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4·3을 쓰지 않고는 문학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입력 : 2018.03.24 06:00:04 수정 : 2018.04.10 10: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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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박주연

경향신문 기자

제주 4·3 사건 소설로 처음 알린 현기영 작가

현기영 작가가 지난 19일 경기 성남시 분당 자택에서 제주 4·3을 이야기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현 작가는 4·3이 올해로 70주년이 됐지만 여전히 역사 속에서, 그리고 국민 인식면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현기영 작가가 지난 19일 경기 성남시 분당 자택에서 제주 4·3을 이야기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현 작가는 4·3이 올해로 70주년이 됐지만 여전히 역사 속에서, 그리고 국민 인식면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코흘리개 때 4·3을 겪은 나도 늙고, 4·3도 이제 늙었지만 여전히 국민들은 제주 4·3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참 안타까워요.”

지난 19일 경기 성남시 분당 자택에서 만난 현기영 작가(77)는 손바닥으로 왼쪽 뺨을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주 4·3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참사가 역사적으로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 때문인 듯했다. 1978년 ‘창작과비평’에 중편소설 <순이삼촌>(사진)을 발표함으로써 4·3을 세상에 처음 알렸고, ‘4·3 작가’로 통할 만큼 이후에도 4·3의 이야기를 작품에 끊임없이 담아온 그이기에, 간절함과 답답함이 더 큰 듯했다.

“많은 분들이 4·3을 제주지방에 국한된, 그래서 제주도민들이 앓을 수밖에 없는 풍토병처럼 인식하고 있어요. 4·3의 참사는 제주도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이야기이고, 섬이 아닌 육지에서 온 군·경 토벌대가 양민을 진압하고 학살한 참사예요. 그런데도 여전히 육지 사람은 물론이고 제주도민들조차도 4·3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언제 어떻게 일어난 사건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제주 4·3사건은 해방 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폭압적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학살된 사건이다. 참사는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도화선으로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를 거쳐 1954년 9월21일에야 끝난다. 제주도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명확한 진상규명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4·3 당시 토벌대의 방화로 고향인 제주시 노형동의 ‘함박이굴마을’이 소각될 때 현기영 작가의 나이는 고작 7살이었다.

“4·3을 쓰지 않고는 문학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 1978년 중편 <순이삼촌>이 ‘창작과비평’에 발표되기까지 30년 동안 4·3은 육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진 독재정권이 발설하지 못하도록 억압한 데다, 요행히 살아남은 분들도 엄청난 트라우마 때문에 자식들에게조차 이야기할 수 없었던 거죠.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라 이해가 안될뿐더러 알면 아들이나 손주까지 폭도나 빨갱이로 몰려 불행해질까봐 자기 내면에만 묻어둔 거예요.”

- 그런 이야기를, 그것도 유신독재가 최고 정점을 향해가던 엄혹한 시기에 소설로 발표한 용기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원래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순수문학을 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1975년 막상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니, 우선 고향에 대한 부채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4·3을 쓰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문학적으로 나아갈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썼어요. 쓰면서도 두렵고 떨렸어요. 제발 무사히 지
나가기만 간절히 바랐어요.”

보안사 끌려가 사흘 동안 매질
결국 ‘순이삼촌’ 금서로 지정
고문 당하고 1년은 글 못 썼죠

<순이삼촌>은 1949년 1월17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이 토벌대에게 학살당한 이른바 ‘북촌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현 작가는 북촌마을을 취재해 소설로 구현했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고교 영어교사로 근무할 때여서 겨울방학을 이용해 취재에 나섰다고 했다.

- 취재는 수월했나요.

“그렇지 않았어요. 북촌마을의 사정은 그곳 출신인 고교 동창과 서울에서 자취하던 시절에 들었어요. 이 이야기는 언젠가 내가 써야겠구나, 마음먹고 있었죠. 하지만 막상 소설을 쓰려고 하니 취재가 쉽지 않았어요. 여러 차례 찾아가도 하나같이 말씀을 안해주시니까요.”

-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내가 울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할머니들께 말했어요. 식구가 죽었는데 무섭다고 입을 다무시면 저승에 가서 꾸중 듣지 않겠느냐고요. 젊은 작가가 찾아와서 그 당시 억울했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는데 말 안해줬다고 야단맞지 않겠느냐고요. 그러자 차츰차츰 당시의 대학살 상황을 말해줬어요. 말하는 이도, 듣는 나도 같이 울었어요. 서울에 올라와서 <순이삼촌> 쓸 때도 눈물이 났어요.”

