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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이스와 옥녀 한복처럼…엄숙했던 일본 초등 졸업식 뒤흔들다

2018.03.30 17:11 입력 2018.03.30 17:15 수정
필자 박철현

박철현의 일기일회

초등학교 졸업식날 치마 저고리를 입은 미우(가장 오른쪽)가 기모노를 입은 친구들과 활짝 웃고 있다. 박철현 제공

초등학교 졸업식날 치마 저고리를 입은 미우(가장 오른쪽)가 기모노를 입은 친구들과 활짝 웃고 있다. 박철현 제공

큰딸 미우의 졸업식이 열렸다. 3학기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초등학교는 한국과 달리 3월에 졸업식이 열린다. 일본 초·중·고등학교는 방학도 세 번이다. 방학을 세 번이나 하니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간이 매우 짧아 실제로는 한국 방학기간이 더 길다. 여름방학이 7월 말부터 9월 초로 그나마 방학답고 나머지 겨울방학과 봄방학은 각각 2주일 정도에 불과하다. 하긴 평균기온 38도를 넘나드는 도쿄의 불볕더위 때문에 한여름에는 학교생활이랄까, 야외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는 요소도 있고. 그중에서도 학교가 가장 바쁜 달을 꼽으라면 단연 3월이다. 최고 학년의 졸업을 기점으로 봄방학이 시작되고 짧은 방학기간 동안 진학, 학급 편성, 담임 배치, 선배교사의 정년퇴직 등이 동시에 몰려 있어 공적, 사적으로 업무량이 엄청나다고 한다. 그 안에서도 졸업식은 학교 연중행사 중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대의 이벤트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행사에 미우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참석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졸업식 당일 아침 다시 한번 “너 정말 치마저고리…”라고 묻는 아내와 나의 질문을 거침없이 자른 후 “한번만 더 물어보면 일탈한다!”라는 소설 속에서나 나올 답변을 한 후 능숙하게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다. 그 자연스러움에 놀라 “너 왜 이렇게 한복을 잘 입냐?”고 물어보니 “유튜브에 널리고 널렸던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 후 장식 꽃에 머리핀까지 끼워 머릿결을 단정하게 정돈했다. 가슴팍의 꽃 모양 장식은 아내가 15년 동안 동고동락해 온 미싱으로 직접 만들었다. 서당 개 3년이면 천자문도 떼는 판국에 15년이나 애들 옷, 가방 등을 만들어 왔으니 이젠 뭘 만들어도 프로의 향기가 느껴진다.

놀라운 건 머리핀이다. 평소 미우는 머리카락을 올백스타일로 올리고 머리핀으로 고정시켜 이마를 드러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트와이스 때문이다. 요즘 일본의 미우 또래 여자아이들은 한국 걸그룹 트와이스의 외모를 흉내내는 게 유행이다(믿기지 않겠지만 정말이다). 그런데 트와이스 멤버들의 헤어스타일을 보면 이마를 완전히 드러낸 고전적인 올백스타일이 한 명도 없다. 그런데 이번엔 미우가 올백스타일이다. 왜 그런 헤어스타일을 하냐고 물었더니 “옥녀가 이러던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화장하느라 바쁜 아내에게 “옥녀가 뭐야?”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몰라. 무슨 NHK 위성에서 했던 한국 역사드라마인 것 같던데 거기 나오는 주인공 헤어스타일 따라 하나 보지”라고 건성으로 답한다. 옥녀라는 드라마가 있었나 싶어 검색을 해보니 원제가 <옥중화>라고 하는데, 독자 여러분 이 드라마는 대체 뭐죠? 아니 어떻게 된 게 아비도 모르는 드라마를 일본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녹화까지 해 가며 볼 수가 있다는 건지.

트와이스는 작년 일본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NHK의 송년대표방송 <홍백가합전>에도 나왔다.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당대의 톱 아이돌로 자리매김해 일본 10대 초반의 여자아이들을 모조리 팬으로 만들어 버린 그룹이다. 미우나 둘째 유나는 물론 그들의 친구 사야카, 마호, 마유, 유카 등등은 팀을 만들어 아예 트와이스의 ‘TT’ 노래와 춤을 완벽하게 따라 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유사 트와이스 그룹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만 예닐곱팀 존재한다. 저학년 아이들은 논외로 치고 4~6학년 고학년 여자아이라고 해 봤자 다 합해서 120명 정도밖에 안 되는데 9명이 6팀이면 54명이다. 한류는 꺼진 게 아니라 연령대가 낮아져 우리 같은 ‘아재’들이 모를 뿐이다. 이러한 연유로 트와이스는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옥중화>는 정말 의외였다. 그런데 이 <옥중화>가 (좀 찾아보니) 2017년 NHK BS 프리미엄의 연간 종합 시청률 랭킹에서 줄곧 상위권을 기록한 킬러 콘텐츠였고 그 여세를 몰아 올해 4월부터 NHK 지상파에서 정식 방영하기로 결정됐다고 한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거듭 놀라는 나에게 둘째 유나가 “뭐야? 그럼 고수도 모르겠네? 아빠, 정말 한국 사람 맞아? 요즘 한국이 대세야, 대세”라며 핀잔을 준다. 내가 공사현장을 전전하던 지난 6개월간 대체 여기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단 말인가. 왜 나는 이런 것들을 하나도 몰랐지?

