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맞선 예술, 미투라는 거울 보며 성찰을

2018.03.29 21:28 입력 2018.03.29 21:39 수정

[세상읽기]블랙리스트 맞선 예술, 미투라는 거울 보며 성찰을

미투와 블랙리스트, 그것은 아마도 지금 곤경에 처한 예술의 상반된 두 얼굴일 것이다. 블랙리스트는 국가가 예술가에게 자행한 가장 천박한 형태의 상징폭력이다. 미투는 권력을 가진 예술가가 그에게 종속된 공동체에 자행한 가장 참담한 형태의 젠더폭력에 맞선 상징저항이다. 블랙리스트는 정치적 이념의 잣대로 예술가를 배제한 국가의 검열 장치이다. 그것은 통치자의 지시에서 문화 관료들의 실행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를 냉전-이념의 틀로 구별지으려 했다는 점에서 유신정치의 회귀이며, 그것의 종말을 확증하는 징표이다. 블랙리스트는 보수 정치권력 10년 통치술의 무의식이며, 문화융성이라는 허울 좋은 기표의 무의식이기도 하다. 블랙리스트는 보수 정치권력이 진보적 예술가들을 포획하려는 공작정치였던 것이다.

예술계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오랫동안 참담한 겨울을 보냈고, 그 공작정치가 폭로되면서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촛불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공작’으로서 블랙리스트는 예술가를 옥죄는 배제의 장치이지만, ‘사건’으로서 블랙리스트는 저항의 계기였다. 예술가들이 광화문광장 캠핑촌에서 143일간 노숙농성을 하면서 국가검열과 배제에 맞서 저항했던 것은 오로지 블랙리스트라는 사건과 그 사건이 주는 예술의 총체적 파국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술 파국은 블랙리스트로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 파국의 최종 형태는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바로 젠더폭력이었다. 미투는 그것을 알게 해주었다. ‘운동’으로서 미투는 예술계에 오랫동안 신체화된 젠더폭력에 맞선 저항의 연대이면서, 블랙리스트라는 정치적 파국을 다시 내파시키는 ‘자기 부정’의 동력인 셈이다.

미투 운동이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에 촉발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것은 여혐 논쟁으로 환기된 젠더운동의 진화된 형태만은 아니다. 그것은 블랙리스트에 맞선 예술행동 안에 감추어진, 혹은 은폐된 젠더폭력의 폐부를 드러내는 예술운동의 진화된 형태이기도 하다. 미투 운동이 블랙리스트에 속한 진보적 남성 선배 예술가들을 향한 것도 그런 점에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김어준 식의 음모론으로 귀결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예술계 내 위계 권력의 상층부에서 성공가도를 달린 진보적 남성 예술가들이 같은 장 안에 함께 있었던 여성 후배들에게, 제자들에게 습관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성폭력을 자행했던 것은 단지 은폐되었을 뿐이다. 젠더폭력은 블랙리스트라는 훈장으로 은폐될 수 없다. 미투는 우리 안의 블랙리스트를 환기시켰다. 그것은 우리 안 젠더폭력의 자명성을 드러낸 것뿐 아니라, 진보적 이념의 논리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허위의식을 폭로했다.

저항과 진상조사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종결을 지으려 했던 블랙리스트 사건은 지금 미투라는 거울을 마주하고 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박근혜를 감옥에 보내고, 진상조사와 관련자 추가 처벌만으로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사건은 매우 불편하게도 지금 미투라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그리고 사건의 당사자이자 그 사건을 주도했던 진보적 예술가들도 미투라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블랙리스트와 미투는 대립적이지만, 어떤 점에서 예술의 장을 파괴시킨 강력한 폭탄과 같은 것이다. 블랙리스트가 예술의 장 외부에서 날아온 폭탄이라면, 미투는 예술의 장 내부에서 투척된 폭탄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미투 운동이 예술의 장을 회복불가능하게 소멸시킬 것이라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다. 예술의 생존을 위해 적당히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예술의 장은 미투로 내파되어 완전히 새로운 장으로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은 블랙리스트 사건의 거울효과이다. 블랙리스트는 미투라는 거울을 통해 성찰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미투는 우리 안의 블랙리스트라는 검은 얼굴을 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미투는 촛불혁명의 이행을 위한 예술계 내 사투의 언어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