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무력’이라는 손쉬운 길 아닌 ‘도리’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한 족장

2018.03.22 21:14 입력 2018.03.22 21:20 수정

지도자의 길, 신의 길

만주 신화에는 늙은 어부의 딸로 태어나 신이 된 타라이한마마를 비롯해 여신이 300명이나 등장한다. 여성 신들은 권위를 과시하는 남성 신들과는 다른 갈등 해결책을 제시한다. 사진은 만주족 여신의 이미지를 다룬 책 <샤만교여신>의 표지.

만주 신화에는 늙은 어부의 딸로 태어나 신이 된 타라이한마마를 비롯해 여신이 300명이나 등장한다. 여성 신들은 권위를 과시하는 남성 신들과는 다른 갈등 해결책을 제시한다. 사진은 만주족 여신의 이미지를 다룬 책 <샤만교여신>의 표지.

우리는 때로 좋은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때로는 착한 신도 필요하다. 이들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문제와 문제해결 과정의 연속이 아니던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해결할 능력자가 긴요해진다. 그것이 공동체의 문제일 때는 더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지도자가 되고 신이 되는가? 신화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까?

1635년 10월13일 만주어로 기록한 만주 기원신화에는 만주를 세우기 전의 상황이 제시되어 있다. 장백산(백두산) 동남쪽 아타리성(城)에 세 성씨가 있었는데, 족장을 차지하려고 종일 서로 싸웠다는 것이다. 우두머리가 되려고 다투는 일은 어디서나 현재형이다. 만주 기원신화도 이 같은 문제적 상황을 던진 뒤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 해결책은 이들의 싸움을 멈추게 할 영웅의 출현이다. 영웅은 어디서 오는가?

만주 복식 차림을 한 여성을 표지로 세운 <만주풍정록>.

만주 복식 차림을 한 여성을 표지로 세운 <만주풍정록>.

천상의 선녀 셋이 장백산 부르후리 호수에 목욕을 하러 내려온다. 목욕을 마친 막내 부쿠룬은 천신 압카언두리의 사자, 까마귀가 물고 와 옷 위에 떨어뜨린 붉은 열매를 먹고 임신을 하여 사내아이를 낳는다. 태어나자 바로 말을 하고 성장 속도가 남달랐던 아이가 자라자 부쿠룬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너를 낳은 것은 진실로 난국을 안정시키려 함이다. 저 싸우는 곳으로 가 네가 태어난 까닭을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하여라.” 이 대목은 <만주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난국 안정’이라는 천명을 타고난 아이는 모친의 명에 따라 배를 타고 내려가 아타리성 근처에 닿는다. 물을 길러 왔던 사람이 아이를 보고 이상히 여겨 무리를 이끌고 돌아온다. 그들을 향해 아이는 ‘나는 천상의 신, 선녀 부쿠룬의 아들이고, 성은 아이신기오로 이름은 부쿠리용숀’이라고 선언한다. 부쿠리용숀을 맞이한 세 씨족은 합의에 이른다. “우리가 다시 웅장이 되려고 다툴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들이 그를 왕으로 높이 모셨으니 마땅히 백리녀를 처로 삼게 해야 한다.” 이렇게 결혼해 아타리성에 정착하여 나라 이름을 만주라고 했다는 것인데, 사실 만주는 국명이 아니라 종족명이다. 아이신기오로는 만주족 왕실의 성이고, 부쿠리용숀은 그 시조다.

그런데 이런 사실보다 더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부쿠리용숀을 왕으로 추대케 한 힘의 출처이다. 세 씨족 간의 전쟁을 그치게 하고 그들을 하나로 통합한 힘은 그가 천상에서 왔다는 데 있다. 기실 그는 종전(終戰)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만주족의 최고신 압카언두리가 보냈다는 ‘천부적 권위’만으로 그는 아타리성의 문제를 해결한다. 남성 영웅, 건국 영웅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한데 만주 신화의 여성 영웅은 아주 다른 해결책을 보여준다. 우수리강 동쪽에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여러 마을이 있었는데, 이들도 싸운다. 아마도 물고기가 잘 잡히는 곳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었을 것이다. 아타리성의 여러 성씨들이 족장이 되려고 다퉜다면 우수리강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다툰다. 이 또한 문제를 해결할 영웅이 필요한 상황이다.

