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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적 순수성’이라니요

2018.03.26 21:03 입력 2018.03.26 21:07 수정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최근 개막한 ‘이성자 :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전 자료를 찾다가 서정주(1915~2000)의 짧은 전시 평을 봤다.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에 부친 글이다. “‘(프랑스 소설가 미셸 뷔토르는 이성자가) 프랑스의 깊숙한 시골의 야성의 들꽃들을 비롯한 프랑스의 자연에 대해서도 가장 정통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인이다’는 뜻의 말을 했거니와, 나는 그 역으로 ‘이성자는 어느 나라에 가서 얼마를 살건 간에 자기 조국 한국의 전통의 정신적인 장점과 그 끈기와 또 처녀적인 순수성을 언제나 잘 아울러 간직하고 있는 신화적인 화가다’고 하고 싶다.”

[기자칼럼]‘처녀적 순수성’이라니요

‘처녀적인 순수성?’ 프랑스에서 활동한 이성자(1918~2009)는 1960년대 ‘여성과 대지’라 불리는 작품 시기를 거친 적이 있는데, 그때 ‘여성’이 가리킨 대상은 주로 어머니였다. 대지는 나중 우주로 확장되기 전 이성자 미술철학의 주개념이었다. 음양과 우주의 예술 철학 세계를 이룬 주체적인 작가의 초대전에 기대하는 것이 처녀적인 순수성이라니…. 보부아르의 말을 빌리자면, 이성자는 처녀적인 순수성을 간직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개념조차 낯설던 말 그대로 ‘쌍팔년’ 이야기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고은의 말은 어떤가. 그가 정치인들을 ‘숫처녀’와 ‘똥갈보’로 구분한 건 2012년이다. ‘처녀적인 순수성’이나 ‘숫처녀’는 억압의 말이다. 접두사 ‘숫’의 용법을 보면 된다. 숫은 명사에 붙어 ‘더럽혀지지 않아 깨끗한’이나 ‘새끼를 배지 않는’ 뜻을 더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왜곡되며 축적된 젠더 의식을 노골적으로 반영한다. 스테레오 타입의 이 말이 왜 성차별과 젠더를 반영하는지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여성의 자리에 남성을 대입하면 성차별을 조장하고 성역할을 강요하는 말들을 금세 알 수 있다. ‘숫총각 그대로의 정치인’ ‘총각적인 순수성’….

1950년대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했다가 1970년대 그의 보수성과 군사독재정권과의 친화성을 비판하며 절연했던 고은도 ‘처녀’나 ‘순수’에 관한 고정 관념 또는 판타지는 떨쳐내지 못했다. 좌우 가리지 않고 터져나온 문화예술계 성폭력·성차별 기원의 지류 하나를 나는 두 시인의 발화에서 확인한다.

순수와 순결의 이데올로기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지금도 뉴스 검색창에 ‘처녀작’이니 ‘처녀비행’을 치면 수많은 결과가 나온다. 사회의 진보는 차별의 언어에 어떻게 대응하고, 변화시키는지와 직결된다. 한국 사회는 아직 이런 언어에 민감하지 못하다. 이 문제는 때로 폭력의 양상을 띤다. 아이린은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사이버 폭력을 당했다. 걸그룹 멤버에게 요구하는 ‘섹시’나 ‘순수’ 기준에 어긋난 것이다. 이 폭력엔 수잔 팔루디가 1991년작 <백래시>에서 규명한 반페미니즘 흐름이 들어 있다. 일군의 남성들은 아이린과 <82년생 김지영>에 ‘페미니즘’ 딱지를 붙였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불순한 말’(a dirty word)로 바꾸려는 시도다. ‘걸그룹다운 순수성을 언제나 잘 아울러 간직해야’ 할 멤버가 ‘불순한 페미니즘’에 물드는 걸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왜 소수자인지도 이 사태에서 볼 수 있다. 책 한 권 읽었다는 말을 한마디 했다고 언제든 내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을 만들든 오로지 ‘처녀적 순수성’이나 여성성으로 재단되는 것도 소수자라서 그렇다.

순수? ‘순수의 시대’를 검색하면 동명 영화에 나온 배우의 베드신과 몸매에 관한 기사나 블로그 글이 우후죽순 뜬다. 한국 사회의 ‘순수’가 실제 욕망하는 것들의 단면을 아이로니컬하게 드러낸다. 이 욕망은 30년 전 서정주의 평에서부터 지금의 반페미니즘 흐름까지 내재돼 있다. 이 욕망은 은폐되거나 용인되면서 때로 범죄와도 이어진다는 사실을 지금의 미투·페미니즘 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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