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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TV를 뚫고 나오다

2018.03.18 21:13 입력 2018.03.18 21:14 수정

1990년대의 청순미인 가수와 그 시절 인기인 순위에서 부동의 수위를 차지하던 국민 개그맨의 사랑 이야기는 “아직은 젊다”라고 주장하는 40·50대 연예인들의 나들이 프로그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불타는 청춘>이라 불리는 프로그램 말입니다. 한때 모든 이들의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 시대 우상들이 대학교 MT와 같은 나들이를 떠나 여행 간간이 자신의 삶 속 흔적들을 가만가만히 보여줍니다. 이별의 아픔이나 부모의 병환, 커리어의 굴곡 같은 개인사들은 스타들의 인간다움을 넌지시 노출하며 그 또한 사람임을 일깨워주어 벌써 3년째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미디어 세상]트루먼, TV를 뚫고 나오다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사이 예전 추억을 간직했던 스타들이 조금씩 가까워지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여는 과정이 매주 다가오게 되자, 지난 자신의 첫사랑의 아픈 추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린 관객들은 필요 이상의 응원과 오지랖 넓은 참견을 해 왔습니다. 이들 간 만남의 공식화와 결혼에 대한 일정까지도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되는 상황이 와 버리니 20년 전의 한 유명한 영화가 떠오릅니다. 바로 1998년 기발함과 애수로 다가왔던 영화 <트루먼 쇼>입니다.(이 영화의 장르가 놀랍게도 SF인 것은 아셨는지요?)

그때까지 코미디 배우로만 인식되던 짐 캐리는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를 수상하며 그의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한층 높은 단계로 올리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극중 주인공 이름이 트루먼(Truman·true man)인 것은 또 다른 복선이지요. 그리고 극중 트루먼의 성씨인 버뱅크(Burbank)는 방송국의 본사가 밀집되어 개발되었기에 ‘세계의 텔레비전 수도(capital city of television)’로 불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버뱅크시 이름을 차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트루먼은 텔레비전 세상 속의 유일한 참사람인 것이지요.

아직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낯설던 시절, 피터 위어 감독은 미래를 미리 본 것처럼 24시간 일상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프로그램의 도래를 기획하였습니다. 영화 속 프로그램의 제작비 충당을 위해 사방에 배치한 상품의 PPL 광고를 통해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기획된 것인지의 경계를 흔들어 주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이라 할 수 있겠네요.

배우가 영화 속 자신의 배역에 너무나 몰입해 극중 상대역의 배우와 사랑에 빠지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런 ‘극적인 사랑’을 한번이 아니라 몇번씩 겪는 배우는 타인의 삶을 내 안에 내재화하는 다면의 인생을 살 수 있기에 그만큼 만남의 희열과 헤어짐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었겠지요. 배트맨의 상대역인 조커와 자신을 동일시한 히스 레저의 극단적 선택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 동기와 과정은 메소드 연기라 세칭하는 몰입에 있습니다. 그 몰입이 자신을 넘어 상대를 향할 때 극중 열애가 현실화되는 일이 생깁니다. 은막을 뚫고 사랑이 나온 것이죠.

최근 화제가 된 예능 <나 혼자 산다>의 두 출연자의 사랑 이야기는 <트루먼 쇼>의 반대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예능 프로그램 속 역할을 수행하는 형태로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는 명시적 거래에 합의하고 출연진 모두 방송 같지 않은 방송을 만들어 나가다 본의 아니게 일을 넘어선 감정을 느낀 것입니다. 2014년 스포츠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진짜 사나이>의 PD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고 하지만 100% 리얼일 수는 없다”며 예능 프로그램 속 많은 부분이 보여지기 위한 설정이라는 암시를 했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 산다>의 경우 출연진 사이의 연애가 실제로 이루어지며 그 감정이 커지는 과정의 채록이 실제였다는 사실로 확인되어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리얼리티에 엄청난 ‘리얼리티’를 부가해 주었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들의 글들 중 두 사람 사이의 감정선이 연출이 아닌 것 같다 한 게시물의 지은이들은 저마다 본인의 감이 남다름을 뽐내며 성지순례를 유도합니다.

애틋한 사랑을 만들어나가는 번거로움과 귀여운 애완동물을 건사하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기엔 너무도 고단한 일상을 가진 필부필부는 오늘도 랜선연애와 랜선집사에 머무르고 맙니다. 가상의 연애를 바라보며 판타지의 비실제감에 2%의 갈증을 느끼던 차에 TV를 뚫고 나온 사랑 이야기를 목도한 우리는 그 귀한 행운의 연장선이 나의 인생에도 드리워지길 기대하게 됩니다.

프로그램의 설정을 넘어 실제 생활로 발전된 관계가 알려져버린 출연자들의 미래는 트루먼이 세트장의 마지막 문을 열고 나간 후의 인생과 자연스레 오버랩되어집니다. 세트장 너머 트루먼의 이야기는 예측 가능함과 안락함을 넘어 힘들고 어려운 실제 삶의 고난이 더해질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들어진 환경의 제한 속 주어진 삶의 종속을 태생적으로 거부하고픈 우리가 불확실한 동물원 밖의 자유를 원하는 영화 <혹성 탈출> 속 주인공 시저의 각성에 감동하는 것처럼, 동화 속 마지막 페이지의 클리셰인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Happily ever after)”는 결말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트루먼들을 함께 응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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