궈하러족이 구전하는 <타라이한마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라이가 태어나고, 사라지고, 돌아와 타라이한, 다시 말해 족장이 되는 신화다. 타라이는 우수리강 어귀 타라이 마을에 사는 늙은 어부 비양구의 외동딸로 태어난다. 마을 이름으로 이름을 지으면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외동딸은 타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열 살 되던 해 타라이는 갑자기 강풍에 휩쓸려 사라진다. 아흐레 밤낮을 찾았지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타라이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신화는 이런 궁금증에 대해 답하지 않고 다음 상황을 던진다. 연어잡이 계절에 그물을 두고 아흐레 밤낮을 싸우는 상황! 그런데 싸움의 방식이 흥미롭다. 두 마을이 기간을 정해 놓고 피터지게 싸워 죽은 사람의 수가 적은 쪽이 이기는 방식이다. 어릴 적 고향에서 경험한 바 있는 우리의 돌싸움(石戰)과 비슷한데, 죽도록 싸운다니 석전보다는 강도가 훨씬 세다. 그때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을 가르며 남쪽으로부터 자줏빛 말을 타고 쌍칼을 휘휘 돌리는 여장수가 나타난다.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처녀, 아무도 그가 누군지 몰랐지만 그는 사실 바람에 쓸려간 타라이였다.

타라이는 마을 간의 싸움이라는 고질을 해결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마을 청년들은 빈정대며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한다. 타라이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뒤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만일 누구든 내 두 손을 잡아 벌린다면 싸움에 관여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못한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어린 처녀를 얕잡아 본 사내들은 서로 나섰다. 먼저 석공 비라. 그는 손을 떼려고 용을 쓰다 얼굴을 붉히며 물러난다. 이를 본 사내들 일여덟 명이 연이어 대들었지만 타라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우수리강 일대의 최고의 역사인 나르한이 나섰다. 그는 큰 곰을 번쩍 들고 아름드리 자작나무를 뽑는 장사였다. 아버지는 걱정이 되어 나르한한테 부탁도 하고 딸도 말렸지만 딸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굴복하지 않는 타라이한테 화가 난 나르한은 달려들어 두 팔을 잡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손을 벌리려 했다. 그러나 타라이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있을 뿐이었다. 나르한은 무릎을 꿇었고, 일전을 벼르던 우수리 주민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타라이는 다시 제안을 한다. 우리 앞에 서 있는 큰 버드나무를 뽑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사실 이 물음 뒤에는 ‘나는 얼마든지 뽑을 수 있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모두 고개를 젓자 타라이는 힘센 청년 20명을 선발해 함께 뽑아 보라고 권한다. 청년들이 힘을 합치자 버드나무는 쉬 뽑혔다. 타라이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한다.

여러분, 한마음으로 뭉치면 황토도 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물질을 할 때도 합심해야 합니다. 큰 그물을 혼자서 당길 수 있습니까? 협력해서 함께 고기를 잡읍시다. 목숨을 걸고 싸울 힘으로 고기를 잡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연설에 감복한 주민들은 타라이를 여러 마을의 통일 촌장으로 추대했고, 타라이는 수락한다. “여러분이 저를 믿어준다면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타라이는 48개의 고기잡이 터를 균분하고 청년 남성들에게는 무예를, 여성들에게는 길쌈을, 노인들에게는 광주리 엮는 법을 가르친다. 타라이는 우수리강 일대의 부흥을 이끈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타라이의 별명은 ‘쌍칼여장수’였다. 아마도 사라진 10여년 동안 신들의 무예를 전수받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는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전혀 쌍칼을 사용하지 않는다. 쌍칼은 무력의 상징이다. 타라이는 분쟁 중인 우수리강 주민들을 얼마든지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재된 파워를 발휘하지 않는 방법으로, 연설을 통해 협력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성난 주민들을 굴복시킨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젊은이가 사냥을 갔다가 타라이의 관할 밖에 있는 하마탕 마을에서 사슴을 훔친다. 사슴을 찾으러 온 이웃에게 젊은이는 사과는커녕 폭력을 돌려준다. 그러자 하마탕 사람들이 사생결투를 신청한다. 이를 안 타라이는 하마탕 촌장이 내건, ‘사슴을 되돌려주고 채찍 50대를 맞으라’는 조건을 수용한다. 그리고 스스로 채찍을 맞는다. 이 행동이 도둑질한 젊은이도, 하마탕 주민들도 감동시킨다.