- <순이삼촌>과 이듬해 역시 4·3을 소재로 발표한 단편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이야기>를 묶어 1979년 11월 단행본으로 냈어요. 직후 심한 고초를 당하셨다고요.

“그랬죠. 단행본이 나온 게 10·26 직후였는데,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가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으니까요.”

-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캄캄한 지하였는데, 군복을 던져주며 갈아입으라고 하더군요. 군복 바짓가랑이에 피가 묻어있었어요. 사흘 동안 모진 매질을 견뎌야 했어요.”

DJ때 첫 단추 끼운 4·3 진상규명
보수정권 9년은 외면했지만
문 대통령, 추념식 참석하겠다 해

현 작가는 “그곳에서 임 하사로 불렸던 자에게 첫째날은 야구방망이로, 둘째날엔 싸릿대로 구타를 당했고, 사흘째 되는 날엔 중사 여러 명에게 무지막지하게 발길질을 당했다”고 했다. 그는 “임 하사는 때리는 와중에 ‘왜 이런 불순한 책을 썼냐’고 물었고, 나는 ‘비극적 참사를 역사에 밝혀놓지 않으면 또다시 전철을 밟을 것 아니냐’고 더듬더듬 답했다”고 말했다. 그후 그들은 작가의 몸에 핀 불그죽죽하다가 잉크빛으로 변한 멍이 사라질 때까지 한달간 남부경찰서 유치장에 감금해놨다가 풀어줬다. 고문한 사실이 외부에 드러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걸려면 국가보안법일 텐데 그럴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랬다간 재판 과정에서 금기어였던 제주 4·3이 공개될 테니까요.”

“4·3을 쓰지 않고는 문학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 전두환 신군부는 결국 <순이삼촌>을 금서로 지정했고, 10년간 판매금지됐죠.

“유치장에서 나오고 얼마 후 임 하사가 ‘<순이삼촌>은 어떻게 됐냐’며 전화를 걸어왔어요. 재판(再版·2쇄)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재판(裁判)으로 알아듣고는 ‘어어… 그거 우리가 재판 안 걸기로 했는데’ 하며 당황하더라고요. 여하튼 책이 잘 팔리자 이번엔 종로경찰서로 끌려갔어요. 일주일간 밤샘조사를 받다가 풀려났죠. 결국 <순이삼촌>은 당시 문공부에 의해 판매금지 처분됐고요.”

- 고문 후유증은 없었습니까.

“빨간 것만 보면 겁나고 싫었어요. 군인이나 경찰만 봐도 가슴이 섬뜩하며 두려움을 느꼈죠. 레드콤플렉스였어요. 매의 효과로 실제로 1년간 글도 쓰지 못했어요. 인간의 정신이 이토록 나약한 것이구나, 생각했어요.”

- 그래도 43년간 작가생활을 하면서 발표한 작품의 3분의 1이 4·3을 소재로 했을 만큼 다시 4·3을 이야기했어요. 1999년 자전적 장편소설인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도 4·3이 필연적으로 나오고, 그로 인해 이 책이 이명박 정부 때 국방부 금서로 선정되기도 했죠.

“<순이삼촌> 발표 후 서울에 있던 제주 출신들이 모였고 같이 4·3 진상규명운동을 하면서 1981년부터 다시 4·3을 쓰게 됐어요. 하지만 나도 문학적으로 4·3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독자들도 다른 이야기를 원했고요. 그런데 어느 날 똑같은 꿈을 두 번 연속 꿨어요.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데, 고문의 주체가 임 하사가 아니라 4·3 영령들이에요. 그들은 ‘네가 뭘 한 게 있다고 4·3을 떠나려고 하느냐. 매우 쳐라’라고 했어요. 꿈속에서 맞다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깼죠. 이건 운명이구나, 생각했어요.”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첫 단추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끼웠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제주 4·3 특별법을 공포했고, 이 특별법에 따라 4·3 희생자·유족 신고가 이뤄졌다. 2003년 불완전하게나마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제주도민에게 ‘국가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사과하고 대통령 자격으로 4·3위령제에 처음 참석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4·3진상조사단을 없애고, 박근혜 정부가 4·3평화재단 국고지원 확대 공약을 지키지 않는 등 ‘이명박근혜’ 정부 9년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전혀 진척되지 못했다는 게 4·3 관련 단체의 주장이다.

