉총 금관, 금령총 금관

(왼쪽부터)금관총 금관, 천마총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관, 서봉총 금관, 금령총 금관

■ 금관의 미스터리들

신라 금관은 죽은 자와 더불어 산 자를 위한 상징물이다. 금은보석으로 만든 숱한 유물과 함께 묻어 죽은 자의 안식을 기원하고, 한편으론 최고 지배자의 권위와 위세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 금관이 7세기 이후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법흥왕 때인 527년 불교가 공인되면서 일어난 정치사회적 변화 때문으로 보인다. 불법(佛法)의 힘이 왕실을 수호한다는 호국불교 신앙이 자리 잡고 장례문화가 바뀌어 대형 돌무지덧널무덤도 사라진다.

신라 금관은 이외에도 여러 궁금증을 낳는다. 왜 이런 형식으로 만들었는지, 장식물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실용품인지 장례 의례품인지, 사용자는 누구인지 등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서다.

금관은 실용품일까, ‘데스 마스크’의 일종인 의례품일까. 연구성과를 종합하면, 의례품일 가능성이 높다. 평소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에는 약하고, 장식물이 많아 불편하다. 무엇보다 출토 당시 금관은 이마 윗부분이 아니라 주검의 얼굴 전체를 가리거나 어깨까지 내려온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 실용품이란 견해도 많다. 특히 왕의 권위를 내세워야 할 주요 의식에는 실제 썼을 가능성이 있다.

금관의 주인공은 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왕비나 왕자같이 최고 지배계층도 가능하다. 귀족이란 주장도 있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은 여성이 무덤 주인공인데, 당시 여왕은 없었다. 그럼 남분에서는 왜 은관만 나왔을까? 안타깝게도 아직 모른다. 다만 왕이 아닌 여성도 금관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또 10대 청소년용의 작은 금관들도 있다. ‘교동 금관’은 관테 지름이 14㎝, ‘금령총 금관’은 16.4㎝에 불과하다.

금관의 유래, 장식물의 상징성을 둘러싸고도 해석들이 엇갈린다. 스키타이, 시베리아 등 북방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경우 샤먼의 관, 흑해 북안의 고분에서 나온 ‘사르마트 금관’이나 아프가니스탄의 고분에서 나온 ‘틸리아 테페 금관’ 등에 관심을 둔다. 출(出)자 모양 장식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신목(神木) 신앙을 형상화한 것으로 본다. 사슴도 신목처럼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로 여겨졌다.

토착문화의 산물로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신화’에서 기원을 찾기도 한다. 출(出)자 장식은 김알지가 태어난 황금궤짝이 있던 나뭇가지를, 달개는 나뭇잎을 형상화했다고 본다.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는 시기와도 일치해 왕권 강화를 위해 시조신화를 금관으로 이미지화했다는 것이다. 고조선시대 지배계층이 쓰던 관모, 태양숭배 사상이 뿌리라는 견해도 있다.

금관에 달린 굽은옥의 경우, 선사시대부터 나타나는 유물이다. 동물의 태아 모양으로 생명, 생명의 씨앗,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제쯤 신라 금관을 둘러싼 여러 미스터리가 풀릴 수 있을까. 지금 경주의 거대한 고분들, 도심의 도로나 빌딩 아래 묻혀 있을 또 다른 금관들이 궁금해진다. 전문가들의 연구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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