일이 마무리된 뒤 사람들이 물었다. 하마탕 사람들이 무서워 싸움을 피하느라 채찍을 맞았냐고. 타라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무서워한 것은 하마탕 사람들이 아니라 도리입니다.” 타라이는 무력이라는 손쉬운 길이 아니라 ‘도리’라는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한 족장이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를 연구한 인류학자 로버트 로위는 1948년에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남북 아메리카의 모든 인디언 사회에서 발견되는 족장의 공통점 셋을 든다. 첫째가 족장은 평화중재자라는 것. 족장은 강제가 아니라 전원합의에 의해 평화를 이끌어낸다. 셋째는 말을 잘하는 자만이 족장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전원합의에 이르려면 말로 모든 구성원들을 설득해야 하니까. 타라이한이 바로 이런 족장이었다. 그는 무력에 의한 강제를 버리고, 설득력 있는 연설을 통해 우수리강 주민들의 합의를 이끌어낸 지도자였다.

그러나 타라이한이 족장을 넘어 신이 되는 데는 또 하나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과 신 사이의 평화중재자가 되는 과정이다. 불만을 품은 세 젊은 적대자가 신통력 있는 늙은 이리와 연합하여 타라이한과 대결한다. 그 과정에서 타라이한은 이리의 침이 담긴 독(毒) 단지를 선물로 받는다.

이날 타라이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남쪽 하구에서 한창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 목이 마르던 참에 세 젊은이가 아가위즙 한 단지를 들고 타라이 앞에 와 공손히 말하였다.

“우리를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보답할 방법이 없어서 아가위즙을 가져왔으니 목이나 축이십시오.”

타라이는 세 젊은이와 아가위즙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 세 분의 마음이 정말 고맙긴 하지만 이 아가위즙은 냄새가 너무 역하니 돌단지에 담아두면 좋겠군요. 그렇지만 가련한 오빠, 어질고 약한 내 마음에 어찌 안 마실 수 있겠어요.”

이 말은 원래 늙은 이리가 한 말인데, 그녀가 어떻게 이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세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녀는 아가위즙을 받아들고 다시 말하였다.

“나는 이 즙을 마시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들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우니 감사히 받겠어요.”

타라이한은 아가위즙이 독물임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워’ 단번에 마신다. 이는 바로 로위가 지적했던바 족장의 둘째 특징이다. 족장은 ‘피통치자들의 끊임없는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족장은 경제적으로는 제일 가난한 상태에 처한다. 재화에 대한 요구는 아니었지만 타라이한은 적대적 주민들의 호의조차 거절할 수 없었던 것. 거절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타라이한은 ‘족장답기’ 위해 죽음마저 받아들인다.

그러나 죽음이 끝은 아니다. 유언에 따라 자작나무껍질에 싸여 큰 소나무에 매달린 뒤 부활한다. 타라이한 부재의 틈을 타 마을을 공격하는 이리떼를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의 과정은 족장 타라이한이 타라이한마마 신으로 승화되는 통과의례의 과정이었다. 타라이한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마을연합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선물로 내놓음으로써 신이 된 것이다. 타라이한은 악신을 제거하여 인신지간의 화해를 이뤄냄으로써 만주 궈하러족의 조상신이 되었다.

부쿠리용숀과 타라이한마마, 둘 다 집단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여 지도자가 된다. 전자는 청 황실을 이룩한 아이신기오로 집안의 조상으로 신격화되었고, 후자는 궈하러족의 조상신이 되었다. 전자는 ‘천명’이라는 일방적 권위로, 후자는 힘을 억제한 채 사약까지 받아들임으로써 지도자가 되고 신이 되었다.

과연 어느 쪽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웅일까? 남북의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한반도, 성폭력이라는 고통스러운 언어가 점령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치유할 영웅은 누구일까? 나는 부쿠리용숀보다는 타라이한마마 쪽이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아니 외부의 타라이한마마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타라이한마마를 불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촛불로 새 길을 열었듯이.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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