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에 사회적 발언은 ‘생존 문제’…혼자 사라지지 않게 할 것”

2018.03.16 17:06 입력 2018.03.16 22:14 수정

영화인 심재명 명필름 대표

경기 파주시 명필름아트센터에서 만난 심재명 대표. 뒤로 오형근 작가가 찍은 <해피엔드>(1999·왼쪽 사진), <화장>(2014)의 스틸 사진이 보인다. 김영민 기자

경기 파주시 명필름아트센터에서 만난 심재명 대표. 뒤로 오형근 작가가 찍은 <해피엔드>(1999·왼쪽 사진), <화장>(2014)의 스틸 사진이 보인다. 김영민 기자

1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 기념 행사. 임순례 감독이 미투 운동이 ‘진보의 분열’ 혹은 ‘공작’이라고 우려하는 반응에 대해 “잡스러운 이론”이라고 일갈하자, 객석에선 작은 웃음이 터졌다. 임 감독의 오랜 동지이자 함께 든든 센터장을 맡은 심재명 명필름 대표(55)가 말을 이었다. “든든은 성폭력 예방과 함께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영화계 성평등 문화 조성을 위해서도 노력할 것입니다.”

든든의 개소는 최근 거센 미투 운동과 연계된 것처럼 보이지만, 준비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6년 문화계 내 성폭력 폭로 이후 단발적인 문제 제기를 넘어, 왜곡된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영화계 곳곳에서 나왔다. 영화계 성평등 문화의 핵심이 될 든든을 이끄는 데 심재명만큼 적당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돌아보면 명필름 창립작품 <코르셋>(1996)은 외모 때문에 실력을 인정받지 못해 고민하는 여성이 주인공이었으니, 심재명은 20여년 전부터 성평등을 화두로 삼아온 영화인이었던 셈이다. 14일 경기 파주 명필름아트센터에서 심재명을 만났다.

- 남성중심적인 한국 사회, 그중에서도 더욱 남성중심적인 한국 영화계에서 성평등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을까요. 개소 행사에서 발표된 영화인 상대 설문조사에서도 ‘성폭력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응답이 76%였습니다.

“그런 비관적 전망 때문에 공적 기구가 더욱 필요하죠. 든든은 한국 사회에서 드물게도 업계와 공공기관(영화진흥위원회)이 빠르게 문제를 인식하고 준비해온 사례입니다. 피해 사례에 따른 매뉴얼을 모두 준비했습니다. 피해자가 신고하면 조사한 뒤 피해자 의사대로 대처할 겁니다. 법률적으로 해결하길 원한다면 법률자문을 하고, 중재와 사과를 원하거나 공표하길 원하면 그렇게 할 겁니다.”

- 당신이 영화계에 뛰어든 1980년대 말, 업계엔 여성이 거의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도 ‘미스 심’이라 불리며 영화 광고 카피를 썼다면서요.

“저 역시 무지했죠. 여성이란 정체성으로 얼마나 성희롱, 성추행을 겪었겠어요. 그때는 당하면서도 그게 잘못된 일인지 몰랐겠죠. 최근 페미니즘의 물결, 젠더 이슈에 접하면서 이제야 저도 습득하고 배우고 있습니다. 다 무지의 소치였음을 자각합니다.”

- 그래도 <코르셋>이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카트>(2014)같이 여성 주인공을 주체적으로 내세운 영화를 꾸준히 만들었습니다.

“제가 태생적으로 페미니스트였던 건 아닙니다. 다만 영화계에 역할모델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있었어요. 2000년 봄 여성 영화인 모임이 만들어지면서 20년 가까이 한국 영화계 여성인력 저변을 확대하는 데 목소리를 냈습니다. 여성 영화인 모임을 함께하면서 체득한 것도 많고요. 여성은 사회에서도, 영화계에서도 약자입니다. 영화의 최종 의사결정권자 중 하나인 제작자로서, 제가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만들려는지 의식적으로 노력해왔습니다.”