초등학교 졸업증서를 손에 쥔 미우. 박철현 제공

초등학교 졸업증서를 손에 쥔 미우. 박철현 제공

어쨌든 ‘옥녀 스타일’로 머리를 단정히 한 미우가 졸업식이 거행되는 체육관 입구로 입장하자 학부모는 물론 교사들도 일순 “와!” 하는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박수조차 허용되지 않는 엄숙함과 격식이 자리 잡은 졸업식에서 이런 반응은 매우 신선했다. 그 탄성에도 굴하지 않고 치마가 바닥에 닿을까 봐 치마 밑단을 오른손으로 약간 휘감으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곧이어 있었던 국가제창 순서에서 한복을 입은 미우가 기미가요를 부르는 모습은 그것 자체로 뭔가 역설적이긴 했지만 좋은 쪽으로 받아들였다. 일본 땅에 태어나 아빠는 한국인, 엄마는 일본인이며 실제로도 현재 이중국적자인 미우가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온몸으로 포용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말이다. 써놓고 보니 꿈보다 해몽 같긴 한데 졸업식이 끝난 후 미우에게 살짝 국가제창 어땠냐고 물어보니까 “뭐가?”라는 짧은 반문이 되돌아온다. ‘어땠냐’라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맞다. 미우가 치마저고리를 입겠다고 했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 혼자 괜히 걱정돼 왜 입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그때도 “뭐가?”라는 대답을 분명히 했다. 미우의 머릿속엔 ‘일본인이라서’ ‘한국인이라서’라는 고정관념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런 것에 구애돼, 내 딴엔 조심스럽게 하는 질문이긴 한데 결국 그에게는 우문이 되는 셈이고 그 우문에 미우, 아니 다른 아이들도 “뭐가?”라는 현답을 내놓는 것이다.

두 시간에 걸친 졸업식이 끝났다. 대독과 생략이 없다. 졸업생 82명 한 명 한 명이 무대 중앙에 설치된 단상에 올라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졸업을 인정받는 졸업증서를 수여받은 후 체육관 왼편에 설치된 증서를 넣는 장소로 이동한다. 졸업생은 이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선생님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후 졸업증서를 건넨다. 선생님 역시 목례를 한 후 공손히 건네받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그것을 동그랗게 말아 통(옛날에는 대나무를 깎아 만든 통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단단한 종이재질로 만들어진 것)에 집어넣은 후 뚜껑을 씌워 졸업생에게 다시 건넨다. 졸업생은 다시 건네받고 1보 뒤로 물러난 후 선생님을 한번 쳐다본 후 서로 고개를 깊이 숙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생님 쪽이 더 공손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데 이 광경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와 졸업식이 다 끝난 후 미우 담임에게 이 절차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내가 한국인임을 잘 알고 있는 담임은 친절하게 설명한다.

“학교를 졸업했으니 이젠 어른이 되는 겁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 다 마찬가지입니다. 동등한 입장이 됐으니 함부로 행동하고 무시하는 듯한 건 좀 그렇잖아요. 게다가 졸업식은 신성한 기념식이니까. 근데 한국은 좀 다른가 봐요?”

마지막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 제가 졸업한 지 좀 오래되어서 기억이 좀…”이라며 얼버무렸지만 내 느낌엔 이 정도로 엄숙하진 않았던 기억이 난다. 역으로 군데군데 선생들과 장난치고 웃고 떠들었던 건 확실히 떠오른다(학교가 남고라서 우는 친구들은 본 적이 없다).

반면 지지난 화에서 언급했던, 미우가 손들어서 뽑혔다는 재학생에게 보내는 편지 낭독은 내 착각이었다. 알고 보니 졸업생이 단상에 전부 올라가서 정해진 말을 몇 마디씩 하는데 그 원고를 들 사람으로 열명 정도를 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다행이다. 82명 전부 다 단상에 나갔는데 미우만 눈에 들어온다. 고작 서너명 올라갔다면 얼마나 튀었겠는가. 치마저고리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다. 아니다, 트와이스와 <옥중화> 덕분이라 해야 하나? 졸업식이 끝난 후 미우에게 물었다. 졸업식 어땠냐고. 그 나이 또래의 쿨한 대답 “뭐, 별로”가 돌아오지만 자부심으로 충만한 눈이 매우 웃고 있네. 그래, 잘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부턴 정말 너 혼자 결정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번에 치마저고리를 입겠다는 판단을 너 스스로 한 것처럼 말이다. 중학생이 되어서 또 어떤 결단으로 아빠와 너의 팬들을 놀라게 할지 기대해도 되겠지? 진심을 담아 졸업 축하한다.



[다른 삶]트와이스와 옥녀 한복처럼…엄숙했던 일본 초등 졸업식 뒤흔들다


▶필자 박철현 2001년 도일. 한국에선 영화 연출을 공부했지만 일본에선 오마이뉴스재팬, JP뉴스 등에서 기자로 10년간 일했다. 도쿄 우에노에서 바를 운영하기도 했다. 일본인 아내와의 러브스토리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출간해 화제를 모았고, <일본 제국은 왜 실패했는가>와 <인터넷 동반자살>을 번역했다. 1976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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