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여, 병부터 깨자

2018.03.26 21:10 입력 2018.03.27 19:16 수정
정은경 | 문화평론가

JTBC 종영 드라마 <청춘시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불운한 가정의 가난한 여대생 윤진명은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셰어하우스에서 함께 사는 ‘강이나’는 수상쩍은 애인들의 ‘카드’로 화려하게 살아가는 가짜 여대생이다. 그리고 이 둘의 대조적인 삶의 방식은 서로를 마음속 깊이 적대하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윤진명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레스토랑의 매니저로부터 배려와 유혹을 받는다. ‘손톱 나을 때까지 카운터에서 일해.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이런 말과 함께 매니저는 윤진명의 허벅지를 만지며 ‘명백히’ 성추행한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물러난 윤진명은 집에 돌아와 ‘강이나’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독백한다.

[직설]여성들이여, 병부터 깨자

‘그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너를 경멸했다. 내가 너보다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아니었어. 그동안 나에겐 그저 너만큼의 유혹이 없었던 것뿐이야.’

윤진명의 경험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것은 그것이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만 해도 미투 관련 뉴스가 터져나올 때마다 어두운 저편에서 ‘나도’라며 불쾌한 경험들이 솟아오른다. 꺼내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소란 피울 필요가 없다고 암묵적으로 치워버린 일들. 가령, 신체검사에서 선생님의 수상쩍은 손길, 그리고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던 선배와 상사의 농담과 무례한 질문들.

문제는 명백히 실정법 차원에서 고소해버릴 수 있는 낯선 타인의 성범죄가 아니라, ‘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복잡미묘한 사건들이다. 미투 백서를 쓰자면 배제할 수 없는 이러한 일들에 대한 공식적인 이의제기에 대해 대다수의 남성들은 불편해한다. 그러나 어떤 커다란 ‘변화’에는 어쩔 수 없이 과잉과 부작용도 함께한다. 그 과잉들이 이제껏 사적 영역이라며 덮어두었던 공적 영역의 잉여들의 공격이라면, 우리 모두가 응당 감당해야 할 ‘대가’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불편함들이다. 불편한 것은 남자들만이 아니다. ‘나도’ 혹은 ‘너와 함께’라며 손드는 여성의 마음속에도 불편한 어떤 자락은 있다. 그 불편함은 ‘성’이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것이 아니라 남녀 혹은 성적 관계 속에 놓인, 무궁무진한 변형이 가능한 ‘에로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남자와 여자는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도 만나고 선배와 후배로도 만나며, 선생과 제자로도 만난다. 그 속에는 연인도 있고, 성추행범도 있다. 또 <청춘시대>에서처럼 권력을 앞세운 유혹도 존재한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들을 변별하고 솎아내며, 그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함께 슬기롭게 일하고 사랑하는가이다.

<청춘시대>에서 윤진명은 매니저로부터 새로운 사업 파트너 제안을 받고, 외딴 별장으로 간다. 그러나 별장에 들어가기 전, 뽀로로 캐릭터의 유아용 실내화를 보고는 와인병을 만지고 있는 매니저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흔한 거네요. 생각해보면 나랑 그렇게 다른 사람도 아닌데 이상하게 겁먹고, 어렵고. 마치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그곳을 돌아나오고, 예상대로 직장에서 온갖 괴롭힘을 당하다가 그만두게 된다.

얼마 전 선배랑 미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여자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성추행이든 뭐든 그런 일 있으면 병부터 깨고 보자.” 우스갯소리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웃을 일만은 아니다. 왜 안 되는가. 윤진명처럼 왜 “아닙니다”라고 와인을 거절하면 안 되는가. 왜냐하면, 새로운 사업 파트너라는 강력한 기회뿐 아니라 현재의 직위도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여혐 남혐의 구도나 펜스룰로 갈라치는 ‘결별’이 아니라, 혹은 미투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 함께 ‘같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여성들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공적, 사적 영역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개인이 어떻게 주체적이며 성숙하게 이성을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 생물학적 성의 생리라든가 ‘남자는 다 늑대다,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닌, 사랑과 성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미투 운동과 더불어 이 실질적인 방안을 여성가족부가 주도적으로 마련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김수영식의 ‘사랑하는 싸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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