- 명필름 영화는 만만치 않은 소재를 다루곤 합니다. 지난해 공동제작한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문제, <카트>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최근의 <환절기>는 동성애 문제를 다룹니다. 상업영화로서 다루기 쉬운 소재는 아니잖아요.

“주제를 교조주의적으로 내세우면 관객이 싫어해요.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문제를 다루면서도 피해자의 과거를 회고하는 대신, 현재를 보여주는 방법이 좋았습니다. 게다가 코미디라는 대중영화의 화법으로 한국사의 가장 아픈 상처를 다뤘다는 점에서 상업적 경쟁력이 있다고 봤어요.”

- 투자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아이 캔 스피크>도 대기업이 안 하려고 해서 힘들었어요. 처음엔 시나리오와 주연 나문희 배우, 딱 두 가지만 있었어요. 명필름이 나서면서 김현석 감독, 이제훈 배우를 끌어들였고, 여기에 롯데를 공동배급으로 참여시켰습니다.”

- 남우 여럿이 한꺼번에 나와 욕하고 피칠갑하는 영화가 한국 영화의 최근 주류였습니다.

“전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문이라고 봅니다. 영화는 중소기업의 특장점을 살려야 창의적인 작품이 나오는 업계입니다. 지난 두 정권 때 친대기업, 자본추수, 자유경쟁이 심화되면서 영화계도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어요. 연간 관객이 2억명을 넘으면서 산업이 커졌지만, 수익 분배는 양극화됐습니다. 크게 투자해 크게 버는 방식이 유행했습니다. 이런 ‘빅 버짓’일수록 남성중심적이고, 뜨겁고 센 영화가 됩니다. 남성 멀티캐스팅 영화는 한국 사회 보수화의 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 그런데 여우가 주연인 영화는 관객이 또 적더라고요.

“그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왜 잘됐습니까. 최근 <리틀 포레스트>는 왜 잘됩니까. <마당을 나온 암탉>은 심지어 암탉이 주인공인데요(웃음). 빅 버짓 영화인 <암살>은 전지현씨가 주연했잖아요. 남성 주인공 영화가 잘된다는 건 표피적인 시선일 뿐이에요. 남성 영화 중 잘된 것도 많지만, 안된 영화는 더 많아요. 물론 제작자 입장에서 여성 주인공 영화를 빅 버짓으로 만들기가 조심스럽긴 해요. 저예산으로 만들어 최소한의 수익을 내는 역할모델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지난 4일(현지시간) 열린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여우주연상 수상 장면이었다. 맥도먼드는 트로피를 잠시 땅에 내려놓은 뒤 두 팔을 내저으며 객석에 있는 여성 후보자들 모두가 기립해 박수를 받도록 유도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우린 할 이야기가 있고, 투자받을 프로젝트가 있어요.” 여배우가 이처럼 강하게 목소리를 내는 건 한국 사회에선 드문 일이다.

- 든든 행사에서도 한국 여배우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왔던데요.

“여배우에겐 사회적 발언이 ‘생존의 문제’가 될 때가 많아요. 사회적인 논란이 되는 발언, 행동을 했을 때 여성 연예인은 바로 ‘하차’합니다. 반면 남성 연예인은 ‘제작진이 숙고 중’이라는 기사가 한참 뜨죠. 제가 여배우라도 두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함께 목소리를 내자고 말하고 싶어요. 여배우 혼자 사라지거나 희생당하지 않을 겁니다.”

명필름이 제작한 영화들. (위 왼쪽부터)창립작 <코르셋>(1996), <공동경비구역 JSA>(2000),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아래 왼쪽부터)<건축학개론>(2012), <카트>(2014) 그리고 내달 개봉하는 <당신의 부탁>(2018).

명필름이 제작한 영화들. (위 왼쪽부터)창립작 <코르셋>(1996), <공동경비구역 JSA>(2000),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아래 왼쪽부터)<건축학개론>(2012), <카트>(2014) 그리고 내달 개봉하는 <당신의 부탁>(2018).

