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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臣民)

2018.03.19 21:23 입력 2018.03.19 21:24 수정
박민규 | 소설가

[박민규 칼럼]신민(臣民)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한다. 2017년 3월10일 헌재의 탄핵 선고가 내려지던 그 순간, 나는 전혀 뜻밖의 인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일본의 쇼와 천황 히로히토다. 사람마다 느꼈던 감정과 해석이 다르겠지만, 나는 그날을 ‘비로소 우리가 천황제의 그늘에서 벗어난 날’로 기억하고 있다. 많은 신민들이 거리에서 울부짖던 날이기도 했다. 세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늦었지만 삼가 조의를 표하는 바다.

[박민규 칼럼]신민(臣民)

신하로서의 국민, 이른바 신민(a subject)은 군주제에서 형성된 개념이다. 조선에는 백성(百姓)이란 개념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전 국민을 아우르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해 천민이나 노예가 배제된 개념인 것이다. 임금께서 하사하신 백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 아래에는 성씨 없이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막연히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백성들이 지금의 시민사회와 국민을 이루었다 생각하는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조선의 백성-대한제국의 신민-대일본제국의 신민-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연결되는 이 흐름에는 몇 가지 반드시 짚어야 할 요소가 있다. 우선 조선시대의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 국민이 아닌 국민에겐 국가에 대한 의무가 없었던 것이다. 국민이었던 국민과, 국민이 아닌 국민 모두가 신민이 되는 과정에도 여러 굴곡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서구의 신민과 같은 개념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는 신민임과 동시에 노예인 이중신분자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시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 셈이다. 국민이 아닌 대접을 받아도 충성을 맹세하고 의무란 의무는 다 이행하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현대국가의 국민이 그래서 탄생한다. 영화 <변호인>의 법정에서 자칭 애국자인 차동영 경감은 국가란 무엇이냐는 송우석 변호사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그는 국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화를 낸다. 호통을 친다. 변호사란 사람이 국가가 뭔지 몰라? 송우석은 오열하듯 외친다. 압니다, 너무 잘 알지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변호인>의 명대사를 듣는 순간 모두가 울컥했던 이유는 한 가지다. 오랜 세월, 실은 우리가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애국자가 국가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신민’이었다.

최인규 감독의 1941년작 영화 <집 없는 천사>에는 운동장 조례에서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는 아마도 내 아버지가 겪은 어릴 적 풍경일 것이다. 그해(1941년) 총력전에 돌입한 일제는 국가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소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변경했다. 놀랍게도 1968년생인 나도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되뇌며 조례를 하던 소년이었다(아버지, 저는 국민교육헌장까지 외워야 했습니다). 국민학교의 명칭이 초등학교로 변경된 때가 1996년이니 적어도 아직까지는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보다 국민학교를 나온 이가 훨씬 더 많은 곳이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보다 더 신민에 가까운 국민이거나 시민일지 모른다. 내가 지닌 시민 의식… 그래, 그건 어쩌면 외워서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로든 그래서 한국인은 특별하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국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과 해석이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박정희는 대통령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신민이었다. 그가 아는 유일한 영도자는 천황이었고, 그는 스스로 이 나라의 천황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군부가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것이 그래서 당연했고,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은 신민이란 이름의 적산(敵産)이었다. 그래서 그의 근대화는 시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신민만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자산 역시 바로 그, 아버지의 유산이었다.

고대 사회로 갈수록 신민의 정체성은 명료해진다. 순장(殉葬)이 그것이다. 왕이 죽으면 수십 명, 내지는 수백 명의 신하를 함께 묻었고 긴 세월이 흘러서야 그것은 토우로 대체되었다. 강제로 묻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죽여서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더러 자진해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이러한 풍습이 소멸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노동의 중시, 피지배층의 지위 향상…. 결국 고대에도 계급 문제의 기본적인 해결책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봄이 왔다. 봄이 와도 여전히 이어지는 태극기 집회의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그래서 나는 뒤틀린 우리의 역사를 마주하듯 기분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신민과 시민이 공존하는 이 공간에서 우리의 실질적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느끼고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근대를 구축하고 근대국가를 완성해가는 일이야말로 깨어난 시민 개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어금니를 깨물며 다시 한 번 다짐한다. 국가는, 그래서 곧 국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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