“박근혜 정권 때 4·3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했지만, 추념일은 박 정권이 하고 싶어 한 게 아니에요. 제주도민이 압박해 대선 후보시절 공약하게 했고 2013년 4·3특별법 개정 당시에 부칙으로 2014년 지정돼야 한다고 명시돼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명박·박근혜는 재임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4·3위령제에 내려오지 않았어요.”

- 지난 설연휴(2월15일) 때 문재인 대통령이 전화를 해서 “4·3과 관련해 정부에 부탁할 게 있느냐”고 물었지요. 현 작가께선 “4·3을 전 국민이 알도록 전국화 운동을 벌이고 있고 4·3을 통해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 있도록 4·3의 세계화도 추진하고 있으니 눈여겨 봐달라”고 화답했고요.

“전국화와 세계화 운동은 4·3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길이기도 해요. 곧 정상회담을 앞둔 남과 북도 마찬가지죠. 미국과 소련의 양대 세력에 의해 한반도는 73년이나 분단됐어요. 남북한 정상 간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화해와 공존, 평화로 나아가야 해요. 문 대통령이 남북대화를 재개하는 단초를 열었는데 언젠가는 남북회담이 제주도에서 열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70년 전 제주 4·3은 분단이 아닌 통일을, 하나 된 조국을 외쳤으니까요.”

- 현 작가는 참여정부 때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을 맡았었는데, 문 대통령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나요.

“별다른 인연은 없었어요. 다만 그분이 2012년 18대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 선거운동을 하며 4·3을 보고 싶다고 해서 안내한 적이 있었죠. <순이삼촌> 문학비가 있는 북촌 너븐숭이기념관 등을 안내했는데, 4·3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어요. 지난번 통화에서 올 추념식에 참석하시겠다고 했어요.”

- ‘제주4·3범국민위원회’는 희생자·유족에 대한 배·보상 등이 담긴 4·3특별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어요.

“요행히 살아남은 분들도 10년 내 다 돌아가시게 돼요. 그분들의 살아생전에 위로가 되는 어느 정도의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 지금도 4·3을 폄훼하고 부정하며 흔들려는 극우세력들이 있지만 4·3이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민·관이 함께 노력해야 해요.”

성추문 연루된 고은 시인
그분의 ‘기행’ 비난 당연하지만
시와 업적까지 파내는 건 가혹

인터뷰 말미, ‘미투 운동’의 여파로 전국을 강타한 고은 시인의 성추문에 대해 원로작가의 입장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현 작가는 “그분(고은)이 술자리에서 별스럽게 행동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다”면서도 “술 마시면 나오는 고약한 습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매도하고 늘그막에 완전히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다”고 했다.

- 고은 시인의 술자리 기행을 목격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분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서 여럿이 식사를 겸한 술자리를 한 적은 있어도 취하도록 같이 마셔본 적은 없었어요. 그분의 술자리 행동에 대해 좀 듣기는 했는데 좀 별종이다, 기행이다, 이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최영미 시인이 이야기하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어요.”

- 성추문이 나오자 교육부는 교과서에 수록된 고 시인의 작품을 삭제하겠다고 했고, 지자체도 시인의 흔적 지우기에 나섰는데요.

“너무 가혹한 것 같아요.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슨 성폭행을 한 것은 아니지 않아요? 이 양반은 (문학적으로) 천재성을 갖고 있다고 봐요. 모든 시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언어로 우리의 감수성과 감정생활을 풍부하게 해주는 게 있어요. 그분의 기행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문학인으로서 범상치 않은 좋은 시들까지, 민주화운동의 업적까지 파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해요.”

- 미투 운동이 향후 문단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미투 운동은 분명 우리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거예요. 남성들의 술자리 문화도 많이 달라져야겠죠. 여성도 성추행당하는 즉시 상대방의 귀싸대기를 때리더라도 분명히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요. 하지만 그로 인해 서로 간 벽이 세워지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분당 자택에는 부인 양정자 시인(74)이 함께 있었다. 기자가 준비한 빨간색 장미꽃다발에 시인의 얼굴도 발갛게 물들었다. 시인의 감수성이 느껴졌다. 집안의 투박한 항아리와 궤짝 등은 물론 부부가 권한 한라봉에서도 제주 내음이 풍겼다. 현 작가는 4·3을 이야기할 때는 몹시 진지했지만 웃을 때만큼은 하회탈을 연상시킬 만큼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팔순을 눈앞에 둔 그가 정신만큼은 여전히 푸르른 청년이라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그가 “2016년 겨우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들었고, 광장민주주의에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조국의 분단과 압제를 거부하며 봉기한 4·3의 피가 노장이 된 지금도 펄떡이며 흐르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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