- 명필름이 창립된 지 23년 됐습니다. ‘열 손가락’ 같겠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무언가요. 반대로 아쉬운 작품은요.

“얼마 전에 블루레이를 만들기 위해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를 디지털 리마스터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봤는데, 제가 더 나이 들고 삶이 힘겨워져서 그런지 예전보다 더 가슴에 와닿더라고요. 당시 임순례 감독이 40대 초반이었는데 삶에 대해 어찌 그런 성숙한 시선을 가졌는지…. 물론 음악영화로도 훌륭하고요. <카트>는 반대 경우입니다. 한국 상업영화계에서 노동권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 진보적이고 어려운 일이 없어요. <카트> 개봉 당시 바람은 상업영화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해도 손해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었어요. 120만이 손익분기점이었는데, 82만 관객이 들었습니다.”

- 2000년대 중반쯤 명필름 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너무 성공해 자만에 빠졌던 것 같아요. 그때 명필름이 강제규필름과 합병해서 우회상장했잖아요. 이전에는 수공예스럽게 1년에 1편 만들었는데, 합병 이후 4편씩 만들었어요. 사업의 양이 늘다보니 결과가 아쉬웠던 것 같아요. 결국 실적이 나빠지고 자본 잠식됐다가 우회상장 철회하고 명필름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처음 내놓은 영화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 명필름이 등장한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영화는 본격적으로 산업과 예술의 양측면에서 궤도에 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함께 등장했던 영화인들 중 건재한 이는 거의 없네요.

“외롭고 아쉽죠. 좋게 보면 젊은 인력이 빠르게 진입하는 한국 영화계의 역동성을 말할 수 있지만, 반대로 세대교체가 너무 빨라 앞 세대의 전문적인 능력이 축적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거든요. 할리우드만 해도 70~80대의 감독, 제작자가 건재하잖아요. 예전엔 제게 질투와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영화들이 많았는데, 그런 영화를 보는 경험이 점점 적어져요. 제가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똘똘한 콘텐츠만 있으면 자본을 유치하기가 어렵지 않았어요. 전 운이 좋았고, 좋은 시대에 영화를 했다는 데 대한 마음의 빚도 있습니다. 명필름 랩을 만들어 신인 영화인들을 지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5기 입학생을 모집하고 있는 명필름 랩은 신인 영화인들의 장편 데뷔를 돕는 교육과정이다. 연출, 시나리오, 제작, 촬영 등 분야에서 신인 영화인들을 선발하고, 2년간의 작품 개발·제작 기간 동안 교육과 숙식이 무료다. 최근 개봉작 <환절기>(감독 이동은)도 명필름 랩의 작품이다. 4월 개봉 예정인 이동은 감독의 <당신의 부탁> 역시 명필름 작품이다.

- 이제 관객수가 척척 예상이 되시나요.

“점점 모르겠어요. <당신의 부탁>이 명필름 39번째 영화인데, 개봉 앞두고 초조하고 비관적이 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그게 영화 하는 스릴인 것 같기도 해요.”

- 아무튼 지금까지 영화계에서 생존하셨습니다. ‘생존의 비결’이 있나요.

“얼마 전 이준익 감독 인터뷰를 보니 ‘입 닫고 후배 얘기 들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셨더라고요. 저도 젊은 영화인들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해요. 그래서 비결을 말할 처지는 안돼요. 다만 젊은 영화인들이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면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하기 위해선 산업논리를 갖춰야 하겠지만, 도전정신이나 실험정신이 없으면 안됩니다.”

- 언제 행복하신가요.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감수성이 따로 있다면, 전 불행을 느끼는 감수성이 훨씬 강해요. 제 인격이 아쉽죠(웃음). 든든을 준비하면서 상담, 운영을 하시는 전문위원을 모셨는데, 그 헌신에 감동받았어요. 회사에 1994년생 인턴이 들어왔는데, 제가 1주일 걸리는 문서 작업을 2시간 만에 해내는 것을 보면서 ‘생의 감각’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무 걱정 없이 좋은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편한 대화를 할 때도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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